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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유희규(劉喜奎): 민국총통 5명의 구혼을 거절한 대미녀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하호연(夏浩然)

 

민국시대의 여배우 유희규는 5명의 총통에게도 시집가지 않고, 오히려 하급군졸 최승치(崔承熾)에게 시집간다. 그 원인은 최승치가 신문에 그의 상사의 부정부패행위를 폭로하여 민중의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희규는 이 남자가 할말은 다 하는데 탄복하여 그에게 평생을 맡긴 것이다. 이런 일을 지금들으면 너무 먼 옛날 이야기같지만, 확실히 이미 오래 전의 얘기이기는 하다.

 

희극대가 조옹(曹禺)은 1980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 희극계에서 유희규를 얘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1,2십년대에 그녀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명곤령(名坤伶)이었다. 유일하게 담흠배(譚鑫培), 양소루(楊小樓)와 상대하여 창을 할 수 있는 여배우였다."

 

유희규는 몸매가 날씬하고, 오관이 영롱하며, 미목이 그림같고, 기질이 고아하며, 청려불속(淸麗不俗)했다. 특히 그녀는 고아청려(高雅淸麗)하여, 그녀를 보는 사람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극을 하는 여배우들은 모두 고르고고른 미인들이다. 그녀가 나타나지않았을 때, 무대는 모조리 선녀처럼 예쁜 여인들이여서 보는 사람들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이지만, 일단 유희규가 등장하여 예쁜 녹소리로 노래를 하면 그녀와 같은 무대에 서 있는 여배우들은 모조리 평범해 보이게 된다.

 

무대에 유희규가 나타나면 관중들의 눈동자는 커진다. 그래서 그녀에게 빠지며 그녀가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고 한번 손을 내밀고 한번 발을 내딛일때마다 거기에 도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무대에 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원제일홍(梨園第一紅)'이 된다. 희극계의 대왕 담흠배마저도 이렇게 말한다: "남자에는 매란방이 있고, 여자에는 유희규가 있다. 나는 이제 그만두어야 겠다."

 

그녀는 매란방보다 1살이 어리다. 1895년 하북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하북방자(河北梆子)를 배운다. 나중에는 경극을 배운다. 매란방이 신극을 많이 만들 때, 유희규는 천진에서 적지 않은 신극에 참가한다. <환해조>, <흑적원혼>, <신차화>등등.

 

유희규가 북경,천진,상해에서 인기를 얻을 때, 각계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그녀에 대한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매체에서는 심지어 담흠배, 매란방도 모두 유희규만 못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온세상에 넘치는 칭송 속에서도 유희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극단에서 그녀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진지하게 같이 극을 하고, 진지하게 모든 역할을 소화했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폼을 잡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생하고 같히 즐겼으며 다른 사람이 펑크를 내면 그 자리를 기꺼이 메웠다. 자신의 입고먹는 것도 다른 배우들과 똑같이 했다.

 

민국시데 예술스타중에서, 유희규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빛나는 스타중 하나이다. 그녀에게 빠진 팬들 중에는 고관대작부터 신사명류, 아래로는 장삿꾼 병졸까지 아주 많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은 강물의 붕어떼처럼 많았다. 그에게 충실한 '팬'들은 하늘의 별들 만큼이나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여기에서는 그녀의 두 열혈팬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유희규가 얼마나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기서에게 조카가 한 명있는데, 유희규를 좋아해서 거의 미칠 듯한 수준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와 내기를 건다. 그가 감히 사람들 앞에서 유희규를 끌어안지 못할 것이라고. 그날 저녁 유희규는 "광덕루"에서 <서상기>의 홍낭을 연기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취한 것같았다. 단기서의 조카는 더더욱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같았다. 극이 끝난 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 유희규를 끌어안고 미친듯이 입을 맞추었다.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심간보배(心肝寶貝), 네 생각에 죽을 것같다!" 깜짝 놀란 유희규는 얼굴색이 창백해진다. 사람들은 즉시 그를 붙잡아 경찰국으로 보내고 그에게 성명을 물어보지만 그는 죽어라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50대양의 벌금을 내게 하고 사건을 마무리짓는다. 경찰국을 나서자, 그는 크게 소리친다: "통쾌하다. 통쾌하다. 가치가 있다. 가치가 있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 일을 크게 보도하다. 호사가중 하나는 시를 지었다. "빙설총명목하전(氷雪聰明目下傳), 희중괴수여중선(戱中魁首女中仙), 하래급색아당돌(何來急色兒唐突), 일성심간오십원(一聲心肝五十元)"

 

저명한 희곡가 장백구 선생은 그의 명작 <홍유기몽시주>에서 이 일을 기록하고, 장백구선생도 시를 지었다: "독점화괴삼경원(獨占花魁三慶園), 망해난해구수연(望海難解口垂涎), 차생일문진여원(此生一吻眞如願), 순수도래오십원(順手掏來五十元)"

 

광동흠렴도를 지낸 바 있는 만청유로로 자처하는 고도명사 역실보(易實甫)는 재주가 넘치고 글재주로 이름을 날렸으며, 유희규를 찬미하는 시사를 많이 남긴 바 있다. 그리고 하늘에 7대바램을 맹세한 바 있다:

 

일원화잠구토사(一願化蠶口吐絲), 월월희규고하기(月月喜奎胯下騎)

이원화면직성포(二願化棉織成布), 재작희규호당고(裁作喜奎護襠袴)

삼원화초제성지(三願化草製成紙), 희규갱의상염지(喜奎更衣常染指)

사원화수부중전(四願化水釜中煎), 희규욕시위온천(喜奎浴時爲溫泉)

오원희규신화필(五願喜奎身化筆), 신수마사휴입직(信手摩沙携入直)

육원희규신화아(六願喜奎身化我), 아욕여하무물가(我欲如何無不可)

칠원희규부모유특권(七願喜奎父母有特權), 수작여서장모련(收作女婿丈母憐)

 

이처럼 노골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것은 외설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역실보는 매일 유희규의 집에 한번씩 갔다고 한다. 비바람도 그를 막지 못했다고 하니, 그의 열정이 얼마나 넘쳐났는지 알 수 있다. 매번 문을 들어설 때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나의 친어머니여. 내가 또 왔습니다." 어느 정도로 미치광이같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을 정도였다. 유우생(劉禹生)의 <홍헌법기사시>에 이 일을 특별히 읊은 것이 있다: "나마가남유이가(騾馬街南劉二家), 백두시객희생애(白頭詩客戱生涯), 입문탈모광호모(入門脫帽狂呼母), 천녀언연일산화(天女嫣然一散花)"

 

유희규의 명성과 자색에 당시 군벌들과 고관대작들은 침을 흘렸고, 북양시기의 몇몇 총통인 원세개, 여원홍, 풍국장, 서세창, 조곤등이 모두 그녀에게 그런 뜻을 전달했다. 모두 하나같이 침을 질질 흘린 것이다. 원세개와 여원홍은 유희규를 불렀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한번은 원세개가 총통의 명의로 그녀에게 중남해로 와서 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유희규는 무대 뒤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한 심부름꾼이 그녀에게 달려와서 그녀에게 말한다: "누군가 부릅니다." 그녀는 심부름꾼을 따라서 아주 화려하게 장식된 방으로 모셔진다. 방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그에게 묻는다. "누가 나를 찾는단 말이냐? 무슨 일이냐?" 이때 원세개가 문 뒤에서 걸어나오며 유희규에게 말한다: "별 일 아니다. 그냥 너를 불러서 이런저런 얘기나 하려고 한 것이다." 유희규는 원세개가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게 말한다: "별 일이 아니라면 저는 돌아가서 화장을 해야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나중에 원세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여배우는 정말 다루기 어렵다."

 

조곤은 일찌감치 유희규를 첩으로 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량공세를 펼친다. 은화를 바구니에 담아서 라마가 유희규의 집으로 보낸다. 유씨의 부모는 조곤이 유희규를 첩으로 들이겠다는 요청에 대하여 일찌감치 고개를 끄덕인 바 있다.

 

다만 유희규는 죽음으로 항거한다. 1921년, 조곤의 환갑때, 북경의 유명배우들이 공연을 크게 한다. 조곤을 피하기 위하여 이미 2년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던 유희규는 자신을 쫓아다니면서 애원하고 호소하는 육면(陸綿, 당시 북양정부 육군부 차장)의 계속된 보증과 종용을 버티지 못하고, 마지못해서 공연에 참가한다. 누가 알았으랴 극이 끝나자마자 조곤은 사나운 모습을 드러낸다. 억지로 유희규를 남게 해서 수욕을 채우려 한다. 다행히 계속 유희규를 보호해주던 또 한 명의 '호화사자' 최승치가 급히 조곤이 정실부인을 찾아서 그녀에게 호소한다. 조곤의 정실부인이 질투심에 크게 화를 내자, 공처가로 유명한 조곤은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사이에 유희규는 호구를 벗어난다.

 

역사상 유명한 '변수(辮帥)" 장훈(張勛)은 거칠고 학식이 없으며 미색을 탐했다. 민국2년, 장훈은 북경의 강서회관에서 생일잔치를 한다. 경성의 유명한 배우들을 모조리 모은다. 공연기간동안, 장훈은 유희규에 침을 흘린다. 그리고 유희규에 유화책과 강경책을 써서 그녀를 첩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방해하는 것이 많아서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얼마후, 강소도독에 임명되어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고, 진회명기 소모자(小毛子)를 첩으로 들인다. 장강순열사로 승진하여 서주에 자리잡은 후, 다시 천진의 유명배우 왕극금(王克琴)을 첩으로 들인다. 이를 통하여 유희규를 얻지 못한 유감을 달랬다. 민국6년, 장훈은 '정무군'을 이끌고 입경하여, 강유위와 함께 부의를 황제로 복벽시킨다. 각계에서 그를 환영하는 당회희(堂會戱)를 열었는데, 거기서 다시 유희규의 뛰어난 풍모를 모게 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복벽의 추태때 선통제는 그를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힌다. 그는 유희규를 반드시 첩으로 취하겠다고 생각한다. 유희규는 머리를 굴려 장훈에게 변발을 자르면 생각해보겠다고 한다. 장훈은 변발을 목숨처럼 생각하였고, 당시 '북양의 호랑이' 단기서가 사람을 서주로 보내어 장훈에게 변발을 자르라고 했을 때 장훈은 대노한다: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변발은 절대 자를 수 없다." 생각지도 못하게 장훈은 이번에 유희규의 요구에 바로 시원스럽게 응락한다. 그리고 첩들을 쫓아내면서까지 유희규의 환심을 사려 한다. 다행히 단기서가 천진마창에서 부대들을 이끌고 맹세하며 '토역군'을 조직하여 북경으로 쳐들어와서, 장훈이 하야하게 한다. 장훈은 자신을 돌보기도 힘들어지다보니 이 일은 흐지부지 된다. 유희규는 장훈의 압박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유희규와 매란방은 20세기초 중국희곡무대의 금동옥녀였다. 당시 출판된 서적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유희규와 매란방은 모두 천선화인(天仙化人)의 눈을 가지고 있고, 신분이 고절(高絶)하고 풍자(豊姿)가 절륜(絶倫)하다. 마치 두 개의 빛나는 쌍둥이별과 같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1918년, <순천시보>에서 영계대왕(伶界大王)을 평가하여 뽑는 활동을 벌이는데, 매란방이 232,865표로 남자배우의 대왕에 올랐고, 유희규는 238,606표로 여자배우의 대왕에 오른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고 서로 좋아했으며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이 한 쌍은 결국 부부로 맺어지지는 못한다. 유희규는 왜 매란방에게 시집가려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그녀는 한 회고록에서 그녀의 진심을 얘기한다: "당시 나는 20여세였고, 화용월태였다. 나이가 어려서 예술에서 약간의 성취를 거두었다. 그들 군벌이나 공자들이 속속 나를 취하려고 생각했었다. 내 몸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예술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유희규는 중국경극예술의 발전을 인식했고, 매란방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개인의 애정을 희생시키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중국경극의 앞날을 망치게 하는 것은 큰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매란방과의 연을 끊는다. 그렇게 하여야 권력귀족들이 이를 기화로 매란방을 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가 계속하여 경극무대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유희규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최승치와 갈수록 가까워지고, 결국 두 사람은 동거한다. 민국13년, 손보기가 국무총리에 오르고, 또 다른 그녀를 사랑해온 육면이 육군총장에 오르자, 즉시 최승치의 직위를 면직시킨다.

 

최승치는 경성에 더 머무를 수 없어서, 야밤에 유희규를 데리고 천진조계로 들어가 정착한다. 유희규가 모아놓은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1년후, 유희규는 아들을 하나 낳는다. 얼마 후, 최승치는 급병이 발작하여 사망한다. 유언비어가 분분했다. 이는 모두 육면이 손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육면은 나중에 여러번 사람을 시켜 유희규에 대한 애정을 호소하나, 유희규는 칼같이 잘라서 거절한다: "육대인이 나를 첩으로 들일 생각을 하고 있는데, 꿈에도 생각지 말라고 해라. 첩은 말도 꺼내지 말라. 제대로 예를 갖추어 정실부인으로 모셔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전혀 생각이 없다. 우리집은 예전에 가난했지만, 그래도 청백한 집안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어떠한가? 기껏 아문의 입구에서 나팔불고 북이나 치던 집안이 아닌가. 그가 나를 못살게 굴면 죽기를 각오하고 그와 싸우겠다. 아직도 사람을 해친게 부족하단 말이냐. 뭘 또 더 생각하는가."

유희규는 이후 세상에 나오지 않고, 홀로 독수공방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던 무대를 떠난다.

 

항전기간, 일본침략자들은 유희규가 은거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큰 돈을 들여서 유희규로 하여금 일본에 가서 공연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유희규는 단연히 거절한다. 그녀는 전후로 하북의 이재민을 위한 무상공연을 여러번 했고, 받은 보수는 모조리 기부한다. 한번은 안휘에 수재가 났는데, 유희규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이 모은 돈에서 2천원 은양을 기부하기도 했다.

 

건국후, 주은래 총리는 전한(田漢)을 시켜 여러 곳에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게 한다. 만나자마자 주은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예술을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1950년, 문화부에서 거행된 연회에서 주은래는 그녀에게 술을 권하며 유희규를 "중국희곡계의 명주"라고 칭찬한다. 전국제1차문예공작자대표회의에서 주은래 총리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유선생은 부귀를 탐하지 않고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구사회에서 이렇게 강인할 수 있었다."

 

중국희곡학교가 성립된 후, 지방극과를 증설한다. 유희규는 중국희곡학교에서 강의를 맏는데, 이 학교 10대교수중 한 명이 된다. 1964년, 이 중국대지에 이름을 날리던 영계여왕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팔보산 혁명공묘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