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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여미안(余美顔): 3천명의 남자들과 바람을 피운 기녀자

by 중은우시 2017. 8. 9.

글: 여수위인(如水爲人)


그녀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용하고 호화롭게 살았는데, 남편이 장사를 하느라고 집에 있지 않다보니, 적막을 참지 못하고 밖에서 '잠자리 상대'를 구했다. 그녀는 3천명의 남자들과 잠을 잤고, 여관에서 벌거벗고 잠자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중화민국에서 최초로 "몸으로 글을 쓴" 선구자이다. 애인의 연애편지를 인쇄하여 책으로 내기도 했다. 제목은 <마등정서(摩登情書, 모던 연애편지라는 의미임)>이며 널리 광고까지 해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녀는 28세에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하지만, 결국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녀는 바로 광주(廣州)의 기녀자 여미안이다.


"유수처자(留守妻子)"는 아주 적막했다.


일부 민국의 서적에서, 우리는 자주 임휘인(林徽仁), 사빙심(謝氷心)등 재녀의 이야기를 본다. 그러나 광주기녀자 여미안에 대한 것은 많이 알지 못한다. 기실, 19세기 20년대, 여미안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인기가 중천에 뜬 해와 같던 인물이다. 그녀가 인기를 끄는 정도는 현재의 목자미, 유맹연보다 더하고, 심지어 누드사진을 찍은 "수수(獸獸)"보다도 더했다. 당시의 사회에서 여미안은 절대로 표신입이(標新立異)의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놀랍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미안은 1900년 광동성 태산시 획해(1950년대에 획해는 개평시로 되었다) 그녀의 부친은 여대경(余大經)으로 당시 전당포를 운영하는 상인이었다. 모친은 글을 읽은 여사였다. 당시의 사회에서도 여자가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일이 적었지만, 여미안은 문학세포가 있는 모친의 가르침으로 외국의 도서에 흥미를 가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미안은 비록 봉건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받은 교육은 서양문명이다. 그녀는 고소(高小)를 졸업했다. 당시에 여자가 4학년까지 다녔다는 것은 요즘으로 따지면 여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과 비슷하다. 고소를 졸업한 후, 여미안은 모친의 교육하에 국문과 영문을 자습한다. 여미안이 가장 좋아한 것은 외국의 일부 서적이다. 이들 서양문명은 그녀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특히 국외의 사랑이야기, 여성의 '성평등'에 대한 관념은 그녀가 신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부친 여대경은 원래 딸이 외국어를 배우는데 대하여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상인으로서 그는 가끔 서양인과 거래할 때, 원래 여미안을 공부시키고 외국어지식을 늘여주려고 했다. 그가 처음 생각한 것은 딸이 자신의 '통역'이 되어서 사업에서 순조롭게 서양인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여미안은 이들 책을 읽고난 후, 자주 기괴한 의견을 얘기하곤 했다. 여미안의 일기에는, 자주 "나는 이번 생에 극력 애정의 자유를 추구하겠다", "정욕이 나오는 것 은주전자가 터지는 것같고,거기에 서로 호감을 가져야 바로 사랑이다"같은 글을 썼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여자가 "성"을 얘기하는 것은 아주 대담한 것이다. 여미안의 모친도 딸이 하는 말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여미안의 부모는 여미안이 책을 읽을 권리를 막아버린다. 그들은 <사서오경>같은 것을 책상에 놓아두고, 딸이 무슨 이상한 짓을 해서 가족의 체면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랬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여미안은 그저 로맨스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이들 책은 그녀의 성의식을 일깨웠고, 그녀로 하여금 애정과 성에 대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현대에 살았더라면 여미안의 이런 논조는 그다지 큰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의 여자가 입을 열어 '성"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크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청춘기에 이른 여미안은 아주 미인으로 성장한다. 그녀는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유행하는 옷을 입기를 좋아했고, 친구를 만나서 길거리를 다니며 놀기를 즐겼다. 그녀는 사람들을 대하는데 거침이 없었고, 아주 건강한 여자였다. 친구들 사이에, 그녀의 일부 견해는 사람들에게 '신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의 친구가 많아지면서 당연히 일부 방탕한 사내들까지 여미안을 쫓아다니게 된다.


당시에 여미안의 부모는 장사를 하고 있어서 여미안은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모친은 여미안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딸을 구속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 해는 여미안이 외할머니집에 가 있었는데, 이웃의 아들 하나가 마침 외할머니 집에 있었다.


여미안은 젊고 예쁘며 아주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다. 이웃집의 아들은 여미안에게 한 눈에 반한다. 여미안은 상대방이 아주 사내답게 잘 생긴 것을 보고는 암중으로 추파를 던진다. 두 사람은 이렇게 평생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여대경의 반대에 부닥친다. 


여대경은 상인이다. 그는 딸을 좋은 집안과 결혼시켜서 자신의 사업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물며 옛말에 "여자가 크면 집안에 남겨두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는 여미안에게 결혼상대방을 소개시켜줄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미안은 개평의 담(譚)씨성의 공자와 정혼을 하게 된다.


여미안은 당시 18세였다. 정혼한 남녀쌍방은 서로 만나볼 필요가 없었고, 그저 혼약의 말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여미안은 이 혼인을 크게 반대한다. 혼인자유를 위하여, 그녀는 부모에게 혼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할머니집으로 가서 애인과 상의한다. 그 결과 애인은 이에 대해 비교적 망설이고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여미안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물어봤을 때, 상대방은 오히려 그녀에게 부모의 뜻을 거슬리지 말라고 말한다.


여미안은 그제서야 알았다. 이 "위대하고 치열했던" 연애는 기실 상대방의 헛소리였다고, 자신이 바랐던 사랑은 기실 한바탕의 게임이었다고.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바로 그 이웃집소년과 헤어진다.


당시의 여미안은 비록 구사회에 살았지만, 그녀는 애정에 대하여 시대를 앞선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여성혼인자주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들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그녀는 민국시대에 살았고, 그래서 그녀의 행위는 당시에 있어서는 사회도덕에 반하는 것이었다.


여미안은 순조롭게 담씨집안으로 시집간다. 담씨공자는 여미안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못나지는 않았다. 용모도 당당하고, 거기에 자주 장사를 하느라 바다 건너편의 미국등지를 다녀서 사상이나 의식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시대를 앞서갔다. 그래서 여미안은 이 남편에 대하여 점점 호감을 느끼게 된다.


하늘과 땅에 절하고, 동방에 들어간다. 생활은 마땅히 달콤해야할 것이다. 여미안은 당시에 자주 기괴한 견해를 말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첫경험'을 아주 중시했다. 이웃의 소년과도 성관계는 가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날 밤 그녀의 처녀혈은 담가공자를 놀라고 기쁘게 했다. 그후 여미안은 마음을 남편에게 쏟는다. 낮에는 시부모를 모시고, 저녁에는 사랑을 나누었다. 젊은 부부의 감정은 꿀에 기름을 바른 것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갈구했다.


여미안은 자신이 성과 사랑의 교착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후 남편과 함께 있을 때면, "원앙이 부럽지 신선은 부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날은 항상 짧다. 결혼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담가의 회사는 도산의 위험에 처한다. 남편이 집안의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에, 집안의 부담을 모두 그가 져야 했다.


담가의 사업은 비교적 방대했다. 그들은 일찌기, 해외의 업체들과 무역거래를 했고, 여미안의 장부는 집안의 대들보가 되었다. 부득이하게,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여미안은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것은 여미안에게 있어서 엄청난 타격이었다. 떨어져 살면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여미안은 남편을 쳐다보며 말한다.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오느냐고.


남편은 장담한다. 일단 사업이 안정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여미안은 남편의 팔을 잡아끌며 차마 헤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나도 너와 같이 가면 안되겠는가? 나는 영어도 할 줄 아니 너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부모를 생각해서, 여미안이 남아서 부모를 돌봐주고, 집안의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한다. 어쨌든 개평에도, 담가는 일부 사업이 있고, 누군가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여미안은 남편을 보낸 후, 며칠 동안 몸이 많이 말라간다. 남편이 간 유럽을 생각하면 길이 너무 멀고, 어느 해에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여미안은 갈수록 독수공방하면서 긴밤을 지샜다. 적막한 나날이 계속된 것이다.


그후, 여미안은 시부모와 시누이를 돌보며 살았다. 담가의 사업은 개평에서 첫째둘째가는 큰 집안이었다. 여미안은 게다가 예쁘게 생겼고, 성격도 활발했다. 그래서 일부 부잣집 부인들도 여미안을 찾아서 마작을 하면서 노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사회에서, 당연히 TV같은 류의 오락제품은 없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방문하면서 마작을 하는게 유일하게 시간보내는 것이었다, 


여미안은 처음에 마작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 있으면 그녀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시누이와 잘 맞지 않았다. 시누이는 여미안보다 1살이 적은데, 말재주가 뛰어났다. 그리고 자주 여미안에게 일을 시켰다.


여미안도 어려서부터 버릇없이 자랐다 .집안에서 그녀는 장상명주였는데, 어찌 시누이의 괴롭힘을 그냥 참겠는가. 한번은 시누이 옷의 단추가 떨어졌다. 그녀는 여미안에게 단추를 달아달라고 한다. 원래 담가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이런 일을 당연히 여미안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격이 비교적 급한 여미안이 바로 시어머니에게 얘기를 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딸 편을 든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여미안을 질책할 뿐아니라, 여미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집안이 싫으면 네가 나가라.


여미안은 집에서 며칠간 화를 참은 후, 흥미를 마작에 쏟는다. 처음에는 그녀가 스스로를 잘 자제할 수 있었다. 잃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작의 기교를 익혀가면 갈수록, 그녀는 점점 스스로 자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돈을 잃어갔다.


이렇게 되니, 여미안의 시부모는 그녀가 더 못마땅했다. 게다가 시누이가 중간에서 불을 지르니, 여미안은 집안에서 하루를 일년같이 지내게 된다. 하루는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다.


낮에는 그래도 견딜만 하지만, 저녁에 여미안이 혼자서 욀보게 침실에 들어오면, 침대에 누울 때마다 남편이 떠날 때의 따스한 몸이 생각난다. 그러면 그녀는 더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녀는 겨우 18살이다. 몸이 막 열렸고, 부부생활의 즐거움을 막 경험했다. 순식간에 사람은 떠나고 텅빈 방에는 혼자 남았다. 자신은 '생과부'로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적막한 날이 이처럼 길게 되자, 그녀는 수도 없이 온정균(溫庭筠)의 사 <경루자(更漏子)>를 일었다: 


옥로향(玉爐香), 홍촉루(紅燭淚), 편조화당추사(偏照畵堂秋思)

미취박(眉翠薄), 빈운잔(鬢雲殘), 야장금침한(夜長衾枕寒)

오동수(梧桐樹), 삼경우(三更雨), 부도리정정고(不道離情正苦)

일엽엽(一葉葉), 일성성(一聲聲), 공계적도명(空階滴到明)


그녀는 자신이 나날이 바로 이 "일엽엽, 일성성"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 하루하루 지나간다고 느낀다.


그녀는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남편은 거처가 일정치 않았다. 어떤 때는 미국에 있고, 어떤 때는 다시 동남아로 간다. 처음에는 회신도 했지만, 점점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버렸다고 여긴다. 무수한 밤동안 그녀는 느낀다. 자신은 이 결혼의 희생양이라고.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한다. 남편이 바깥에서 여자들과 놀아나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자신이 본 외국서적을 생각하며 갈수록 남편이 외도를 할 것이라고 의심한다. 외국의 여자들은 더욱 개방적이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이 자기만을 생각하며 있지는 않을 거라고 여긴다.


친정으로 돌아가서 그녀는 부모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부모가 나서서, 이 결혼을 물려달라고. 그녀는 봉건가족 속에서 생과부로 사는 것은 정말 원치 않았다.


부친은 계속 탄식만 했다. 모친은 그녀를 교육시킨다. 여자의 도리를 지키라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 여미안은 친정에서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 내가 이 가정에서 그들의 부속품, 희생양으로 살아야 하는가. 만일 그들의 아들이 일평생 돌아오지 않거나 외국에서 죽으면(당시는 이미 세계제1차대전이 발발했다) 가정은 바로 나의 무덤이 아닌가?


우울증에 빠져있던 여미안은 기회를 잡아서 담가를 떠난다. 그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그때 그녀는 겨우 18살이었다. 그녀는 그 새장을 싫어했다. 그녀는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이렇게 맗할 수도 있다. 여미안이 떠난 것은 노라가 떠난 것과 비교하더라도 더욱 놀라움과 대표성을 지닌다. 여미안이 떠난 것은 순전히 생리상의 적막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당연히 시부모와 시누이와의 갈등도 그녀가 떠나는 도화선이 되었지만, 더 많은 원인은 그녀가 신혼에 헤어져 사는 고통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성의식은 막 남편에 의해서 깨어났는데, 다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생활은 잔혹하다고 여긴다. 그녀는 사랑이 필요했다. 그녀와 남편간에는 갈등이 없었다. 심지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남편이 멀리 떠나서 돌아조지 않으니 그녀는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섹스를 찾아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표신입이하는 행위는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라고 하더라도 여자가 이렇게 하는 것은 대역무도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기실, 여자도 사람이다. 성의식이 없는 여자는 성에 대한 의식이 몽롱하다. 여자로서 일단 섹스를 하고 나면, 그녀는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신체의 호르몬균형을 맞춰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여자들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여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같다고 여긴다. 여미안은 "유수처자"의 역할을 거부했다. 비록 그녀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이 남편은 그저 그림자이고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성의 자유를 추구한 전위적인 여인


1918년 2월 27일, 집을 떠난 여미안은 광주로 간다. 운도 나쁘게 그녀는 현지의 순포(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 관료자제는 잘 생겼는데, 여미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한다. 여미안은 또 한 명의 경박한 관료자제라고 여겨서 처음에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관료자제는 사랑에 빠져서 여미안에게 돈을 보내고 꽃을 보낼 뿐아니라, 여미안과 결혼하겠다고 맹세도 한다.


왜 관청에서 여미안을 체포했을까? 여미안은 범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무슨 법규를 어긴 적도 없다. 원래 여미안이 광주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해군총장 정벽광(程璧光)이 암살당한다.


정벽광이 암살당한 원인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자료에서는 확정된 결론이 없다. 정벽광의 당시 신분으로 보면, 무게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사망은 현지 공안기관에서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는 사건이었고, 모든 의심스러운 인물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앞에서 시누이와 싸웠다. 여미안은 여자인데 어떻게 '의심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원인은 여미안이 입은 옷이나 화장이 너무 괴이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말로 한다면 '개성이 너무 강한 것'일 것이다. 현재의 어느 여자가 머리카락을 녹색으로 염색하거나, 아니면 박박 밀어버리고 대머리배우같이 분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당시 민국시기, 경찰은 이런 터무니없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미안은 아주 불행하게도 의심분자로 몰려서, 제4구서에 구속된다.    

  

기실 여자가 아무리 나대더라도 어찌 정벽광을 암살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암흑이고 부패했느냐는 것이다.


여미안이 구류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縣長)으로 있던이모부의 보증으로 다시 풀려난다. 그러나, 이번 구류는 여미안의 일생이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먼저, 담가는 여미안과의 혼인해제를 요구한다. 여미안이 떠날 때는 도망친 것이다. 이 일은 담씨집안에서 "대역무도'한 일로 여겨졌다. 혼약을 해제하는 것에 대하여 여미안은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녀의 친부친이 그녀를 습예소(習藝所)에 집어넣은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여미안의 부친은 담씨집안으로부터 말을 들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여대경의 앞에서, 여미안의 잘못을 이것저것 얘끼하고,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았다"는 죄명을 여미안에게 씌워버린다.


여미안이 들어가게 된 "습예소"는 당시이 일종 "신형감옥"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소년범수용소"같은 곳이다. 당시 정부는 풀어주는 범인을 위하여 일종이 수용소를 연다. 범인은 감옥에서 형기를 마친 후 다시 '습예소'로 들어간다. 그들이 사회로 나가서 자력갱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습예소에서는 감금되어 강제노동을 해야하는 것 말고도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주는 것이다. 개설된 노동기술은 요사(搖絲), 직포(織布), 직말(織襪), 목공(木工), 칠공(漆工), 석인(石印)"등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습예소'에서 배우는 기술은 살인강도, 도둑등 삼교구류의 기술들이다.


습예소는 개량된 감옥이지만 그 안에는 일종이 형구인 교형(絞刑)이 있다. 형을 받을 때, 범인의 사지는 묶이고, 가죽끈을 꼬아서 목을 조른다. 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뒤에서 가죽끈을 꼰다. 범인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지만, 즉시 죽지는 않는다. 자리에 묶어두고 봉조(封條)를 붙인다. 그리고 다음날 봐서 범인이 죽지 않았으면 다시 몇번 더 조인다. 삼일째가 되어셔야 범인은 온갖 고생을 겪은 후 죽는다. 이렇게 범인을 징벌하는 형구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습예소는 당시의 정부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도적이지 않았다.


여미안은 습예소 안에서, 인쟁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녀가 이후에 "이경반도(離經叛道)"하는 출발점이 된다.


여미안의 부친이 딸을 습예소에 넣은 것은 한철불성강(恨鐵不成鋼)의 안타까움과 딸에 대한 극도의 실망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금 보자면 여미안의 부친이 한 것은 분명히 지나쳤다. 그러나 당시로 말하자면, 여미안의 행위는 확실히 어른들이 보기에 황당한 짓이었다. 몰래 시댁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의심분자로 몰려서 감옥에 들어가다니 이는 여대경으로 하여금 이 딸은 방법이 없다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부친은 혼자서 마음대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의 방법은 전혀 여미안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후 여미안도 이 가족과 철저히 바이바이하게 된다.


여미안은 습예소에서 1년을 보낸다. 이 1년동안 그녀가 무슨 일을 겼었는지, 심리상 무슨 변화를 겪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출옥후 여미안은 조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에 대하여 미친 듯이 '보복'하게 된다.


여미안은 어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녀는 방탕했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그녀는 거의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여자같았다.


만일 처음에 그녀가 가족간의 정을 약간이라도 생각했다면, 조금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친이 '습예소'에 집어넣은 후로 그녀는 가정에 대하여 철저히 정을 끊는다. 그녀는 세태의 염량을 알았고, 남편의 집안에서 '이혼당한' 후, 그녀는 더더욱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런 속박도 없고,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청(舞廳), 도박장, 술집을 드나든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생화를 꽂는다. 현재의 '홍화교주(紅花敎主)처럼. 그녀는 원래 예뻤고, 성격도 발랄하고 시원시원해서, 그녀는 여러 공자들과 친해진다.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돈을 쓰게 한다. 그녀는 그들과 같이 춤을 춰주고 약간의 돈을 받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기녀자(奇女子)"로 취급했다. 여미안은 기원(妓院)에서 싼값에 몸을 파는 것은 멸시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하룻밤을 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그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다. 


당시, 기녀자 여미안은 당시 소보(小報)에 자주 등장했고, 헤드라인 뉴스는 많은 경우 그녀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가족도 없고, 가족의 정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성욕도 식욕이나 마찬가지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또한 자신은 이미 자유의 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어느 해는 여미안이 한 홍콩상인과 식사하고 술을 마신다. 그는 하(何)씨성의 상인이다. 그 상인은 여미안의 집안내력을 묻게 된다. 그러자 여미안은 슬품이 솟구쳐 올랐다. 부친의 박정함,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그리고 전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얘기하면서 여미안은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하상인은 여미안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는 사십여세의 남자로 안정적인 사업도 있고, 가정도 있었다. 여미안은 당시 겨우 스무살이었고, 꽃처럼 아름다울 때였다. 비록 만난 남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결혼이나 시집가는 걸 생각하면, 어느 남자도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상인은 아름다운 미인을 보고 즉시 그녀를 데리고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정중하게 여미안에게 자신에게 시집올 것을 요청한다. 여미안은 잠시 고려하다가 결국 동의한다.


여미안은 왜 이 혼인에 동의했을까? 여미안은 노는데 지쳤다. 그녀는 많은 관료자제, 부잣집아들들을 만났고, 자신과 관계는 좋았지만,아무도 자신과 결혼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자신의 최근의 명성을 보면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 하씨성의 상인은 비록 나이는 약간 많았지만, 차도 있고 집도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 몇년능 떠돌아다니다보니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미안은 하상인의 프로포즈에 동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홍콩상인의 둘째부인이 된다. 홍콩에서 사는 동안, 풍류적이고 예쁜 여미안은 상류사회에서 바로 인정을 받는다. 홍콩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그녀에게 자신을 시전할 또 하나의 무대였다. 극장을 돌아다니고, 도박장을 갈 기회도 많았다. 하상인이 그녀에게 준 돈은 금방 다 써버린다.


하상인은 처음에 여미안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미안의 낭비벽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다. 한번은 여미안이 다시 도박에서 돈을 잃었다. 하상인은 큰 소리로 그녀를 욕한다: "내가 기녀와 하룻밤을 자면 수백원이면 되는데, 거는 한꺼번에 수만원을 잃는구나. 내가 너를 취한건 상문성(喪門星)을 취한 것과 같다!"


얼마후, 하상인은 여미안에 싫증을 느낀다. 그는 신문에 이렇게 싣는다. 여미안은 "방탕불기(放蕩不羈), 휘곽무도(揮霍無度)"하여 여미안과의 혼인을 해제한다고. 


그리하여, 두번의 혼인을 하고, 두번의 '이혼을 당한' 여미안은 다시 외로운 몸이 된다. 그러나 그후 그녀는 더더욱 세속의 편견에 신경쓰지 않고, 자유연애, 자유섹스의 모범이 된다. 


여미안은 두 번의 혼인을 겪은 후, 계속 사회에서 방탕하게 산다. 그녀는 광주에서 그녀와 같이 이경반도한 3명의 여자와 함께 친구가 된다. 4명은 자주 같이 무청과 술집을 드나든다. 당시 광주에서 그녀들에게 붙여준 별명은 "사대금강(四大金剛)"이었다. 여미안은 사대금강의 우두머리이다. 그들 금강중 한 명은 양내매(楊耐梅)라는 배우였는데, 중국 최초의 영화제작자이다. 여미안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후, 양내매는 그녀의 신세를 생각하고, 여미안의 경력을 배경으로 하여, 무성영화 <기녀자(奇女子)>를 찍어서 일세를 풍미한다.


여미안의 괴이한 행동은 금방 각 소보에서 씹는 꺼리가 된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의 성학박사(性學博士) 장경생(張竟生)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장경생은 당시에 <성사(性史)>라는 책을 써서, 서방의 성학관념을 널리 선전했다. 그는 "제3의 물"을 제창했는데, 즉 여성이 오르가즘을 느낄 때, 바르톨린선에서 체액이 나온다고 했다. 그의 견해는 당시 각종 전문가 학자의 집중 공격을 받는다. (이런 견해는 1958년 독일의 여자과학자인 그라펜베르크에 의하여 확인되고, 'G스팟'이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의 도학자들은 장경생을 '틸고박사(脫袴博士)', '매춘박사(賣春博士)'라고 놀렸다. 광동성장 진형명(陳炯明)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욕하기도 했다. 


여미안은 장경생과 서로 몰랐다. 당시의 소보에서는여미안과 장경생은 모두 '성교고수'이니 '천리를 달려가서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놀리기도 했다.


한 해는 여미안이 우연히 말타는 것을 배운다. 그녀는 졸지에 또 다른 생활을 재미를 느낀 것이다. 말 위에서 달리는 마음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즉시 이 스포츠활동에 탐닉한다.


여미안은 붉은 색 옷을 즐겨입었기 때문에, 말을 타면, 하얀 다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현지정부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여미안이 '옷을 벗고'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제한한다. 그러자 여미안은 호쾌하게 한번 웃고는 수천원 대양을 집어던지고 말을 몰아 떠나버린다.


그후 여미안은 말타는 것으로 해서 누계 수만원의 벌금을 받는다. 비록 그러했지만, 그녀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 일은 호사가에 의하여 당시의 소보에 실린다: "기녀자가 동쪽 교외에서 말을 타다"


여미안은 말타는 것을 좋아하는 외에, 두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옷을 벗고 잠자는 것이었다. 매일 저녁 잠을 잘 때 그녀는 벌거벗고 잤다. 그녀는 벌거벗고 자는 것이 더욱 시원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번 그녀의 이런 특수한 습관때문에 현지의 여관에서 그녀를 받지 않으려 한다. 당시 여미안은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고 재산도 없었다. 그러나 돈은 많이 가지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위하여 돈을 쓰면서 그녀와 하룻밤을 자고 싶어 했다.


이 기간동안, 여미안은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녀는 미주, 동남아 등지를 여행한다. 그녀는 젊고 예뻤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먹는데 문제는 없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에 무릎을 꿇는다. 그녀는 그래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과 밤을 지샜다.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매춘하자고 하면, 그녀는 큰 돈을 꺼내들고 길거리에 뿌리면서 말한다: "모든 남자가 나와 하룻밤을 잘 수있는 건 아니다!"


예의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한번은 여미안이 가진 돈을 모두 도박에 잃어서 한푼도 없게 된다. 그녀는 일찌기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부유한 상인을 생각해서, 다음 날의 식사비를 얻기 위하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부유한 상인은 이전에 여미안에게 거절을 당한 바 있기 때문에, 이번에 여미안이 불러주자 아주 기뻤다. 여미안의 조건은 상대방에게 3천원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 부유한 상인은 현지에서 첫손 꼽히는 부자였다. 여미안의 생각에 그가 3천원을 내놓는 것은 별 일도 아니었다.


부유한 상인은 호텔에 도착한 후에 교활하게도 여미안에게 돈을 깍으려 한다. 자신이 현재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절반만 가져왔다고, 나머지 돈은 다음에 주겠다고.


여미안은 원래 이 부유한 상인에게 호감이 없었는데, 그가 다시 하룻밤 지내는 돈까지 깍으려는 것을 보고는 차가운 웃음을 몇번 날리고, 창문을 열어, 부유한 상인이 가져온 1천5백원을 창밖에 뿌려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너같은 자는 구두 하나를 사는데도 수만원을 쓰면서, 어찌 나에게 3천원 주는데 이렇게 째째하냐."


아시아호텔은 시내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여미안이 거주하던 곳은 7층이었다. 그녀가 던져버린 1천5백원은 지나가던 행인이 주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둘러싸고 있으면서 다시 한번 돈이 던져지기를 기다렸다.


부유한 상인은 놀라서 멍해진다. 그는 생각도 못했다. 여미안이 이렇게 호쾌한 성격일 줄은. 기분대로 사랑하고 기분대로 미워하는 그런 여자일 줄은.


이번 '베란다에서 돈뿌리기'사건은 여미안이 자살한 후, 여러번 화면에 등장한다. 당시의 광주 사람이면 삼척동자도 다 알았다.


사랑 혹은 미움, 홍진(紅塵)이 여기에 있다.


이십오세 되던 해, 여미안은 남해현장의 아들을 알게 된다. 이 '관료자제'는 잘 생겼고, 처음 여미안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여미안은 그가 또 한명의 경박한 남자라고 여겨서 처음에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미안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여미안에게 돈을 보내고 꽃을 보낼 뿐아니라,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맹세까지 한다.


여미안도 이 관료자제에게 마음이 움직인다. 그녀는 몇년간 떠돌아다니다보니, 피곤해졌다. 이 관료자제는 잘 생겼을 뿐아니라, 시원시원하며,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남자이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고, 관료자제는 여미안을 위하여 "시골별장"을 하나 빌린다. 두 사람은 거기에서 '시험결혼생활'을 보내게 된다.


한번은 여미안이 정말 이 남자에게 시집가고자 한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관료자제를 사랑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혼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관료자제의 친척형이 동생의 연애상대가 바로 '그 유명한' 여미안이라는 것을 알고는, 급히 동생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에게 여미안이라는 여자와는 상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여미안에게도 편지를 쓴다. 여미안이 자신의 동생을 떠나달라고, 동생의 앞날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시험결혼생활중이던 두 젊은이는 이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형은 '관료자제'의 부친에게 이 일을 알린다. 이 현장대인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아들을 감금한다. 그리고 여미안에게 그가 그녀를 위하여 쓴 2만원이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여미안은 이때 이미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부인이 아들을 감금하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이고, 조만간 풀어줄 것이라고. 그녀는 현장부인의 말도 믿는다. 2만원을 돌려주면 둘의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여미안은 상해, 천진과 북경을 다니며 이전의 인맥을 활용하여, 금방 2만원을 모은다. 그녀가 현장부인에게 돈을 건네자, 현장은 "토창(土娼)"이라는 죄명으로 그녀를 입건한다. 다행히 현장 부인이 진심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아들을 쫓아다니지 않으면 범죄로 처벌까지는 하지 않겠다고 사정하여 풀려난다.


여미안은 이번 타격을 받고 낙담한다. 그녀가 돈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자가 몸을 팔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원앙의 꿈은 끝났고, 여미안은 멀리 타향으로 가서 모든 것을 잊고자 한다.


그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그런데 의외로 거기사 장사를 하는 전남편을 만난다. 십년간 보지 못했는데, 신혼때의 광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기실 그녀는 아직 이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적막을 참지 못하여, 마음대로 떠났지만. 이때 그녀는 전남편이 다시 자신과 잘 지낼 수 있고 다시 합쳐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남편은 그녀를 거절한다. 처가 방탕하게 생활했다는 것을 그도 일찌감치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묵묵히 헤어진다. 여미안은 더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생각도 못했다. 자신이 이제 모두에게 버림받을 불은.


광주로 돌아온 후, 여미안은 방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보낸다. 그녀는 남자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모든 감정은 말라버린다. 누구든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면 그녀는 그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생활을 가지고 놀았고, 생활도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그녀의 신체는 여러 남자들 사이를 전전한다. 남자들과 밤을 보내면서 섹스욕구를 해소한다. 짧은 4년동안 전해지는 바로는 그녀가 3천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음탕하다고 욕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어넘겼다. 누군가는 그녀를 기녀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녀는 돈을 물쓰듯이 쓰면서, 군벌, 부상, 관료자제, 부잣집아들과 지냈다.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평생을 맡길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고.


비록 유희이고 오락이지만, 어쨌은 약간은 남는게 있다. 그녀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모든 남자들과의 사정을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연애편지는 거기에 붙여둔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낭만정서(浪漫情書)>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 안에는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 준 성경험을 적고 그 감정을 적었으며, 어떤 상황하에서 발생했는지를 적었다. 이 일기는 목자미의 <유정서(遺情書)>와 비교할 수 있다. 중화민국에서 최초로 '몸으로 글을 쓴" 선구자이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를 써냈다. 이 책은 지금도 민국징장판(民國珍藏版)이다. 나는 인연이 있어 이 책을 보았다. 표지에는 고독한 여인이 서 있다. 어찌할 지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아주 고독해 보인다.


여미안이 현재 살았다면 필자의 생각으로 그녀의 블로그는 분명 '목자미', '유맹연', '부용저저'를 넘어 인터넷의 인기녀가 되었을 것이다. 


1927년, 여미안은 불교에 귀의한다. 그녀는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았다.불교에서 해탈하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다시 감금에서 풀려난 관료자제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다시 원앙의 꿈을 계속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알았다.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이제 온갖 일들을 겪고나니 그녀의 마음은 일찌감치 당초 서로 사랑하던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참선에 집중하면서 관료자제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러나, 관료자제는 계속 찾아와서 애절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수시로 조용한 사원을 시끄럽게 만든다.


사원의 나이든 비구니는 그녀의 속세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불문정토가 여미안의 연인으로 인하여 훼방받는 것데 화가 나서, 그녀를 절에서 쫓아버린다.


1928년 4월,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여객선에서, 한 젊고 예쁜 여자가 갑자기 통곡하다가 갑자기 크게 웃곤 한다. 그리고는 망망한 바다에 몸을 던진다. 파도는 그녀의 몸을 집어삼킨다. 이때의 그녀는 해탈하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여자가 바로 여미안이다.


그녀가 죽었을 때 나이가 겨우 28세였다. 죽기 전에 그녀는 말했다: "내세에는 아마도 순결한 여자가 되어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암흑사회에서 구차하게 사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은 그녀가 음탕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가 풍류적이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녀가 자잘한 데 구속받지 않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가 인생을 가지고 놀았다고 했다. 기실 그녀는 그저 행복과 성적만족을 추구한 여자였을 뿐이다.


현지의 소보에는 여미안이 광주에서 활동할 때, "많은 군대의 장군들을 알았고, 그녀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