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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진벽군(陳璧君): 민국제일미남을 굴복시킨 기여자(奇女子)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녕녕(寧寧) 

 

왕정위(汪精衛)는 혁명지사이고 대재자이다. 국민당 제일미남이다. 일찌기 빛나고 현란하며 무수한 미인들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그와 평생을 함께한 여인은 용모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진벽군이었다.

 

1891년, 진벽군은 남양 말레이시아의 화교 거부 집안에서 태어난다.1908냔 3월, 말레이시아 페낭(Penang)에 청수한 용모에 눈빛이 맑고, 재능이 넘치는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진벽군은 그를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가 여길 정도였다. 강연대에서 그는 기도가 비범하고, 격앙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그녀는 강연대의 아래에서 눈알도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을 발개지고 귀도 붉어졌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 것이다.

 

무슨 마에 씌인 것처러 그녀는 소란정에서, 신가신무대로 그리고 평장회관으로 모두 갔다. 그녀는 가장 충실한 그의 팬이었다. 그녀는 두번째 보고는 마음이 완전히 기운다. 그녀는 가슴이 뛰고 도저히 안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 환상을 심어준 남자는 바로 왕정위였다.

 

아마도 하늘의 안배인지, 진벽군은 그와 만나고, 그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심장은 오로지 그를 위하여 뛰었고, 그녀의 정은 오로지 그를 위하여 있었다. 그녀는 세번째 만나고 평생을 그에게 의탁한다.

 

왕정위를 따라서 16세의 진벽군은 동맹회에 가입한다. 혁명이상이나 민주미래가 아닌 오로지 왕정위를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소녀의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마음을 드러냈고,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원천리 일본까지 쫓아간다. 왕정위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하여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았다. 왕정위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녀는 암살단에도 가입한다...

 

한 여인이 남자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는 했다. 그러나 왕정위는 이렇게 맹세한다: "혁명이 성공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 그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수록, 그녀의 정은 더욱 깊어졌고, 사랑은 더욱 절실해졌다.

 

1909년 12월, 왕정위는 호쾌하게, "자신을 재로 만들어 혁명의 밥을 짓겠다"고 맹세하고 북경으로 간다. 그녀도 그를 따라 북상한다.

 

당시,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영국국민의 여권이 있으니, 죽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과 사랑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보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영국여권을 꺼내서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다.

 

진벽군의 앞날을 행각해서, 암살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왕정위는 그녀를 찾아와서 엄숙하게 말한다. "너는 겨우 18살이다. 모든 것은 내가 마음 속에 기억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나는 삶에 대하여 더 바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너도 다시 생각을 해봐라."

 

왕정위가 재풍과 동귀어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 날이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을 들어 왕정위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나는 암살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온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아남느다면, 나는 당신과 일생을 함께 하겠다."

 

그는 마음이 끓어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처음부터 이 여자아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었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총명하며, 따뜻한 마음을 지닌 첫사람 방군영(方君瑛)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년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온갖 곳을 다니고,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썼다. 이런 치열한 애정과 무한한 사랑에 어찌 감동받지 않겠는가.

 

이때, 그는 깊이 감동받았다. 그녀를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고,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대고, 뼘으로, 그녀의 입술로...

 

왕정위가 체포된 후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주심판관인 선기(善耆)는 그가 쓴 진술서를 자세히 읽어본 후 그의 재주를 아끼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담장밖에 있는 진벽군은 왕정위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써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서신 하나를 계란안에 넣어서 보낸다: "매지애형(妹之愛兄), 천황지로(天荒地老), 차정불투(此情不渝)"

 

옥중에서, 이 따스한 쪽지를 받고 아마도 그는 따스한 사랑을 느꼈을 것이고, 그녀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으로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무엇이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혈서를 한 통 쓴다: "낙영공정야뢰미(落葉空庭夜籟微), 고인몽리양의의(故人夢裏兩依依), 풍소역수금유작(風瀟易水今猶昨), 혼도풍림시야비(魂度楓林是也非). 입지상봉수불괴(入地相逢雖不愧), 벽산무로욕하귀(擘山無路欲何歸); 기종공주신정루(記從共酒新亭淚), 인사제흔우만의(忍使啼痕又滿衣)"

 

진벽군은 이를 받고 삼일밤낮을 울었다.

 

1912년, 신해혁명이 성공한 후, 이 견강하고 용감하며 견인불굴의 여인은 마침내 깊이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는 생명의 가장 어려웠을 때 그녀가 함께 해서 지낼 수있었다. 그가 병이 든 후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을 알고, 그녀는 방군영과 같은 시단복을 입고 그를 간호했다...

 

항전승리후, 진벽군은 무기징역의 형을 받는다. 해방후, 송경령, 하향응등이 추천하여 그녀가 회개서를 쓰기만 하면 출옥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도 감옥에 남겠다고 하고, 절대로 사랑하는 남자가 잘못했다는 글은 쓰지 않는다. 1959년, 68세의 진벽군은 옥중에서 사망한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망을 품고 갔다. 자신보다 15년먼저 떠난 남자가 이제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릴 것이고,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