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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사마부(司馬孚)는 왜 사마가족이 조위(曹魏)를 대체할 때 통곡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6. 8. 26.

글: Q선삼Q(Q先森Q)


266년, 사마염(司馬炎)은 위원제(魏元帝) 조환(曹奐)을 핍빅하여 선양(禪讓)받아 국호를 진(晋)으로 하여, 위진의 왕조교체가 일어난다. 사마부는 사마염의 작은아버지(叔祖)인데, 조환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한다: "신이 죽는 그날까지, 순수한 대위의 신하일 것입니다." 이 사마가족의 어른은 이미 사마씨 권력자를 곤란하게 만든게 첫번째도 아니다.


일찌기 사마사(司馬師)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 조위의 황제 조방(曹芳)은 페위되어 이궁으로 간다. 사마부는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대성통곡한다. 조위의 황제 조모(曹髦)가 사마소의 수하에게 살해되었을 때, 조정의 백관들은 아무도 감히 가지 못했는데, 사마부는 "황제의 시신을 다리에 눕히고 애끓게 곡을 했다." 사마부는 왜 이렇게 계속하여 가족의 체면이 상하는 일을 하고, 가족(황족)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거동을 했을까?


사마부는 사마의(司馬懿)의 동생으로 180년에 태어난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92세의 고령까지 살다가 272년에 사망한다. 일생은 한말, 조위와 진초의 3개의 역사시기를 거친다. 사마부는 사마씨가 지방유학가족에서 조위의 권신가족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신왕조의 지도자가 되는 완전한 과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사대부의 대표적 행위규범이 사생취의(捨生取義), 지려명절(砥礪名節)에서 은일담현(隱逸談玄), 방종불기(放縱不羈)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서한과 동한은 모두 이백년가량 존속했다. 다만 동한은 중기이후에 장기간 쇠락해서, 환관과 외척이 번갈아가며 조정을 장악하고, 정치는 암흑부패시기로 접어든다. 사대부의 무리는 한편으로 청의(淸議)를 내걸고, 양청격탁(揚淸激濁)하고, 사정지도(邪正之道)를 밝히며, 다른 한편으로 힘을 내서 환관과 외척을 몰아내고 위기국면에서 구해내려고 한다. 동한정권은 그리하여 비로소 겨우 버텨나갔고, 근 백년동안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틈은 생겨도 붕괴되지는 않았다.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司馬防, 149-219)시기에 사마가족은 이미 유학가족으로 취급되었다. 사마방은 사람됨이 방직공정(方直公正)하여 거의 완고하여 8명의 아들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게 요구했다. "여러 아들이 모두 성인이 되었지만, 들어오라고 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고, 앉으라고 하지 않으면 앉지 않고, 묻지않은 일은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사마부가 태어났을 때는 제2차 당고지화(黨固之禍)의 후기였다. 168년, 태부(太傅) 진번(陳藩)과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는 환관을 주살하려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환관들이 먼저 손을 써서 두 사람은 모두 피살된다. 환관집단은 이 기회를 틈타 당인을 모함하여, 황제의 명의로 대거 사건을 만들어 사인(士人)을 체포하여 당고지화가 다시 일어난다. 7,8백명의 당인들이 살해되거나 유배가거나 금고된다. 당인의 부자형제, 문생고리(門生故吏) 심지어 오복(五服) 이내의 친족은 모조리 관직에서 파면되고, 평생 금고된다. 그중 대표자는 이응(李膺), 두밀(杜密)과 범방(范滂)등이다.


이응은 당인 "팔준(八俊)'의 우두머리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정직하며 아부할 줄 모른다. 그리고 "천하의 명교시비를 자신의 임무라고 여긴다" 사례교위를 맡고 있는 기간동안, 이응은 환관의 자제와 일당을 엄히 처벌했다. 그래서 환관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 미워했다. 제1차당고지화때, 이응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나중에 다행히 관직에서 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대부는 모두 그의 도덕이 고상하다고 여기고 천하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응은 천하의 사인(士人)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 제2차당고지화가 발발하면서, 그는 원래 체포를 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분연히 감옥으로 찾아가서 자수를 한다. 그 후에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다. 여남명사 범방도 적극적으로 감옥으로 들어가고 마찬가지로 죽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내가 죽는 날, 나를 수양산의 측면에 묻어주기 바란다. 위로는 황천의 뜻을 어기지 않았고, 아래로는 백이숙제에 부끄럽지 않다."


두밀은 이응과 같은 영천 출신이다. 이응과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역시 "팔준"에 나란히 들어갔다. 제1차당고지화때 이응과 동시에 감옥에 들어가고 마찬가지로 관직에서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제2차당고지하에 두밀은 다시 이응과 같이 감옥에 들어갔고,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아 분연히 자살한다. 동한의 사대부 무리들의 사생취의의 고고한 풍모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한영제 연간에,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사람은 겨우 4만명 가량이었다. 낙양의 3만 태학생을 제외하면 1만명 정도가 더 있엇다. 두번의 당고지화로 직접 해를입은 사람이 1천여명이고, 게다가 연루된 5족친족과 문생고리를 포함하면, 동한의 사인 엘리트는 거의 모두 일망타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타격을 거쳐, 적지 않은 사인들은 한왕조에 대하여 실망한다. 심지어 어떤 당인은 한영제를 폐위시키려고까지 한다. 다만 다수의 사인은 여전히 비교적 깊이 한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한황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는 또한 왜 동탁(董卓)의 난때, 많은 사인과 관료는 적극적으로 동탁을 살해하는데 참여한다. 그리고 지방관리와 사대부도 무인군벌과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한다.


비록 난세를 만났지만, 가전유학의 훈도하에, 사마방의 장남인 사마랑(司馬朗)은 12살때 경학시험을 통과하여 '동자랑(童子郞)'이 된다; 사마의도 '박학다식하고 유학을 신봉한다. 사마부는 더욱 안회(顔回)가 부활한 듯했다. '단사표음, 피열불권(簞食瓢飮, 披閱不倦)'한다. 이 세 사람은 소년시대에 유교문화에 입문하여 사대부로서 군신간의 대의를 지키고, 인의를 베푸는 풍모가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동탁의 난 이후, 동한은 군벌할거의 혼전시대로 접어든다. 한헌제는 조조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한황실은 이름만 남는다. 사대부집단은 동한황권에 대한 태도가 현저히 변화한다.


196년, 조조는 한헌제를 허현으로 영접한다. 처음에 조조는 한황실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천하의 명사를 끌어모았다. 예를 들어 천하에 이름을 떨친 공융과 명문거족인 홍농양씨의 양표도 모두 건안연간(196-220)에 조정에서 관리를 지낸다. 원술, 원소등 군벌이 반역의 거동을 보이거나 야심을 보일 때, 모두 수하 명사, 막료의 견책과 반대에 부닥친다.


조조는 북방을 통일하여 실력이 크게 늘어난 후, 더 이상 신하로 남아있지 않으려는 마음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대부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공융은 일찌감치 판단했다. 조조는 '결국 한황실을 빼앗을 것이다.' 그는 글을 올려 '봉건제후'에 반대한다. 실제로는 조조를 반대한 것이다. 공융은 사대부계층내에서 선명하게 한황실을 보호하고, 조조의 찬역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다. 208년 결국 조조에게 피살된다.


순욱은 또 다른 한황실의 황권을 지지하는 사인의 대표이다. 순욱은 조조의 힘을 빌어 한황실을 부흥시키려 했다. 비록 그는 조조의 수석막료이지만, 관직은 동한조정의 상서령이다. 212년, 동소는 조조에게 국공의 작위를 주고, 구석(九錫)을 추가할 것을 건의한다. 조조의 찬탈기도가 공개화된 것이다. 한황실의 충신과 조조의 모사 사이에서 순욱은 확실하게 전자를 선택하고, 명확히 반대한다. 같은 해 순욱은 핍박을 받아 음독자살한다. 이는 어느 정도 사대부의 한황실에 대한 태도의 전환점이 된다.


동한조정은 완전히 조조에게 장악된다. 공로가 가장 큰 순욱까지 핍박받아 죽는다. 중원의 사대부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게 된다. 순욱의 사후 겨우 1년만에 명사인 동시에 조조의 모사인 순유, 진군, 왕랑, 화흠, 종요, 사마의등등은 속속 글을 올린다. 그중 순유, 진군, 종요는 모두 시례전가의 영천 유학명문거족출신이다. 이들 명사들은 원래 사인집단의 양심이자 도덕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가의 군신대의의 이념을 저버리고, 강력한 권력의 협박하에 명철보신하고 이익과 현실을 쫓게 되었다. 당고지화때 사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도의를 지키던 기개는 일찌감치 없어져 버렸다.


사마랑은 196년 조조를 위하여 일한다. 사마의는 두번이나 조조의 부름을 거절한다. 그는 그때 여전히 유가의 충의관념의 영향을 받았고, 한황실을 동정했다. 당연히 환관의 후손인 조조에게 무릎꿇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조조가 그를 하옥시키겠다고 위협하여, 사마의는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맡는다. 그러나, 조조는 사마의를 극히 경계했고, 심지어 그를 죽일 생각까지 한다. 다행히 사마의는 일찌감치 조비와 가까워져 있었고, 조비가 극력 비호해준다. 사마의도 열심히 일을 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무서운 경력에 조조의 수하막료모사들의 생사부침을 목격하면서, 사마의의 성격과 정치이념은 모두 중대하게 변화한다.


사마부는 건안연간에 먼저 조식의 막부에서 일을 한다. 나중에는 태자가 되는 조비를 보좌한다. 조조가 병사하고, 조위의 권력이 진공상태가 되었을 때, 사마부는 조비에게 적극적으로 장례를 준비하고, 조비가 승계하도록 옹호했다. 사마부가 보기에, 그의 군부의 대절은 조위황실에 있다. 


조조가 위공(魏公), 위왕(魏王, 216년)이 된 후, 왕조교체는 이미 시간문제로 된다. 앞뒤로 그를 무너뜨리려는 폭동이 두번 일어난다. 한번은 동한의 국도 허현에서 한번은 위왕의 도성인 업성에서... 이 두번의 폭란에 참여하고 관련된 사람은 서한, 동한의 명신의 후예도 있고, 한헌제 조정의 관리도 있고, 조조의 대신의 후손, 현임막료, 심지어 조조의 고향인 초패의 청년명사도 있다. 아마도 두번의 반란은 조조의 찬탈계획을 심각하게 교란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주문왕'으로 남는다.


한왕조가 끝나려고 할 때, 두 번의 폭동은 동한 사대부의 마지막 반항이자 몸부림이었다. 또한 사인의 사생취의정신의 회광반조이다.


217년, 사마랑은 역병으로 사망한다. 한위의 왕조교체후, 사마의의 관직은 계속 올라간다. 전공이 혁혁하고, 정치적인 명망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249년, 사마의는 고평릉정변을 일으켜, 조씨종족 조상을 쫓아내고 군정대권을 독점한다. 사마의는 겉으로 유가의 '예법'과 '명교'를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냉혹하고 실용적인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쓰고 무력과 권모술수를 숭상하며, 승리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마의와 그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는 모두 냉혹한 살륙수단을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상대하고 심지어 약간만 적대적인 혐의가 있거나 개인적인 은원이 있는 자를 상대한다. 많은 명사들은 멸족당했다. 예를 들어, 조상의 일파인 하안, 하후현, 이풍, 등양, 필궤, 정밀, 이승, 환범등이 삼족을 멸족당한다. 혜강, 여안등 명사도 사마시의 손에 죽는다. 사마씨의 사대부집단에 대한 맹렬한 살륙은 한말환관집단과 조조가 모두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유가가 가장 중시하는 군신대의(君臣大義)에 대하여 사마씨는 헌신짝처럼 버렸고, 마음대로 폐위시키고 세웠으며, 조위로부터 황위를 찬탈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당고지화, 동탁의 난 그리고 군벌혼전을 겪은 사대부는 걸핏하면 비명에 죽어갔다. 건안말기에 이르면 한황실은 허울뿐이었다. 명문거족의 명사들도 모두 명철보신하고 대세를 쫓았다. 사마씨가 권력을 장악한 후, 피바람이 몰아치는 정치환경하에서, 사인과 조정관료들은 하루종일 몸을 떨었다. 극소수의 특립동행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인은 사마씨의 고압적인 통치와 찬역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된다. 충군보국, 사생취의등 유가의 신앙은 유례없이 도전을 받는다. 사대부의 정치에 대한 참여열정은 식어버리고, 많은 사람들은 노장철학에서 얻은 사상과 정신으로 위자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위진시대에는 현학(玄學)이 크게 유행한다.


정치적인 암흑과 공포 그리고 유가가치관의 위기로 인한 우려, 초조와 고민으로 상당한 수의 사인은 은일, 담현, 복약, 종주, 방종불기의행동으로 스크레스를 풀고 배설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죽림칠현'의 헤강과 완적이다.  그러나, 식약, 음주, 구선의 겉모습 아래에는 혜강과 완적이 모두 유가의 정치사상을 굳게 믿었다.(그들의 철학적인 관점도 유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전자는 선명했고, 후자는 숨겼다


사마씨의 찬탈을 대하는 태도에서, 혜강은 황족과 인척관계로 완전히 조위의 편에 선다. 그는 날카롭고 격렬하게 사마씨가 불충했고, 위선적이고 후안무치하다고 비난하고 풍자한다. 동시에 절대로 관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나타낸다. 사마소는 그를 미워했고, 결국 핑계를 잡아 죽여버린다.


완적의 정치적 입장은 비교적 은인했다. 완적은 '건안칠자'인 완우(阮瑀)의 아들이다. 재능과 식견이 뛰어났다. 그래서 멀리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사마소는 그를 끌어들이려 애를 썼다. 완적은 사마씨의 집에서 표면적으로는 미친 것이 술이나 마셨지만 말이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완적의 고통의 근원은 사마씨와 거짓으로라도 얽혀야 했고, 사마씨를 멸시하고 싫어하는 것을 드러낼 수 없었으며, 더더구나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위와 가치관의 충돌, 감정상의 갈등으로 완적은 방탄(放誕)으로 자탁(自濁)하고, 광음(狂飮)으로 마취(麻醉)시켰다. 이런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는 더더욱 완적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같은 죽림칠현인 산도(山濤)는 혜강, 완적처럼 격분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며, 담현, 방종, 피세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는 양호(羊祜), 위서(魏舒)등 사인과 시대의 조류에 순응하고 초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유가의 전통의 치국안방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사마부는 바로 정통적인 유가의 신도이다. 가족과 조위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는 속속 핵심역할을 한다. 고평릉정변때, 사마부는 사마사와 함께 경사를 통제한다. 동오의 제갈각은 합비 신성을 포위공격하고, 사마부는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독전하여 위험을 제거한다. 촉한의 강유가 옹주자사 왕경을 공격하여 관중을 깜짝 놀라게 했을 때, 사마부가 나서서 국면을 안정시킨다


한나라말기의 격앙사풍(激昻士風)중에 성장한 사마부는 조위의 건국을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수십년간 도운다. 조위천자에 대한 감정은 심후했다. 가족윤리, 이익과 군신윤리의 곤경 사이에서, 사마부가 받은 고통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마씨가 매번 찬탈하려 할 때마다 사마부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가족지도자의 체면은 돌보지 않고 여러번 조위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사마씨가족의 찬역의 사실을 막지는 못했지만, 내심의 극도의 고통과 자책을 완화시키고, 이를 통하여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다.


사마씨는 "이효치국(以孝治國)"을 강조했다.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은 모두 사마부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들 가족의 어른으로 예우받았다. 사마부의 생일에는 사마염이 황제의 존엄한 신분임에도 그에게 가족의 예를 표하였다. 사마부가 죽은 후에는 더더욱 극진히 예를 다했다. 사마씨가 왜 효만을 강조하고, 충과 효를 나란히 열거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들이 얻은 천하는 군주를 폐위시키고, 군주를 죽이고 군주를 핍박하여 선양하도록 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충성을 주장하면, 그것은 자신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마부는 사마가족에서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사마통(司馬通)은 "대장군광패(大將軍狂悖)의 동생"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그의 형인 사마의와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마통의 아들인 사마순(司馬順)은 더더구나 선양받은 사마염을 크게 조롱하고, 결국 무위(武威)로 유배간다.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죽는다.


위진교체기에, 사마가족은 비록 개별적으로 충의로운 인물이 있지만, 권력과 황위를 찬탈하고 형명술법을 써서 유가의 가풍은 온전히 잃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천하는 오랫동안 안정되게 통치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수십년만에 망한다. 동진의 사마황권은 더더욱 명문거족으로 부터 견제받고, 사마씨는 황족대성으로 결국 남북조의 혼란중에 사라지게 된다. 한말에 지려명절, 강개취의하던 사대부는 중국의 대분열의 난세이 그저 불교, 도교를 논하고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며, 현학을 탐색하고, 인생과 우주의 최종이치를 깨달으려 한다.


후기: 본문은 사생취의의 도덕표준으로 한말에서 위진까지의 모든 사인을 가혹하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사마부는 먼저 동한의 반신이다. 사마씨와 대항한 조위 일파에도 동한의 반신항장이 있다. 다시 넓혀가면, 그후의 역대왕조에 순수한 국가의 충신은 없다. 그외에, 본문은 주로 중원명사의 군권에 대한 태도변화를 고찰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오, 촉등 기타 지역의 사인에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은 아니다.


위진교체기의 고압적이고 잔혹한 통치는 충열하고 불굴의 사대부에게 불행이다. 다만 동시에 사인의 유가사상에 대한 반성, 생명본질에 대한 탐구, 유현한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진나랑 현학으로 중국철학의 발전을 추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