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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1940년대 중국최초의 비행기제조공장

by 중은우시 2017. 7. 17.

글: 구영각(舊影閣)

 

 1933년 4월, 비행기제조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미국의 커티스라이트(Curtiss-Wright )비행기회사, 더글라스비행기회사 및 연주(통륙)(聯洲(通陸))회사와 합작으로 중앙비행기제조공장 항주회사(영문약어는 CAMCO 혹은 CAMC였다)를 설립했다. 약칭은 중항창(中航廠)이다.

 

이 공장의 초기 등록자본금은 300만달러였고, 중국측이 51%를 보유하고, 미국측이 49%를 보유했다. 미국측지분은 중화민국정부에서 5년간 분납으로 상환하기로 했기 때문에 5년간 경영한 이후에 모든 재산은 중국의 소유로 되는 구조였다.

 

이 공장은 비행기의 각종 부품을 제조하고, 비행기를 조립하며, 비행기를 수리하고 유지보수했다. 그리고 이후에 독립된 비행기제조의 중임도 맡을 예정이었다. 1년여의 준비끝에 마침내 1934년 8월 항주에서 정식 운영을 시작한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중항창의 직원은 이미 천명에 달하였고, 당시 중항창의 노동자는 항주에서 왔을 뿐아니라, 전국각지에서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모두 뽑았다.

 

비행기공장이 생산을 시작한 떄로부터 1937년 8월 14일부터 항주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어 비행기제조공장이 할 수 없이 항주에서 떠나야했던 때까지 3년동안 생산, 조립, 수리를 했다.

 

더글라스정찰기, 노드롭경폭격기, 플리트훈련기, 쉐릭전투기, Vultee폭격기 및 Curtiss의 각종 전투기 예를 들어, Crutiss HawksII, Curtiss Hawks III등 합계 전투기 235기였다.

 

1937년 8월 폭격후, 9월 3일 전체 공장은 먼저 무한(武漢)의 남호공항으로 옮겨가고 다시 한구(漢口)로 간다. 시국이 위급하여, 일본군이 무한을 공습하자, 한구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중화민국정부는 미국과 상의한 후 운남(雲南) 서려(瑞麗)의 루윤(壘允)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새로운 공장을 만든다.

 

1939년 7월 1일, 루윤중앙비행기제조공장이 정식으로 생산을 개시한다. 비행기공장이 문을 연 후 겨우 3개월만인 1939년 10월 루윤비행기공장은 최초의 조립비행기의 시험비행에 성공한다. 사람들은 열정을 가지고 이 항일의 동력이 될 생산활동에 투입된다.

 

1940년 10월 26일, 일본군 비행기 27기가 루윤중앙비행기공장을 폭격한다. 40인미 사망하고 67인이 부상을 입는다. 통계에 따르면, 1939년 7월부터 1942년 5월까지의 3년가량의 기간동안, 루윤에서 조립생산, 수리된 비행기와 여기에 더해서 일부 버마에서 조립,수리된 훈련비행기까지 합하면, 모두 300기 정도가 된다.

 

일본군이 버마의 납술(臘戌, 루윤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점령하는 위급한 상황하에서, 루윤중앙비행기제조공장은 어쩔 수 없이 비행기제조공장를 파괴한 후 후퇴한다. 그후, 국민정부 항공위원회는 중앙비행기제조공장의 해산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