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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일본의 중국침략초기에 왜 쌍방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16. 7. 3.

글: 고사민간(故事民間)


1937년 7월 개전때부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의 4년동안,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면서도 중국, 일본 두 나라는 모두 전쟁상태에 들어간다고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단절하지도 않았다.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기실, 일본의 중국침략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일본 두 나라정부는 선전포고문제를 아주 중시했다. 각자 충분히 고민하고 토론했으며 그 결과 본국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식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노구교사변이 발생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장개석은 일찌기 외교부에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한다. 당시, 북평기찰(北平冀察)당국은 이미 일본군과 정전협정을 맺었다. 외교부는 장개석의 지시를 검토할 때 이렇게 생각한다. 지방정부가 이미 일본군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중앙정부가 병력을 움직여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중앙과 지방이 서로 관계도 없고, 협조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평화에 대한 바램을 나타내는게 좋겠다고 한다. 외교부에서 이 의견을 여산의 장개석에게 전달했고, 결국 성명을 발표하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7월 16일, 중국정부 행정원은 회의를 소집하여 대일선전포고문제를 논의한다. 최종결론은 이렇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다. 외교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선전포고와 외교관계단절후, 중국과 일본은 교전국이 된다. 일본은 교전국의 신분으로 각국에 일체의 군수품과 군수원료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국의 일본교민들이 축출되거나 체포될 수 있다. 중국은 교민을 귀국시킬 배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민들이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재중국 교민 및 일본 조계의 일본인은 영국, 프랑스등 국가의 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중국정부가 쫓아내거나 간섭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선전포고나 외교관계단절후, 중국의 불리한 점이 유리한 점보다 많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외교관계단절을 하지 않는 것이 중국이 대일관계의 현상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노구교사변이후, 일본정부도 선전포고, 외교관계단절문제를 논의하였다. 8월 14일, 일본내각회의에서 누군가 중국에 선전포고할 필요가 있을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선전포고가 일본의 이해관계에 미치는 결과가 복잡다단하였기 때문에 회의에서는 일치하여 이 문제를 보류하기로 결정한다.


9월 중순,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총리대신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군, 해군방면의 일치된 의견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일본의 대부분 군용물자와 원료를 외국에서 수입하는데, 만일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일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를 수입하는 것이 자유롭제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발전되어 10월에 이르러, 중국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부대는 다시 선전포고를 하자는 요구를 제출한다. 이유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니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점령지역의 세관, 우편, 금융등을 접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11월 1일 내각에 선전포고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위원회를 설치한다. 위원회의 일치된 결론은 선전포고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일본정부는 1938년 1월 16일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국민당정부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8일, 일본정부는 다시 보충성명을 발표한다: "제국은 무고한 중국민중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국민정부를 상대방으로 보지 않는 입장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더더구나 선전포고를 할 이유가 없다" 그날, 일본정부는  카와고에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중국주일대사 허세영(許世英)도 1월 20일 요코하마를 떠나 귀국한다.


즉, 일본은 승인하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왕정위 괴뢰정권을 만들게 하였으니, 더더구나 일본정부는 중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가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