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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만주국의 친일분자에도 등급이....조선인은?

by 중은우시 2017. 7. 3.

글: 김쾌락(金快樂)


왕정위(汪精衛)는 근대중국의 두호한간(頭號漢奸), 즉 최대매국노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가장 기분나쁜 날이 언제였을까? 1943년 11월 5일도 분명 그 후보일자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다지 별다를 것도 없는 이 날에, "국민정부주석" 겸 "군사위원회위원장"이던 왕정위 선생은 일본수상 도조 히테키(東條英機)의 초청을 받아 도쿄에서 "대동아회의"에 참가한다. 그리고 거기서 기괴한 괴뢰두목들과 같이 사진을 찍힌다.


거기에는 영토를 한줌도 갖고 있지 못한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수뇌 첸드라 바오스도 있고, 아무런 자주성도 없는 버마국의 총리 바모와 필리핀공화국의 대통령 라우엘도 있다. 그 중에서 왕정위가 가장 멸시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의 곁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키작은 사람일 것이다. 만주국 총리 장경혜(張景惠). 왕정위는 이 자를 멸시하였을 뿐아니라, 그 '만주국'도 완전히 멸시했다. 그는 당시에 청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서 마지막 황제 부의의 친생부친인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 했다. 실패한 후 체포되어서는 "강개가연시(慷慨歌燕市), 종용주초수(從容做楚囚), 인도성일쾌(引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 라는 명구를 남겨 한때 아름다운 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부의는 퇴위한지 20년만에 다시 일본인에게 빌붙어서 동북에서 황제의 보좌에 오르게 될 줄을. 국가를 분열시켰을 뿐아니라 일본명절이 되면 동쪽의 천황에게 절을 하니, 초상의 체면을 구길대로 구겼다.


모두 일본인을 위하여 매국노가 되었지만 왕정위는 그래도 자신의 기반이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정권은 손중산 선생을 국부로 모시고, 건국대강을 따르고 있으며, 정권도 국부가 직접 정한 오원제를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호도 민국기년을 쓰고 있고, 청천백일의 국휘와 만지홍의 국기를 사용하며, 수도도 여전히 남경에 두었다.


일본인과 '제휴'하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삼민주의와 민국법통의 정식계승자이다. 그리고 '독립자주'의 화평구국정권이다. 그래서 일본도 우리에게 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던가?


더욱 화가나는 점은 부의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만주국총리라는 자가 나타나서 자신과 평기평좌(平起平坐)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사진을 찍을 때는 자신이 도조 히테키의 옆에 서서 일본인과 거리가 더욱 가까워서 만주국을 누를 수 있었다.


만일 만주국이 한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만주국도 '화평반공구국'을 기치로 내건 이 이웃나라 '왕정위'를 멸시했을 것이다. 일본천황은 삼신기(三神器)중 검(劍), 경(鏡)의 복제품을 부의에게도 한세트 나누어 주었고, 후작인 사가가((嵯峨)의 딸을 부의의 동생 부걸(溥傑)에게 시집 보냈다. 이렇게 하여 '일만친선'의 성과를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전세계에서는 24개 국가가 만주국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소련도 포함되어 있다. 왕정위의 정부는 겨우 그 절반정도의 국가로부터만 승인받았다.


이와 동시에 만주국은 독립과정은 정당하지 않지만, 국경은 비교적 명확했다. 사방에 '왕도낙토'의 국경비를 세운다. 그러나, 왕정위정부는 달랐다. 전국정부라고 말은 하지만, 겨우 12개성의 기반만 가지고 있었고, 1개의 성도 완벽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다. 북평(북경), 천진과 산동, 산서, 하남, 하북은 '화북정무위원회'라는 나라 안의 나라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만주국이 마찬가지로 같은 일본의 아들 급의 왕정위정권을 무시하다보니, 더더구나 화북정무위원회라는 손자급의 친일정권은 무시하였다. 그리고 이 '우방'이 관리들도 모욕했다. 화북정무위원회 소속의 천진경찰총국 독사전원(督査專員) 정승빈(鄭承斌)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서 부친상을 치른 후 천진으로 돌아가려 하자, 심양경찰국은 "너는 만주국 사람이므로 당연히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내야지 초재진용(楚材晋用)해서는 안된다"는 명목으로 그의 '출국(만주국을 나가는 것)"을 막았다. 정승빈은 사방에 부탁을 하고서야 겨우 '귀국(왕정위의 중화민국으로)'할 수 있었다.


정승빈이 만주국에 남지 안으려고 한 이유는 아주 많다. 그중의 하나는 아마도 지위일 것이다. 만주국관료의 등급중에서 그와 같은 경우는 출신등급이 가장 하층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료들로부터 가장 멸시당한다. 원인은 다른게 아니다. 그는 일제의 주구(走狗)관료로서 노화(奴化)가 가장 늦었기 때문이다.


만주국 관료등 중에서, 수가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정승빈과 같은 한족이었다. 대다수는 1931년 '9.18사변"후 만주에 남게 된 봉계(奉係)  즉 봉천(奉天) 군벌의 군정관원, 통칭 "봉계관료(奉係官僚)"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들은 만주국 관료체계의 각 층면에 흩어져 있다. 고위직으로는 장경혜같은 총리도 있고, 하층으로는 현장, 과장이 있어서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멸시당하는 집단이다. 고위직에 있는 자들도 그저 형식이고, 하층관료들은 더더욱 일본지도관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봉계관료"를 가장 멸시하는 것은 "만계관료(滿係官僚)"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혹은 보희(寶熙, 만주국의 내부대신), 제후(濟煦, 부의의 호군장관)같이 부의를 따라 동북으로 온 팔기귀족들도 있고, 희흡(熙洽), 영맹매(榮孟枚)같이 직접 만주국을 기획한 종용지신(從龍之臣)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만주국은 대청제국을 축소해서 재현한 것이다. 그들이 여러해동안 "우리 대청"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황제가 같은 황제이니, 체제도 같은 체제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만치한(以滿治漢)" 만계관료야말로 동량이고 골간이며, 봉계관료는 투기분자로 부려먹을 수는 있지만, 추밀(樞密)로 쓸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마도 "몽계관료(蒙係官僚)" 즉, 몽골계관료들은 웃을 것이다.


만계관료는 스스로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더라도, 일본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봉계관료나 만계관료는 사용하는데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몽계관료는 달랐다. 그들은 일본인이 중국을 추가로 분열시키는 음모를 하는데 필요했다. 그러니 더욱 잘 보살펴야 했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드물게 사는 대흥안령지구를 흥안동,서,남,북의 4성(省)으로 나누고, 각각 성정부를 건립한다. 이는 친일이 동북 몽골왕공들에게 관직을 많이 나눠주기 위한 것에 다름아니다. 그외에 일본인은 몽계관료들에게는 독립한 무장력을 인정한다. "흥안사(興安師)" 그리고 전문적인 "흥안군관학교"도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한다. 몽계관료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일본인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면서, 스스로 만계, 봉계관료보다 한단계 위라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


몽계관료가 만주국관료체계에서 가장 상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선계관료(鮮係官僚)" 즉 조선계관료는 몽계관료를 무시했다. 일본은 1910년에 조선반도를 합병한 후 대거 "대화화(大和化)"정책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일본어를 잘 알고 일본의 '대동아공영'의 가치관을 지지하는 관료를 배양해낸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소위 '간도지구'를 통치하는데 사용한다.


장경혜의 비서를 맡은 적이 있는 고비곤(高丕琨)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국의 "개척총국참사관"인 윤상필(尹相弼), "사평성민정청장(四平省民政廳長), "간도성성장(間島省省長)" 윤태동(尹泰東)은 모두 '전혀 조선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말투가 전혀 없이 말그대로 일본인 그대로였다. 이들은 만계관료들보다 중용되었다. 다만, '사람수가 많지 않고, 특히 상층관료는 더욱 적었다."


선계관료가 정신적으로 국적상으로 모두 준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준일본인은 그들보다 위에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본인으로 동화한 시기가 더욱 긴 "대계관료(臺係官僚)" 즉 대만계관료이다. 이들은 남방의 따스한 환경에서 살다가 동북의 빙천설지로 왔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소위 '대동아공영'을 위하여 분투하겠다는 '결심'을 엿볼 수 있다.


대계관료는 금융, 사법, 외교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계관료들보다 일본인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만주국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대만 신죽(新竹)사람인 사개석(謝介石)은 외교총장 그리고 주일대사가 된다. 일본과 소련간의 낙문감(諾門坎)충돌이후에 국경선 담판을 벌일 때도 만주국에서의 참여인사중에는 대만계 외교관이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대계관료는 보편적으로 일본어에 정통하고 각방면에서 일본인과 습관이 같았다. 다만 대만은 어쨌든 만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현지화의 정도가 약했다. 전체 만주의 관료체계중에서 이들 모든 매국노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집단은 지금은 이제 이름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관동주계관료(關東州係官僚)"들이다.


관동주는 1905년 러일전쟁후, 일본인이 러시아인의 수중에서 빼앗은 요동반도남부지역을 말한다. 일본의 만주,몽골경략의 근거지였다. 현지민중은 대만, 조선의 민중들처럼 강제로 일본국적을 취득한 것이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노예화교육을 받았다.


20여년의 통치를 받다보니, 일본인들을 일군의 관리를 배양해낸다. 이들은 일본어에 정통하고, 동북의 환경과 민심을 잘 알았다. 만주국건립이후 중국인들을 부리기에 가장 좋은 도구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중요시된다.


앞에서 언급한 고비곤은 바로 그 중의 한 명이다. "관동주인"은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내는데, 대우는 일본인 바로 다음갔다. "한 달 월급이 4,5십원하는 소학교 교사로부터 만주국의 관리를 지내면 최저 월급이 100원이었다." "관동주에서 남의 밑에서 겨우 순포로 일하던 사람이 지금 만주국이 되니 가장 못못해도 순관, 경좌가 되고, 잘나가면 현경무과장 혹은 경찰서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재물을 긁어모을 수도 있고 권세도 있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관동주계관료는 만주국정권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몽계관료가 흥안4성을 장악한 것을 제외하면, 만주국의 나머지 15개 성 중에서, 10개성은 모두 관동주계관료들이 성장을 지낸다.


이들은 은퇴후에 일본계관료들과도 비교할만큰 잘나갔다. 만주전업, 대두회사등 국유기업의 고관을 지내기도 했다. 관동주계관료들은 담량도 다른 관료들보다 컸다. 일찌기 만주국 외교부 선화사사장을 지낸 이의순(李義順)은 이론을 하나 만들어 내는데 "일본인에게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게 받들지 말라" "예를 들어 기녀도 인기를 얻고 나면 반드시 아부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폼을 잡아서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는 한간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할 수 있다.


만주국관료의 체계에서 등급이 비교적 많지만, 설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어젼히 일본관료들이 보기에는 노비이다. 그저 떠받들고 시키는대로 하는 자이다. 일본이 패전하고 투항한 후, 전체 관료체게는 만주국의 멸망과 함께 붕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