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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훈령(勛齡): 중국의 나폴레옹

by 중은우시 2016. 4. 11.

글: 살소(薩蘇)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홍장(李鴻章)이 비스마르크를 만났을 때, 자신이 동방의 비스마르크라고 칭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러나 서방의 이횽장이라고 불리지는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만일 사실이라면, 비스마르크는 마음 속으로 이홍장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시모노세키조약같은 것에 서명하지는 않았으니까.

동방의 비스마르크가 귀국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파리에는 "중국이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시의 해외매체가 이 "중국의 나폴레옹"을 보도한 내용이다. 1902년 설날, 파래주재 중국공사관에서는 무도회를 연다. 그중 영문명칭이 카를로스인 "Hsing Ling", 즉 공사의 아들은 나폴레옹같이 치장하고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나폴레옹황제의 영웅의 풍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이 중국소년은 바로 주프랑스공사 유경(裕庚)의 아들 훈령이었다. "Hsing Ling"은 바로 "훈령"의 영문식 독음이었다.


유경의 부인은 절반의 백인혈통이어서, 그의 이 아들 훈령이든 다른 두 명이 더 유명한 딸들인 덕령(德齡)과 용령(容齡)은 모두 약간의 혼혈아의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덕령과 용령은 나중에 궁에 들어가 서태후의 비서와 통역이 된다. 나중에 덕령이 쓴 <어향표묘록(御香飄渺錄)>은 청나라말기의 궁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용령은 시종 중국의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을 결합시키는 시험을 했다. 그들의 가족상황에 관하여 민국시기에 여러 야사에 내용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룡혼잡(魚龍混雜)해서 놀라운 것을 추구하는 여론환경의 영향을 받아, 청말민초의 여러 믿기 힘든 기록의 의심스러운 작품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비교적 믿을만한 것은 유경이 비록 전형적인 만주족 이름이지만, 조상은 한족이다. 그의 가족은 한군기(漢軍旗)출신으로 원래 성은 서(徐)이다. 그래서 훈령, 덕령, 용령등은 원래부터 만주족귀족은 아니었다.


기실 그의 가족의 상황에 대하여 외국의 신문잡지에는 일찌감치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이비기자들의 대부분은 외국어를 몰라서, 야사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당시의 외국 간행물에는 이 '중국의 나폴레옹'에 관련된 보도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를 보면 그는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유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은 부친 유경보다 많이 알려졌다고도 할 수 있다. 원인을 따져보면, 훈령은 확실히 영중했고, 심지어 프랑스여자 메이 피리시니는 그를 좋아했다. 그녀는 훈령과 데이트를 했고 바로 사랑에 빠진다. 이 이국의 반려간의 혼인은 훈령가족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런 압력을 버티고, 1902년 가을 파리에서 결혼에 성공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훈령은 유럽에 있는 동안 모범적인 남편이었다고 한다.


피리시니에 대하여 말하자면 불행한 것은 1년후에 훈령이 중국으로 귀국해게 되고, 그녀도 남편을 따라 중국에 오게 된다. 그러나 금방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피리시니는 이혼을 요청한다. 두 사람의 혼인은 겨우 1년반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애정전선에서 불운한 훈령이 관료생애에서는 봄날을 맞이한다. 그는 서태후의 어용촬영사가 된다. 유경은 일찌기 사진촬영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찌기 일본에서 딸 용령의 일본전통복사진을 찍은 바 있고,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온다. 훈령은 부친에게 촬영을 배웠고, 기술도 괜찮았다. 서태후는 말년에 사진에 흥미를 나타냈고, 잘 모르는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훈령을 촬영사로 쓴다. 훈령은 후세의 촬영가들을 위해 두 가지 권리를 쟁취해서 얻는다. 첫째, 서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서태후의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훈령은 무릎을 꿇으면 촛점을 맞출 수 없다고 하여 촬영사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훈령은 근시안이어서 안경을 끼고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태후의 어용을 깨끗하게 찍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촬영사는 서태후의앞에서 안경을 낄 수 있었다.


비록 일개 촬영사이지만 전체 청나라말기의 '노재(奴才)'들 중에서 서태후로 하여금 낡은 것들을 개혁하도록 양보하게 만든 것은 이 훈령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했고, 중국의 나폴레옹은 서태후를 정복한다. 각자 서로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서태후는 왜 촬영사에게 특례를 주었는가? 아마도 이 서태후의 사진에서 그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서태후 사진은 확실히 서태후 본인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서태후가 이 나이가 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분명 사진기술이 아직 도입되기 전이다.


이것은 아마도 최초의 예술적 합성사진일 것이다. 그 원형은 화사호백(華士胡伯)이 서태후를 위하여 그려준 초상화일 것이다. 이 초상화는 서태후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미화시켰다.




서태후의 유일한 어용촬영사로서, 이 합성사진은 분명 훈령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서태후는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자신을 사진에서 몇 살 더 어려보이게 만들 수 있다면, 서태후는 분명 약간 양보해주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아마도 이것은 원칙보다 더 중요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