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1234년 2월 9일: 하루에 2명의 금나라 황제가 죽은 날.....

중은우시 2016. 4. 22. 23:17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하룻만에 두 황제가 연이어 죽었다. 어느 왕조인지 혹시 아는가?

바로 금왕조이다. 미친듯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변경을 점령했으며, 대명이 자자한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를 금나라 수도로 끌고갔던 그 왕조로 한때 불가일세하며 회남강북을 횡행하며 송고종이 편안히 잠들지 못하게 만들고, 악비로 하여금 가슴 속에 원한을 품게 만들었던 그 금왕조이다.

1234년 2월(금나라 천흥3년 정월), 몽골군대가 남하하여 금나라로 침입해 들어간다. 금나라황제 완안수서(完顔守緖)는 "병력을 이끌고 몽골을 막아내겠다"는 핑계를 대고, 처자식등 온가족을 버리고 자기만 변경에서 도망쳐 나간다. 이때 같이 도망쳐 나온 사람으로는 금태조 완안아골타의 현손이자, 금태조의 넷째아들 완안올술(完顔兀術, 즉 完顔宗弼)의 증손인 완안승린(完顔承麟)도 있었다.

완안승린은 금나라의 일대 명장으로 문무를 겸비했으며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다. 이런 인재라면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황제 완안수서가 중용할만하다. 완안승린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완안수서를 따라 다니며 곁을 지켰고, 황제의 생명안정을 보호했다.

당연히 많은 문무백관들도 황제를 따라서 같이 도망쳤다. 좋게 부르자면 '근왕(勤王)'이지만 기실은 '도망'이었다. 완안승린은 정말 황제를 안전하게 귀덕(歸德)까지 모시고 간다. 그 후에 다시 채주(蔡州, 지금의 하남성 채현)까지 안전하게 호송한다. 채주에 도착하여 안정된 후, 완안승린은 전투국면을 해결할 방안을 내놓는다. 즉시 중앙정부를 다시 만들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몽골인들이 금방 따라올 것이기 때문에.

2월 8일, 몽골군이 흉맹하게 채주로 접근했다. 남송군의 도움하에, 금황제가 있던 임시도성인 채주는 포위되고 만다.

완안수서는 금나라의 운명이 끝났고 곧 나라는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망국지군으로 후세에 기억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조서를 내려 황제의 자리를 완안승린에게 넘겨준다. 넘겨줄 것이면 미리 넘겨줄 것이지 이 지경이 되고나서야 넘겨준단 말인가?

완안승린은 당연히 사양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 황제가 자신을 불덩이 위로 던져넣을 줄이야. 투항하면 만인에게 욕을 먹는 망국지군이 될 것이고, 투항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망국지군의 이름으로 죽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금나라황제도 정말 비애를 느꼈다.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겠다는데도 받질 않는다. 그래서 애원해야 했다: "짐이 경에게 넘기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짐의 뚱뚱한 몸으로는 말을 타기 불편하다. 성이 함락된 후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기가 어렵다. 경은 평소에 잘 달리기로 이름있고, 장수로서 전략도 있다. 만에 하나 도망칠 수 있다면 왕조의 대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게 짐의 뜻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완안승린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 일을 저녁부터 새벽까지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날 아침, 황급히 전위대전(傳位大典)을 거행한다. 아마도 완안승린은 용포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상태에 부하가 와서 남송,몽골대군이 이미 성내로 진입했다고 보고한다. 이쪽에는 막 황위를 넘긴 완안수서가 죽어라 유란헌(幽蘭軒)으로 향한다. 저쪽에는 막 즉위한 완안승린이 군대를 이끌고 내성에서 나가 몽골군과 시가전을 벌인다.

그러나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다시 내성으로 물러난다. 완안수서는 유란헌으로 도망친 후, 한 가지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이다. 완안승린은 선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법도에 따라 백관과 함께 선황의 유체 앞으로 가서 통곡하고 그 자리에서 시호를 "애(哀)"로 확정한다. 즉 그가 사서에서 말하는 "금애종(金哀宗)"이다.

완안승린이 금애종의 죽음에 곡을 마치자 적군은 이미 내성의 아래까지 다가왔다. 완안승린은 계속하여 흐트러진 군대를 이끌고 친히 전투에 나선다. 그러나 전투부대와 전투력이 남아 있을리가 없다. 금방 몽골과 남송의 부대에 격패당하고 그 자신도 어지러운 전투과정에서 죽고 만다.

이렇게 유목민족 여진족이 창건한 금왕조는 태조 완안아골타가 개국한 후 120년만이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의 손에 망하고 만다. 완안승린의 유체는 그의 친척과 병사들에 의하여 파기만(簸箕灣)에 매장된다. 2003년 12월 완안씨의 후인들은 그의 유체를 완안촌으로 옮겨가서 예왕묘의 뒤에 묻었다.

지금 남아있는 사료를 보면, 완안승린의 재위기간은 반나절이 되지 않는다. 일설에 따르면 1시진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역사상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임에 분명하다. 원나라사람들이 쓴 <금사>에서는 그를 "금말종(金末宗)"이라 칭한다.

대금국이 하룻만에 2명의 황제가 죽다니 충분히 비참한 일이다. 이는 중국역사상으로도 사상유례가 없고, 오로지 단 1번 발생한 일이다.

금나라가 멸망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후세인들이 곰씹어볼만한 일이다.

하나는 금나라는 북송에서 남송까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전쟁이 각 당사국에 가져오는 비극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약간 느슨해졌다. 이점은 송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래서 멸망의 후환을 남기게 된 것이다.

둘은 후기에 남송과 대치하면서 객관적으로 양국의 백성들은 이익을 본다. 생산력과 문명의 성과가 크게 발전한다.

셋은 유목민족은 각민족과 융합하여 특히 한족과 융합하여 점차 한화(漢化)한다. 그리하여 문명건설을 중시하고 단일한 유목민족문화는 농경문화를 위주로하는 민족으로 변화한다. 이점은 문명적으로 볼 때 큰 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