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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의화단(義和團)사건을 되돌아본다 (3) - 중국민중

by 중은우시 2016. 2. 29.

3. 중국민중


천진은 서방선교의 중점지구중 하나이다. 그리고 의화단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중 하나이다. 천진에서는 일찌기 이런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 서양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서양종교를 믿지 않는 평민들과 분쟁이 일어나서 지방관청에서 소송을 벌이게 된다. 관청은 선교사들을 겁내어 교인의 편을 들어준다. 기본적으로 이런 소송은 발생하기만 하면, 교인이 이겼다. 억울하게 소송에서 진 한 백성이 분노해서 관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이런 판결을 내리느냐? 관리가 대답한다: 누가 너에게 입교하지 말라고 했느냐. 즉, 중국백성이라도 서양종교를 믿으면 교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소송에서 다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는 서양열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말하지만, 이는 확실히 이미 무슨 공정,공평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서방선교사들이 그들의 정부와 함께, 이미 하층에서 중국정부의 권력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관리는 기본적으로 서양열강의 괴뢰가 되었다.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판 것이다. 서방에서는 청나라정부의 권력을 빼앗아 중국민중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은 결국 교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호를 잃은 중국하층민중들은 반항하는 것 외에 무슨 출로가 있었을까? 그래서 많은 중국민중들은 말했다: 좋은 사람은 서양종교를 믿지 않고, 서양종교를 믿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비록 과격하지만,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도양단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서양종교를 믿은 중국인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혹은 좋은 사람도 서양종교를 믿으면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고. 이런 주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명나라때 서광계(徐光啓)는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당연히 나쁜 사람이 아니다. 강희제때 바티칸과의 '중국예의지쟁'때 바티칸은 중국교인들에게 조상에 제사지내고, 공자에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청나라조정은 천주교의 중국선교를 금지시킨다. 아편전쟁후에야 이 금지령이 풀린다. 이 일백여년동안, 많은 원래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계속 유지한다. 나중에 천주교에서 발견한 '노교인'이다. 그때 청나라정부와 민중은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도 무슨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보통의 중국농민과 같은 마을에 섞여 살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들은 이 일백여년동안의 존재와 자체선교를 보면 '서양종교를 믿는 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이 없다'는 명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편전쟁후, 서방전교사들이 무력남용을 중국에 가져오면서 상황은 확실히 바뀌게 된다.


서방교회의 권리를 나타내는 것중 하나는 교인의 수이다. 왜 그런가? 현재 중국의 일부 지하교회를 예로 들면, 그들은 정교합일의 낙후한 원칙을 따르므로, 교회는 교인에게 '십일조'를 거둘 수 있다. 즉 교인은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정부와 같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돈이 많아지게 된다. 유럽은 종교개혁, 종교전쟁, 르네상스등을 거치면서, 신교의 세력이 크게 늘어났다. 바티칸이 관할하는 천주교인수는 날로 감소했다. 유럽이외의 지역에서 새로운 교인을 늘여가려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경제적이익을 위한 것이다. 현재 서방각국은 '십일조'에 대한 태도가 각각 다르다. 어떤 국가는 철저히 '십일조'를 금지한다. 예를 들면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가 그러하다. 1936년후의 영국도 그러하다. 어떤 국가는 일부분을 폐지한다. 예를 들면 독일이 그러하다; 미국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다. 각 교파들은 거둘 사람은 거두고, 어떤 경우는 교인의 자유의사에 맡긴다. 어떤 경우는 헌금 혹은 교회가 제창한 자선으로 바뀌었는데, 결국, 모두 돈을 거두는 방법이다. 신도이 수가 경제적 이익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청나라의 '금교령'은 아편전쟁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된다. 서방의 각 교파는 즉시 벌떼처럼 중국으로 몰려온다. 어떤 경우는 교인을 받아들이는데 조심스럽게 진행하여 느렸고, 어떤 경우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고 거두어 신속히 확장했다. 황하 중하류지구는 청나라말기에 자주 재난을 겪는다. 황하는 1855년 물길을 바꾸어 발해로 흐른다. 청나라정부는 전란을 직면해서 황하의 치수사업에 뜻이 없었고 ,돈더 없었다. 그후 황하 하류의 산동쪽은 자주 둑이 무너지고, 다른 자연재해까지 겹친다. 청나라정부의 구제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대량의 기민(飢民), 재민들이 서방교회에서 재난구제를 이용하여 교인을 흡수하는 중요대상으로 된다. 재난구호물자를 줄지 주지 않을지, 예를 들어 죽 한그릇, 쌀 한줌을 주는 것의 조건은 바로 입교했느냐였다. 이렇게 남의 위기를 틈타는 수법은 실제로 아주 악랄하다. 중국역사상의 "차래지식(嗟來之食)"보다 못하다. 그러나 재난을 구제하고,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당시의 청나라정부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들 기민 혹은 재민은 입교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굳은 신앙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서양종교에 입교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확실히 적지 않은 '나쁜 사람'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행하는 견해중 하나는 의화단이 백련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의화단의 어떤 점은 확실히 백련교와 비슷하다. 그러나 의화단이 백련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백련교등 비밀종교는 '반청'을 종지로 한다. 그러나, 의화단은 '반청'이 아니다. 양자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반대로, 백련교등 비밀종교는 반청으로 오랫동안 청정부의 타격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경을 얻고자 금방 서방교회의 품에 안긴다.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백련교 교도를 신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비밀종교로 반청인 백련교도는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우두머리가 재물을  긁어모은다는 점에서 양자는 확실히 일치한다.


그리고, 일부 토비 강도들도 청나라정부의 타격을 받자, 서양종교에 입교하여 보호를 받고자 했다. 산동에서 당시 한 비적의 우두머리가 청나라정부와 의화단의 전신인 대도회와 전투를 벌였다 붙잡혀서 사형을 받는다. 청정부와 대도회가 그의 부하들을 수습하기도 전에, 선교사는 즉시 이 토비의 부하들을 모조리 입교시켜 보호하기 시작한다. 방삼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원래 대도회를 따라 서양종교에 반대했다. 그래서 서양종교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나중에 사건이 커지면서 청나라정부의 진압을 받는데, 그는 아예 서양종교에 입교해 버린다. 이런 사레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때문에 입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종교가 더 믿을만한 배경이었기 때문에 서양종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신앙때문이 아니라, 그저 현실적인 이익을 비교형량한 것이다. 서양종교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받아들였고, 더 많은 중국민중들에게 서양종교의 좋은 점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교인과 비교인간에 분쟁과 충돌이 발생하면 선교사는 자주 사실에 관계없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교인의 편을 들었고, 청나라정부의 사법에 간여하여, 무수한 사법판결이 교인들 편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정의감을 가진 하층민중들은 선교사와 교인에 대하여 강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서양종교에 입교한 사람이 만일 '좋은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그다지 많은 분쟁이나 충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사건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서양종교에 입교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선교사의 비호하에, 정말 물만난 고기처럼, 기세등등하여 비교인을 압박하는 현상이 날로 더해갔다. 청나라말기에 교안이 빈발하던 시기에, 악랄한 짓을 한 교인들이 교적을 박탈당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아주 적었다. 왜냐하면 이런 무뢰배일수록, 돈벌고 일벌이는 건 잘했기 때문에, 제적시키는 것은 교회도 아쉬워했다. 교회는 이렇게 돌진하는 사람도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서방선교사들이 중국각지에서 선교하고 대량의 교인을 흡수한 결과 민중의 분열이 나타난다. 이런 분열은 단순히 보통의 의미에서의 관념차이 혹은 이익충돌만이 아니다. 한 국가의 주권개념하에, 관념차이, 이익충돌은 하나의 한도가 있는 기초위에서 토론을 전개하거나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다. 설사 견해차이가 극단으로 가서 조화되기 어렵더라도 국가주권에 미치지 않으면 기껏해야 집단싸움, 대대로 원수가 되는 것뿐이다. 서방종교의 배후에는 강대한 서방주권국가가 있다. 특히 천주교는 '정교합일'이기도 하여, 세속권력을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국면하에서, 교인과 평민의 모든 의견차이는 거의 국가하층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두 청정부의 주권분열을 의미한다. 교인과 평민은 이미 공동의 바탕이 없어졌다. 아마도 교인과 평민자신은 그렇게 분명하게 몰랐을 수도 있다. 많은 교인은 자신의 행위가 반정부, 반국가라는 것을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인의 배후에는 중국분열을 기도하는 서방열강과 정교합일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종교세력이 있었으므로, 이들 교인들이 조성하는 관념충돌과 이익분쟁은 객관적으로 국가의 분열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현상은 당금 중국에서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바티칸이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세속권력을 취득하는 방식은 전세계각국에서 중국고대와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강대한 추세하에, 지금은 축소되고 약화되었다. 바티칸도 신교의 방식을 배워서, 교회는 학교나 자선기구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당시 바티칸은 하나님을 '보편원칙'으로 하여 세속권력과 하나로 융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지금도 환탕불환약(換湯不換藥)의 방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현재 '보편가치'를 반포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고, 서방세속정권 자체이다. 비록 우리는 오늘날 모든 외국세력이 모두 중국을 분열시키고 중국을 나눠가지려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런 의도가 최소한 어느 정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보편가치'로 분열, 전복의도의 현실성을 포장하는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세계의 많은 지방에서 선례를 본다. 구별되는 것은 '정교합일'원칙하에, 교인은 바로 '서로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이다. 종교는 아주 분명하게 정치와 동일시한다. 오늘날 어떤 원리주의자가 지도하는 종교극단분자와 같다. 다만, 정교분리의 원칙하에, '서로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와 교인은 왕왕 모호한 과도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어떤 때는 종교자유의 명의하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며, 종교가 정치의 보호우산이 된다. 현재 중국에는 많은 지하교회가 있는데, '삼자교회(三自敎會)'를 떠나 비밀리에 선교한다. 실제로는 바로 교육훈련, '서로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의 대오를 확대하는 사명을 부담한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는 어느 정도 존재할 수 있다. 그 전제는 국가주권의 안정이라는 이 최소한의 기본을 유지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정교합일'의 종교는 국가주권을 전복시킬 의도가 있었다. 지금은 '보편가치'를 기치로 내걸고 서방세속정권이 여전히 이 의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정교합일'의 원칙으로 교회가 세속정권을 도구로 삼더라도, 현재는 바뀌었다. '정교분리'의 원칙하에, 서방세속정권은 교회를 도구로 삼는다 목적은 그러나 같다. 항장이 칼춤을 추는 것은 모두 다른 나라의 주권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다시 의화단 민중반항의 합리성과 부족함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의화단이 직면한 것은 실제로 국가주권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주권을 보호하려는 목적하에 의화단에 투신했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합리성이 있다. 많은 사람은 국가주권을 보호한다는 목적하에 의화단에 투신하였다. 여기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문화지식, 기술수단의 결핍으로, 의화단은 패싸움을 하는 민간의 방식을 국가전쟁수단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했다. 확실히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다만 우리는 동시에 보아야 한다. 청정부의 양무운동시도는 서방규칙으로 국가전쟁수단의 능력을 제고하고자 시도한 것이나, 결국 참패한다. 하층민중은 길거리패싸움의 방식으로 벌떡 일어난다. 비록 방식은 웃기지만, 그 비장한 헌신정신은 감동할 만하다. 다음으로, 국가주권은 부의 장악에 관련된다. 의화단의 이 문제에서의 반항방식은 성당을 불태후고, 교인의 주택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런 것은 너죽고 나죽자는 방식이어서 여러 해동안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승리를 얻는 심리상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문화지식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어, 그들은 국가법률로 전체 경제이익을 보호하게 할 수 없었다. 설사 의화단이 패싸움의 방식으로 서양인을 모조리 죽이고, 중국에서 다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 문제에서 유리해지거나 유리한 위치를 점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교회는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세속권력을 취득하는데, 그 핵심은 바로 종교가 만드는 전체발언체계이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을 주장했고, 유가를 핵심으로 한 발언체계이다. 양무운동은 '중체서용'을 주장하여 유가를 핵심으로 한 발언체계를 보호하고 발언권의 최고점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다만, 양무운동의 실패는 유학의 서방종교에 대한 발언권전쟁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화단은 어떤 발언체계를 취할 수 있을까? 혹은 그들은 어떤 사상체계를 가지고 서방종교에 대응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문화지식이 부족하여, 의화단은 이 문제에서 성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종교의 우상숭배를 찾아낸다. 봉신연의의 관동, 오공에서부터 본토신이 외래의 서양신을 이기도록 시도한다. 종교학의 각도에서 보면 이미 패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신교'는 한마디 말로 모든 본토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연극무대에서 문학에서 신들간의 싸움과 승패는 국가주권이 존망의 위기에 처할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믿을 것은 국가의 군사와 경제력이다. 의화단은 그저 열혈만 가지고 있었고, 필요한 수단은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주권정부 혹은 엘리트집단은 이때 민중을 교육시키고, 민중을 단결시키고, 민중을 조직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청정부 및 청왕조의 엘리트집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심각하게 직무유기한 청정부는 의화단운동이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히 역사무대에서 퇴출하게 된다.


역사는 아마도 비슷할 수는 있지만, 중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의 중국에서 중국가 서방의 가치관이 다른 점은 이미 중국사회내부의 서로 다른 집단에 깊이 파고 들었다. 어떤 경우는 기독교를 체현하고, 어떤 경우는 서양종교를 아예 믿지 않는다. 다만 양자간에는 고도의 결합성과 일치성이 있다. 이런 관념상의 차이는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것은 극단적인 대립의 정도가 된다. 역사상의 교인과 평민의 대립상태와 아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 발생하는 '점중사건'은 거의 옛날 선교사, 교인이 서방정부와 함께 청나라정부를 힘들게하던 그 복사판이다. 아무 이유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법률을 무시하고, 임의로 사태를 확대하는 수법은 옛날 '민교충돌'때 교인, 선교사, 열강정부의 수법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인의 진보는 '점중반대'의 대륙민중과 홍콩시민을 통하여 체현되었다. 그들은 '점중자'들의 아무 이유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방식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화단과 같이 이에은 이 눈에는 눈식으로 하지 않았다. 법률과 여론수단으로 극소수 '점중자'들을 상대했다. 그들의 무리한 행동은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천하에 보여주었다. 민중이 냉정하게 대응한 '점중'의 배후에는 냉정하고 자신있는 중국정부가 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당금 중국정부는 이미 절대로 당년의 청정부가 아니다.


당금 중국민중의 애국주의 열정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의화단의 옛날 달력을 꺼내어 들고 애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금정부에 있어서, '구외배외'는 당연히 회피해야 한다. '구외미외'도 바뀌어야 한다. 청말정부는 자주 서양인의 여론으로 자신의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훈과 거울이 된다. 비록, '세계대동'이 아름다운 이상이고,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는 주권국가가 여전히 최고원칙이다. 그리고, 이 국면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서방가치관념의 차이에 기하여 조성된 의견불일치는 중국정부가 반드시 국가주권의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국가주권의 완전성을 유비보호하는 것을 하한선으로 하여 각종 의견불일치와 충돌에 대하여 필요한 상응수단을 취해야 한다. 행운이라면,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은 서방으로 하여금 다시는 더 잇아 쉽게 무역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제 서방이 다시는 중국을 향하여 괴롭치지 못할 것이다. 행운인 점이라면,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은 서방으로 하여금 다시는 더 이상 쉽게 중국에 무역을 동원할 수 있도록 상응한 수단을 써야 한다. 국가주권의 완정성은 하하선으로 하여 각종 의견불일치와 충돌에 대하여 필요한 상응하는 상응한 수단이 된다. 행운인 점이라면,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은 경제적으로 거대한 발전을 획득했고, 중국은 더 이상 경제명맥을 외국인이 장악하여 시키는 말이면 다 들어야 했던 시절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각종 내외의견불일치, 충돌이 냉정, 자신의 자신감이 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마찬가지로 의화단에서 심각한 교훈을 끄집어 내야 한다: "의화단이 강자아, 관노야, 손대성야등을 이용하여 본토신선이 예수, 하나님, 마리아등 외래신선을 이기려 하였지만, 실패한다. 우리가 오늘날 다시 무슨 사상자원으로 '중국스토리에 잘보일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무슨 사상자원을 '의화단이 강자아, 관노야, 손대성등 본토신선이 예수, 하나님, 마리아등 외래신선을 이기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우리는 오늘날 무슨 사상자원'과 "중국스토리를 얘기하도록'해야할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어떤 발언체계를 써야 그들 완고한 '점중자(點中者)'를 설득하여, 그들이 포기하게 하고 기꺼이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