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삼국시대: 전염병, 전쟁 그리고 선비무장

중은우시 2016. 7. 29. 00:44

글: 선삼Q(先森Q)


한말 삼국시대, 사회는 동요하고, 재난이 빈발했으며, 전염병이 여러번 대규모로 발생했다. 보통백성과 사병들이 대량으로 죽었을 뿐아니라, 고위직에 있던 선비와 무장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의 승패와 역사의 방향도 이로 인하여 바뀌기도 했다.


고대전쟁은 인원이 밀집되어 있고, 식량공급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환경위생조건도 좋지 않았고, 사병들의 체력도 소모가 컸다. 이것들은 모두 병균이 인체에 침입하는데 좋은 여건을 조성해준다. 만일 장거리원정이면서 거기에 기후변화와 수토불복(水土不服)등의 요소가 있는 경우 사병들은 더욱 쉽게 질병에 감염된다. 만일 악성전염병이면, 심각한 전투력손실을 가져오고 대량의 비전투인력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동한말기, 질병이 전쟁에 영향을 끼친 저명한 사례는 바로 적벽대전이다. 208년 형주로 남하하기 전에 조조군대의 주력을 구성하는 북방사병중에는 아마도 당시 중국북방에서 유행하던 반진상한(班疹傷寒, 티푸스)에 걸린 인원이 있었던 것같다.


반진상한은 쉽게 유행하고,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것이며, 치사율이 비교적 높은 급성전염병이다. 동한에서 여러번 발발한 반진상한은 아시아중부 및 로마제국까지 퍼진다. 근대초기 1498년 그라나다포위공격때, 스페인사병중 반진상한으로 사망한 사람이 1만7천여명에 달했다. 항일전쟁시기 상해에서 발발한 반진상한은 치사율이 20%에 달했다.


동한말기로 되돌아가보면, 208년 10월 조조의 대군이 주유가 이끄는 손류연합군과 적벽에서 만났다. 전자는 수량이 후자보다 훨씬 많았다. 다만 반진상한은 이미 조조군 내부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조군의 전투력은 저하되었고, 이로 인하여 첫전투에서 패배한다. <삼국지>에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때 조조의 군대에는 이미 전염병이 돌았다. 처음에 교전을 하고 조조의 군대는 패퇴하여 강북으로 물러났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적벽대전이 발발한 시기는 그해 12월 중하순이다. 겨울은 바로 반진상한이 많이 발생하는 계절이다. 전염병으로 조조의 군대는 인원손실이 심각하여, 사병의 전투력을 극히 약화시켰다. 주유는 황개의 거짓투항계책을 받아들이고 화공을 써서 승리를 거둔다. 그 전투로 조조의 군대는 절반이상을 잃는다. <자치통감>에서는 "겸하여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절반이상이었다."


적벽대전의 패배이후, 조조는 더 이상 강남을 넘보지 못했다. 유비는 형주를 얻고, 동오는 명성을 크게 떨친다. 이렇게 하여 삼국정립의 서막이 열렸다. 208년 이 악성전염병의 영향이 이렇게 컸던 것이다.


삼국후기인 253년, 동오의 권신 제갈각은 이십만을 이끌고 합비 신성을 포위공격했으나, 백여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동오의 군대는 피로하여, 면역력이 저하되었다. 병졸들이 오염된 강물을 마시는 바람에 이질이 발생하여, "병자가 절반이상이고, 사상자가 곳곳에 널렸다." 조위는 그 기회를 틈타 양쪽에서 동오군을 협공하였다. 제갈근은 할 수 없이 철군해야 했다. 제갈각의 출정은 원래 군신의 반대에 부닥쳤는데, 이제 병력까지 크게 잃고 돌아오게 되니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하여 정적이자 동오의 종실인 손준에게 피살당하고 삼족이 멸해진다.


전염병이 전쟁기간에 발발한 사례는 삼국시기에 아주 많다. 예를 들어, 217년 위군이 동오의 거소(이번은 비교적 특수했다. 뒤에 소개한다)를 공격할 때, 242년 오군이 해남도을 토벌할 때 등등이 있다. 다만, 삼국쟁패의 직접적인 영향은 모두 적벽대전만 못하여 여기에서 따로 기술하지 않겠다.


전염병이 발발하면 평민과 병사들이 대규모로 사망할 뿐아니라, 저명한 선비, 무장들도 그 피해를 크게 입는다. 사서에 명확하게 기재된 것은 217년의 그 전투이다. 그대에 조조군은 동오를 정벌하며, 거소까지 진격했는데, 전염병이 발발한다. 군대를 따라 출정한 연주자사 사마랑(司馬朗)은 병사들의 상황을 순시하다가 불행히 병에 걸려 사망한다. 그때 나이가 47세이다. 사마랑이 누구인가? 바로 사마의(司馬懿)의 형이다. 사마가족의 걸출한 인물중 하나이다.


5명의 저명한 문인도 이 전염병으로 죽는다. 그들은 바로 건안칠자(建安七子)중 왕찬(王粲), 서간(徐幹), 진림(陳琳), 응창(應瑒)과 유정(劉楨)이다. 조조 막부의 요원으로 이 5명은 동오를 정발하는 군대를 따라갔다. 조비(曹丕)는 건안(한헌제의 연호)시기의 중요한 문학가로 건안칠자와 관계가 밀접했다(공융은 제외). 조비는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지난해의 전염병으로 친구들이 모두 그 재난으로 떠났다. 서, 진, 응, 류가 일시에 같이 죽으니, 아픔을 말로 할 수 없다."


212년 건안칠자중 완우(阮瑀)가 병사한 후, 건안문학의 풍격은 이미 강개창량(慷慨蒼凉_에서 처고애상(凄苦哀傷)으로 바뀐다. 217년 건안오자가 동시에 사망하면서 건안문학창작은 저조기에 들어선다. 옛날의 번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위에서 질병으로 죽은 사람중 많은 경우가 문인정객이었다. 동오측은 기본적으로 총사령관이나 무장이다. 조조군의 전염병감염으로 승리를 거둔 주유는 201년 "길에서 급병을 만나" 돌연히 사망한다. 36살의 한창 나이때였다. 209년-211년 동오가 지배하던 지역내에 가뭄이 들었을 뿐아니라, 전염병이 발발한다. 주유가 걸린급병은 아마도 당시 유행한 악성전염병일 것이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외에 동오의 숙장 정보(程普)도 주유와 같은 해에 사망한다.


동오의 가장 천부적인 군사가인 주유의 죽음이 가져온 손실은 거의 보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주유와 정보의 죽음은 동오 충사령관이나 무장의 액운의 시작일 뿐이었다. 217년, 주유를 대체한 노숙이 45세의 나이로 돌연 병사한다. 건안오자와 같은 해에 사망한 것이다. 사서에는 노숙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묘사하지 않고 있지만, 돌연 사망한 것으로 봐서는 사인이 아마도 그 해의 대형전염병일 것이다. 노숙과 같은 해에 사망한 사람은 맹장 능통(凌統)도 있는데,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219년-220년 동오와 조위에서 연이어 전염병이 유행한다. 219년, 관우가 양양전투로 위명을 천하에 떨친다. 손권은 비밀리에 조조와 결맹을 맺고, 형주를 기습하기로 계획한다. 형주로 출정한 손교(孫皎)는 219년 사망한다. 형주기습을 기획한 주모자로 노숙의 후임인 동오의 총사령관 여몽(呂蒙)은 220년 병에 걸려 사망한다. 나이 겨우 41살로 한창때였다. 또 다른 관우토벌에 참여한 장흠(蔣欽)도 같은 해에 병사한다. 그외에 감녕(甘寧)도 220년에 병사한다. 1년가량의 기간동안 동오는 연이어 4명의 무장을 잃은 것이다.


역사학자인 장대가(張大可)는 손권이 강남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북방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이 총사령관과 무장이 지나치게 빨리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동오가 건국하기를 전후한 4명의 총사령관인 주유, 노숙, 여몽과 육손은 모두 문무를 겸비하였다. 그런데 그중 앞의 3명이 모두 한창 나이에 요절한다. 동오의 12명 호장(虎將)중에서 10명은 손권이 칭제(229년)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중 정보, 능통, 감녕과 장흠은 아마도 전염병으로 인하여 죽었고, 손권이 오왕을 칭하기(221년) 이전에 사망했다. 지나치게 많은 군사총사령관과 중요무장이 요절하여 동오는 조위와의 쟁패때 크게 실력이 뒤지게 된다.


사서는 위의 여러 장수의 사인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간적으로 보면, 그들이 전염병으로 죽었을 가망성이 아주 크다. 전쟁에서의 승부가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과 비교하자면, 전염병으로 인한 인재손실이 역사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은 숨어서 보이지 않고, 잘 깨닫기 어렵다.


조위에서도 여러 문인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핵심 모신과 총사령관은 한 명도 없다. 게다가 중원은 인구가 조밀하여 동오보다 훨씬 많다. 조위는 후기에도 여전히 인재를 계속 배출하고 국력이 강성했다.


학자 왕문도(王文濤)의 연구에 따르면, 동한,서한 사백년동안 대규모 전염병이 50차례 발발했다. 동한말기의 한헌제시기에 7번이 있었다. 만일 지방성 전염병까지 더하면 아마도 17번에 이를 것이다. 한헌제때는 2년도 되지 않아 전염병이 한번씩 유행한 것이다. 이는 양한 4백년동안 7년에 1번이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왜 동한 말기에 전염병이 이렇게 빈발했는가?


서력기원초기, 즉 동한이 입국하기 전후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한다. 동한 말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현재보다 추웠다. 그리고 다른 자연재해도 끊이지 않았다. 3세기 후기에 이르러 추위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후 3세기동안 계속 추운 기후였다. 추운 날씨는 비록 직접적으로 전염병의 유행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전염병에 끼친 간접적인 영향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추운 날씨는 농작물의 흉년을 가져오고, 나아가 기근을 가져온다. 이로 인하여 일련의 사회문제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생활조건이 열악하고, 도시빈민굴이 나타났으며, 기근을 피해서 인구이동이 일어난다. 이들 요소는 왕왕 전염병의 유행이 확산하고 가중된다. 한나라말기 군벌할거, 계속되는 전쟁, 군인의 대규모 이동, 그리고 전란을 피한 평민의 이주는 더더욱 전염병의 전파를 가속화시킨다. 갈검웅(葛劍雄)의 연구에 따르면, 삼국시대 인구의 최저치는 2200만이다. 동한인구의 최전성기와 비교하면 1/3에 불과하다. 추위와 이상기후로 인한 기근과 빈번한 전쟁과 전염병은 인구격감의 주요 원인일 것이다.


경사 낙양, 관동 및 강남은 삼국시대에 전염병이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즉 전염졍은 주로 조위와 동오의 경내에서 발발했다. 촉한은 다행히 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위에서 분석한 사례에 촉한은 완전히 빠져 있다. 이는 파촉의 인구밀도가 낮고, 지리환경이 폐쇄적인 것과 비교적 큰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