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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의 더위기록: 1년에 1만여명이 사망하다.

by 중은우시 2013. 8. 7.

글: 예방육(倪方六)

 

2013년, 중국은 다시 무더운 여름을 맞이했다.

 

더위가 한번 지나가더니, 다시 더위가 몰려왔다. 이전에 매체에서는 전국이 43개 시,현의 일일 최고기온이 40도를 넘어섰으며, 많은 지방이 '불가마'모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새로운 더위가 다시 한번 중국전역을 덥칠 것이다. 현대와 비교하면, 고대의 여름은 얼마나 더웠을까? 믿을지모르겠지만, 어느 한 해에 북경에서는 1만여명이 더위로 죽은 적도 있다.

 

기상학적으로, 일일 최고기온이 35도이상이면 고온으로 본다. 만일 여러 날동안 35도이상의 고온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열랑(熱浪)"이라고 부르게 되고, 기상재해에 속한다. 고대인들은 이를 "열재(熱灾)"라고 불렀다. <중국기상재해대전:종합권>의 통계분석자료를 보면, 열재는 다른 재해와 비교하자면 그다지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상재(霜灾)"와 나란히, 총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가량이다.

 

기후학자인 축가정(竺可楨)은 이런 설을 내놓았다; 1900년이전에, 중국의 기후사상 4번의 "온난기"가 있었고, 이에 상응하여 4번의 "한랭기"가 있었다. 기원전1100년이전의 제1온난기의 지속기간이 비교적 길었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3번은 교체출현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열재는 '온난기'에 많이 발생하며, 한랭기보다 확실히 발생빈도가 높다. 수당에서 북송초기까지의 제3온난기에 여름의 극단적인 고온기후가 비교적 많입 발생했다.

 

당나라 정원14년(798년), "봄가을에 큰 가뭄이 들어, 조와 보리가 말라죽었다." <구당서.덕종기>에는 이 해에 "여름에 더위가 심했다(夏, 熱甚")"d

 

오대(五代) 후량(後梁)의 개평2년 6월 신해일(908년 7월 17일), <구오대사.양서.태조기사>를 보면, 이날 "항양(亢陽)"이라고 적고 있다. 그 뜻은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는 말이다.

 

이런 극단적인 날씨는 북송초기에 비교적 많았다. 송나라때의 시에서 그에 관한 묘사가 많다. 예를 들어, 공무중의 <복중작이수>에는 '혹서이순일(酷暑已旬日), 훈자세자여(熏炙勢自如)"라고 적었고, 진조의 <입추일>에는 "혹서여혹리(酷暑如酷吏), 경각불가대(頃刻不可對)"라고 하였다...

 

송나라 지도2년(996년), "육월, 대열(大熱), 민유갈사자(民有渴死者)"; 송나라 경덕원년(1004년) 4월 정묘일에는 "융서(隆暑)"라고 적고있고, 육월에는 "인다갈사(人多渴死)"라고 적었다.

 

1400년이전에, 고온열랑날씨가 가장 널리 미친 것은 남송 가정8년(1216년)의 일이다. 당시의 황제인 조확(송녕종)이고, 지금의 하남, 안휘, 강소, 호남등 성에서 모두 열재를 당한다. 이 해는 마침 큰 가뭄을 맞이하여, 재해상황이 심각했다. <송사.오행지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오월대욱(五月大燠), 초목고고(草木枯槁), 백천개갈(百泉皆竭)"(오월에 크게 더웠다. 풀과 나무가 말라죽고, 샘물은 모두 말랐다).

 

"오"의 원래 뜻은 따뜻하다는 것이다. 사서에서 "대오"라는 것은 "너무 덥다(熱)"는 말이다. 물에 대한 수요가 왕성하여, "길거리에서 물 한말이 백전을 하며, 강회지역에서는 한잔 물이 수십전을 한다" 현재로 함라자면 물 한잔이 10위안이라는 것인데, 당시의 백성들은 수입도 낮아서 어찌 이렇게 '비싼'물을 마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목말라 죽은 자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8년이 역사상 가장 더운 날은 아니었다. 사상 가장 더웠던 여름은 건륭8년, 즉 1743년이다. <중국삼천년기상기록총집> 제3권 "청대기상기록(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해의 고온은 거의 중국의 절반 지역에 미친다. 북경, 천진, 하북, 산서, 산동등 저체 화북지역은 이상고온현상을 보인다. 엄청나게 더웠다. 건륭8년의 극단적인 더위에 관한 기록은 해당지역의 지방지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그중 몇 가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북경: "육월 병진일(7월 25일), 경사가 더위가 심했다(京師威暑)"(<속동화록>)

천지: 오월에 아주 더웠다(五月苦熱). 토석개초(土石皆焦), 위정류금(桅頂流金), 인다열사(人多熱死)" (동치<속천진현지>)

하북고읍: "오월이십팔일(양력 7월 19일)에서 유월초육일(양력 7월 26일)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담장밑의 그늘까지도 불쏘시개처럼 더웠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는 납과 주석도 녹였다. 사람들이 많이 목말라죽었다.(민국<고읍현지>)

산서부산: "여름 오월 크게 더웠다. 도로의 행인들중 죽은 자들이 많았다. 경사는 더욱 심했다. 부산 사람으로 북경에서 무역을 하는 자도 더워서 죽은 자가 있다."(건륭<부산현지>)

산동고청: "가뭄이 천리에 미쳤다. 실내의 기구는 모두 뜨거웠다. 바람에 뜨거워진 나무가 서남으로 향해서 죽은 경우가 많았다. 육월, 천진의 남쪽 무정부에서 도망쳐 오는 자가 많았는데, 길에 사람들이 많이 죽어있었다."(건륭<청성현지>)

 

이를 보면, 당시에 전체 화북지구는 완전히 '불가마'모델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속동화록>에는 "위서"라는 말을 써서 당시의 고온을 표시했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 위력이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같았고, 기세가 흉험했었다.

 

이해의 여름에, 북경의 상황이 가장 참담했다. 당시의 프랑스 전도사인 A. Gaubil(중국명은 宋君榮)이 마침 북경에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파리로 보낸 목격보고서에 따르면, "북경의 노인이 말하기를 1743년 7월같은 고온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7월 13일이래 더위를 참기 어렵게 되었고, 많은 가난한 자들과 뚱뚱한 자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은 보편적인 공황을 불러왔다. 이들은 왕왕 도련 죽었고, 그 후에 길위, 거리 혹은 실내에서 발견된다. 많은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당시 북경에서 몇 명이나 더위로 죽었을까? 송군영은 당시 조정관리의 통계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7월 14일부터 25일까지, 북경근교와 성내에서 이미 11400명이 더위로 죽었다." 실제 더위로 죽은 사람은 이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까지 추가하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 가장 더웠던 여름의 온도는 얼마나 높았을까? 중국기상국기후센터 기후연구실 주임이자 기후변화연구수석전문가인 장더런(張德仁)의 연구에 따르면, 1743년 7월 20일에서 25일가지 기온치는 모두 40도를 넘었고, 그중 7월 25일의 온도치가 가장 높아서 눌라울 수준인 44.4도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극단적인 고온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민국31년(1942년)과 1999년의 여름은 화북에서 두 번의 극단고온기록을 세웠는데, 각각 42.6도와 42.2동ㅆ다. 모두 건륭8년보다 2도정도 낮았다.

 

통계에 따르면, 1911년이전의 1000년간, 중국역사상 전형적인 "염하(炎夏)"는 19번 있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고온기후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송나라때 사람인 석자익(釋子益)의 선택은 "북창일침흑첨여(北窓一枕黑甛餘), 세청송풍잡류수(細聽松風雜流水)"(黑甛은 잠을 잔다는 뜻이다)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인들이 더위와 싸우는 방식이다. 당연히 조정에서도 상응한 피서조치를 취했다.

 

비록 고온에 대한 경보시스템은 멊었지만, 관청은 백성들의 외출과 일을 줄이도록 해주었고, 재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더운 여름을 견디도록 했다. 예를 들어, <송사.진종기이>의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경덕4년(1007년)에는 "육월, 아주 더웠더(盛暑). 경성의 일꾼의 일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주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황제 조항(송진종)이 친히 성지를 내려 경성의 근로자들의 일일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주었다는 말이다.

 

"열재"가 발생할 때, 어떤 왕조에서는 자선과 구제활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당나라 정원14년, 조정은 "태창의 조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휼했다; 사상 가장 더웠던 건륭8년이 여름, 건륭제는 관련관리에게 부조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한다. 북경의 거리와 성문에 약물을 놓아두어, 더위중독과 사망을 감소시키고자 했다.

 

그외에 과거에는 미신도 있었다. 극단적인 날씨가 나타나면, 하늘이 인간군주에게 경고와 징벌을 내리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어떤 황제는 스스로의 시정과실을 반성하였다. 하나는 자신을 징벌하여 음식을 줄였다. 소위 '감선(減膳)"이다. 예를 들어, 북위 정광3년(522년) 육월의 "염한(炎旱)"때, <위서.천상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황제인 원후(元詡)(효명제)는 "감선"을 했다. 둘은 "여수(慮囚)"이다. 즉 심리중인 죄수를 재심하여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을 바로잡는 것이다. <신당서.고종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치(당고종)이 황제가 된 건봉2년(667년) 칠월, 날씨가 이상하게 덥고, 가뭄이 심했다. 이치는 "감선"외에 "견사려수(遣使慮囚)"했다.

 

황제까지도 '반성'하는데, 만일 담당관리가 고온인 시기에 과실이 있거나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문책받는다. 당나라 정원14년 여름, 황제 이적(당덕종)은 독직과실을 범한 경조윤(京兆尹) 한고(韓皋)를 삭탈관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