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주판(籌板 혹은 珠板)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중은우시 2016. 11. 6. 01:48

글: 이후굉(易厚宏)





전자계산기의 보급과 더불어 전통적인 주판(중국에서는 算盤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가끔 노인들 중에서 주판을 가지고 계산하기도 한다. 다만 1990년대이전의 기나긴 역사에서, 주판은 인류의 계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고대중국인들의 지혜의 결정체였다. 주판은 중국고대의 "산주(算籌)"가 발전하여 만들어 졌다. 통상적으로 돈을 계산할 때 썼다. 그렇기 때문에 주판은 중국에서 초재진보(招財進寶)의 뜻이 있다. 부귀를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설사 전자계산기가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오늘날에도, 주판은 여전히 간편하고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어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주판은 중국의 주산(籌算)에서 발전한 것이다. 중화민족의 인류문명에 대한 하나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주산"은 바로 산주(算籌, 작은 대나무 막대기)로 수를 헤아리는 것이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루트등을 계산한다.


중국최초의 천문학, 수학저작인 <주비산경(周髀算經)>을 보면 "주산"이 최소한 춘추시대에 널리 응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宋)나라때는 이미"주산(籌算)"의 제법가결(除法歌訣)"이 나온다. 그리고 명나라때 수학자 오경착의 <산법십전>에는 이미 "산반"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채용했고, 널리 쓰였다. 15세기 중엽에 산반을 논술한 저작이 이미 상당히 많아졌다. 산반은 계산이 편리하여, 전후로 일본, 한국, 인도, 미국, 동남아등 국가로 전파되어 널리 환영받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언재부터 산반이 있었을까? 청나라때부터 여러 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해왔지만, 문헌이 부족하여 학자들은 여러가지 학설로 나뉘고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한대설, 당대설, 송대설, 원말명초설로 나눠볼 수 있다.


(1) 한대설(漢代說)


일부학자들은 일찌기 동한(東漢)시기에 사람들은 이미 산반을 발명했다고 본다. 동한의 수학자 서악(徐岳)의 <수술기유(數術記遺)>에 이런 기록이 있다: "주산(珠算), 공대사시(控帶四時), 경위삼재(經緯三才)" 이 책에서 서악은 14종의 산법을 기록한다. 그리고 제13종 산법은 바로 '주산'이다. 북주수학자 견란(甄鸞)은 이 문자에 대하여 상세한 해석을 한다: "판을 깍아서 셋으로 나누고, 그 위와 아래를 둘로 나누어 구슬이 멈추고 움직이게 하고 중간의 나누는 것은 계산단위를 정하는 것이다. 각각 5개의 구슬을 두는데 위의 1개 구슬과 아래의 4개 구슬은 색으로 구분한다. 위의 다른 색의 구슬은 5로 치고, 그 아래의 4개 구슬은 각각 1개로 친다. 아래에서 4개의 구슬이 이끌므로, "공제사시'라고 했고, 구슬이 삼방의 가운데에서 움직이므로 '경위삼재'라 했다." 청나라때 수학자 매계조, 현대학자 주영무등은 <수술기유>가 주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본다.


일부학자는 이에 이견을 표시한다. 이런 견해의 논거가 불충분하고, 다른 논거가 없어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술기유>가 위작인지 여부에 대하여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대부분 학자는 이 책의 기록은 그저 일종의 수계산도구 혹은 단지 가감법을 하는 간단한 산판일 뿐이라고 본다. 나중에 나타난 주산과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이다. 설사 <수술기유>가 정말 한나라때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현대주판의 기원을 한나라때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당대설(唐代說)


현대학자 여개석(余介石), 은장생(殷長生), 이배업(李培業)등은 당나라중기이후 상업이 사상유례없이 번영했고, 기존의 계산방법으로는 현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주산은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청명상하도>의 '산반도'는 바로 당대설을 지지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이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대화가 장택단의 대표작이고, 중국전통의 청명절을 테마로 하여, 생동감있게 북송의 경성 변량 및 변하 양안의 번성한 광경과 자연풍경을 재현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청명상하도>에 한 약포가 그려져 있는데, 약포의 궤대(櫃臺)위에 현대의 주산과 형태가 유사한 물건이 놓여 있다.


일부 학자는 이를 근거로 추단한다. <청명상하도>는 비록 송나라때 나왔지만, 그러나, 이 그림에 나타난 산반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도구일 것이고, 상당한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1921년, 하북 거록현에서 송나라때의 목제 편원형 산반주(算盤珠)가 출토되었는데, 중간에 구멍이 있고, 형태에서 이미 비교적 성숙되어 있어서 새로 나타난 물건은 아닐 것이다. 송나라이전의 오대십국은 전란이 빈번하고, 백성의 생활이 힘들어서 과학기술문화의 발전이 비교적 늦었으므로 산반이 이때 탄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산반의 탄생을 당나라때로 추단하는 것이다.


(3) 송대설(宋代說)


일부 학자들은 주산이 송나라때 출혀했다고 본다. 송대설을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청나라때의 매각성, 능정감, 현대의 화인춘, 장복한 등이 있다.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청명상하도>와 거록에서 출토된 산바주를 주요 논거로 하여 당대설은 억측인 부분이 많다고 본다. 송대설이 오히려 신뢰성이 있다고 본다. 송말원초의 유인은 그의 <경수선생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부작옹상무(不作瓮商舞), 휴정병씨가(休停餠氏歌), 집주잉폐록(執籌仍蔽簏), 신고욕여하(辛苦欲如何)" 시인은 주산을 빌어, 자신이 명리에 담백하고 개인이익을 계산하지 않으려 하는 사상을 표현했다. 송나라때의 <고금도서집성. 사찰미산경>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중(中), 산반지중(算盤之中), 상(上), 척량지상(脊梁之上), 우위지좌(又位之左), 하(下), 척량지하(脊梁之下), 우위지우(又位之右), 척(脊), 반중횡량격목(盤中橫梁隔木),상총(商總), 합용상개지법어반중(合用商開之法於盤中)", 이외에, 명나라때 정대위의 주산명저 <산법통종>의 권말에 "산경원류"부분에는 송나라때 출간한 주산서 <반주집>과 <주반집>을 싣고 있다. 이들은 모두 북송때 이미 산반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4) 원대설(元代說)


일부 학자들은 산반이 원나라때 출현했다고 본다. 원나라때 도종의의 <남촌철경록. 정주>에 이런 기록이 있다: "무릇 노비를 들일 때, 처음 오면 '뇌반주(擂盤珠)라고 부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인다. 조금 지나면 산반주(算盤珠)라고 한다. 말을 해야 움직인다. 오래되면 불정주(佛頂珠)라고 부른다. 하루종일 가만히 있으면서 말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도종의는 노비를 산반주에 비유해서 건드려야 움직인다고 하였다. 원초의 화가인 왕진붕은 원나라 지대3년(1310년)에 그린 <건곤일담도>에서 담자(擔子)에 현대적인 모양의 주판이 그려져 있다. 그외에 원초의 몽골어교본인 <신편상대사언>에는 구당(九檔)의 산반도(算盤圖)가 있다. 이들은 모두 산반이 원나라때 출현한 명백한 증거라고 본다. 산반은 당시에 이미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5) 명대설(明代說)


일부 학자들은 산반이 명나라때 나타났다고 본다. 이는 명나라때 주산에 관한 논저가 많기 때문이다. 영락연간에 편찬한 <노반목경>에는 산반의 규격, 척촌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외에 서심로의 <산주산법>, 정대위의 <직지산법통종>등의 책에서 모두 산반을 도구로 하는 주산의 용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우리는 산반이 명나라때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대설은 과거에 많은 주산사가들의 비교적 일치된 견해였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로서는 주로 청나라때의 학자 매문정, 현대학자 진보정과 일본학자 황목훈(荒木勛)등이 있다. 그러나, 연구가 심화되면서 현재는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주산은 중화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그의 기원시기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추가로 연구하고 탐색하여 하루빨리 결론이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