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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959년 주덕(朱德)은 왜 국가주석직을 사양했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13.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1957년 4월 30일, 모택동은 처음으로 당외인사에게 그는 다음번 국가주석을 맡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범위내에서 이 소식을 퍼트려주어 '약간의 바람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한다.


1959년 4월 2일, 중공8기 7중전회가 북경에서 거행된다. 이번 전체회의는 실제로 중공중앙이 곧 개최될 제2기전인대의 기조를 결정하기 위함이다. 그중 한가지 중요한 의제는 바로 제2기전인대에 추천할 국가지도자명단이다. 새로운 국가주석을 누구로 할 것인지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중국고위층가운데, 국가주석을 맡을 사람은 몇 사람이 있었다. 중앙서기처에서 초보적으로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주덕과 유소기의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


통상적인 방법대로라면, 모택동이 연임하지 않을 때, 전기 국가부주석인 주덕이 승계하는 것이 가장 순리적으로 보인다. 사실상, 중공고위층과 당외민주인사들도 보편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전에, 제2기전인대를 소집준비할 때, 중앙조직부와 통전부는 중앙서기처의 위탁을 받아, 제2기전인대상무위원회 국가지도자후보자명단을 작성하여, 중앙의 일부 주요책임자들에게 돌려 의견을 듣는다. 이 명단에는 여전히 유소기를 전인대상무위원회위원장 후보로 나열했고, 국가주석후보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정보를 나타낸다: 유소기는 전인대상무위원회위원장에 유임된다. 그렇다면, 국가주석후보자는 당연히 주덕이다.


이에 대하여 주덕은 깊은 생각에 빠지고, 모택동과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린다.


중국혁명과 건설과정에서, 주덕의 이름은 모택동의 이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28년 4월 정강산회사(會師)이후, 모택동, 주덕의 영도하에 장기간의 혁명전쟁의 단련을 거쳐, 인민해방군은 점차 인민의 혈육과 서로 연결되고, 굳건하여 쓰러지지 않는 대오로 성장했다. 신민주주의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사회주의건설을 보위하기 위하여,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공헌을 한다.


기나긴 여정에서, "주모(朱毛)"의 기치는 혁명자들에 의하여 공동으로 높이 들려졌고, 주덕과 모택동 본인은 "주모"를 일종의 단결의 상징으로 보았다.


1935년 1월, 장정 도중에 역사전환적인 의미가 있는 준의회의에서, 주덕은 모택동의 주장을 굳건하게 지지하고, '좌경'군사모험주의자들의 잘못을 비판한다. 1935년 6월, 주덕과 모택동은 홍1방면군은 장국도가 이끄는 홍4방면군과 장정하는 도중에 만난다. 홍군이 사천,감숙의 경계선까지 행진하였을 때, 장국도는 핑계를 대고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부대를 이끌고 남하할 것을 기도한다. 또한 홍4방면군과 함께 행군하던 주덕에게 성명을 발표하여 모택동의 소위 "우경도피노선"을 비판할 것을 요구한다. 주덕은 장국도의 위협과 유혹에도 전혀 타협하지 않고, 명확하게 "주모, 주모, 사람들은 주모를 한 사람으로 본다, 주가 어찌 모에 반대한단 말인가. 너희는 나를 둘로 나눌 수는 있지만, 나와 모택동의 관계를 잘라버릴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사후에 모택동은 이 일을 알고나서 깊이 감동한다. 주덕은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고, 의지가 강철처럼 굳다"고 말한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기 국가주석이다. 신중국이 국가주석직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주장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때, 대륙은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고, 전쟁상태였다. 그리하여, 국가주권과 영토완정을 상징하는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은 계속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1954년 9월 27일, 제1기 전인대는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철폐하고, 동시에 국가주석을 둘 것을 결정한다. 모택동은 그의 당내외, 국내외에 유일무이한 역사적 지위와 아무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위망을 지니고 있어 중화인민공화국 제1기 주석에 당선된다. 덕고망중(德高望重)의 주덕은 국가부주석에 당선된다.


몇년 후, 모택동은 여러번 주덕등에게 말한다: "국가주석의 직무를 벗고, 당의 주석에 전명하겠다.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을 남겨서 당이 나에게 요구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신체상황에도 비교적 적절하다." 주덕은 장기간 모택동과 조석으로 함께 했고, 그의 성격과 품성을 잘 알았다. 유소기, 주은래, 주덕과 등소평등은 모택동의 고충을 잘 이해했다. 그들은 당내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설득과 해석을 하여, 마침내 당내에서 모택동이 국가주석을 연임하지 않는 문제에 컨센서스를 얻어낸다. 1958년 10월, 제2기 전인대가 개최되기 전에, 중공중앙은 모택동의 뜻에 따라, 중공8기 6중전회에서 <모택동동지가 제출한 그가 다음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후보자가 되지 않는 건의에 동의하는 결정>를 한다.


누가 제2기 국가주석에 오를 것인가. 모택동은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해달라"고만 말했다. 주덕은 중앙서기처가 보내온 제2기전인대상무위원회 국가지도자후보자 명단을 본 후에, 중앙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다. 1958년 12월 29일, 주덕은 붓을 들어 중앙서기처 총서기 등소평에게 서신을 한통 쓴다. 간절한 언사로, "소평동지, 서기처동지여러분에게 전해주십시오:  나는 유소기 동지가 국가주석 후보자가 되는 것이 더욱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나의 업무는 역대이래로 당의 안배에 따랐고, 무슨 일을 시키면 그것을 했습니다. 전혀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후 일련의 공개적이거나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는 여러번 자기는 모택동보다 나이가 7살이나 많고, 그가 모택동을 이어 국가주석에 오르는 것은 정리에 부합되지 않고, 당과 국가의 사업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재삼 유소기를 추천한다. 중공중앙은 주덕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중앙전회는 일치하여 유소기를 중공중앙에 제2기전인대에 제출할 국가주석후보자로 동의하고, 주덕은 전인대위원장후보자로 한다.


1959년 4월 5일, 등소평은 제8기 7중전회에서 정치국을 대표하여 국가기구인사배치방안에 대한 보고를 한다. 유소기를 국가주석후보자로 제안하는 결정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주석은 몇 명의 동지들이 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덕동지, 예를 들면 당내의 몇몇 노동지들이 모두 맡을 수 있습니다. 다만 모두 고려한 결과는 유소기동지가 이 직무를 맡는 것이 비교적 더욱 적합하겠다는 것이비다. 국가주석은 단순히 높은 영예직무일 뿐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이고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출국, 회담, 접대등등. 그래서 유소기동지의 능력과 자질, 그가 현재 당내에서 맡고 있는 책임을 보면 그가 국가주석의 직무를 맡는 것이 비교적 좋습니다."


등소평은 회의에서 특별히 주덕의 공적을 언급한다. 그는 말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주덕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팔로군총지휘(18집단군총사령관)을 맡았다. 일본침략군이 중국에 대규모 진공을 하여 전황이 아주 위급할 때, 주덕은 팔로군을 이끌고 황하를 동으로 넘어, 화북항일전선으로 간다. 1940년까지, 팔로군, 신사군은 4만명에서 50만명으로 발전한다. 적의 후방 해방구 전장은 점차 항일전쟁의 주전장으로 발전했다. 1940년 5월, 주덕은 전방에서 연안으로 돌아와서, 모택동을 도와 전국 각 해방구전장의 항일전쟁을 지휘한다. 해방전쟁시기에 주덕은 친히 석가정전투를 기획하고 진행을 지도한다. 처음으로 적의 견고하게 방어공사를 한 도시를 함락시킨 것이다. 그리고 전군에 석가장공성전의 경험을 보급한다. 전략결전단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모택동을 도와 요심, 회해, 평진의 3대전투를 지휘한다. 1949년 4월, 모택동주석, 주덕총사령관은 <전국을 향한 진군명령>을 내린다. 신중국성립후, 주덕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공신으로, 당,국가 및 군대의 주요지도자로서의 직무를 거쳤다. 1955년,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의 계급을 받는다. 모택동은 이어 소집된 16차 최고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덕 동지는 아주 명망이 있고, 소기 동지도 아주 명망이 있다. 왜 이것이고 저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 공산당내에서 일을 주재하는 것은 나도 한 명이다. 다만 나는 일상사무는 관여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약간 관여하고 어떤 때는 관여하지 않는다. 자주 관리하는 것은 누구인가? 소기 동지이다. 내가 북경을 떠나면, 모두 그가 나를 대리하여 일한다. 연안에서부터 이러했다. 현재 북경에 와서 이미 10년이 되었다. 그가 국가주석을 맡은 것은 비교적 적합하다. 동시에 주덕동지도 극력 소기 동지를 추천했다." 모택동은 특별히 "우리의 주노총(朱老總)"이라고 언급하며, 계속하여 그가 '도량이 바다와 같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당내외인사들에게 모두 주덕을 배우라고 말한다.


1959년 4월 27일, 제2기 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유소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당선되고, 주덕은 전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