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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왕태후(王太后): 한 여인의 복수사

by 중은우시 2015. 6. 5.

글: 조염(趙炎)

 

서한(西漢)의 몇몇 유명한 태후의 이력을 살펴보면, 왕씨(王氏)와 박씨(薄氏)가 가장 비슷하다. 예를 들어, 재혼은 했고, 강호술사의 영향을 받았고, 신비스러운 꿈을 꾸었으며, '첩에서 태후에 올랐다'는 등등이 있다. 개인노력으로 말하자면, 그러나 전혀 다르다. 박씨는 아무 생각없이 버드나무 가지를 심은 것이 큰 버드나무로 자란 형국이다. 그녀는 소극적으로 대응했지만,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것이다. 왕씨는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서를 보면 은연중에 이런 내용을 말해준다. 그녀는 '복수'를 위하여 태어났다.

 

이야기는 기원전202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 한고조는 항우의 옛부하를 대거 죽여버린다. 그래서 연왕(燕王) 장도(臧荼)는 불안에 빠진다. 4년전, 그는 항우의 지지하에 한왕광(韓王廣)을 토벌해 죽였다. 만일 옛 빚을 따진다면 그는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이 달아난다. 장도에게는 장연(臧衍)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친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을 지녔다. 일찌기 '순망치한'의 이치를 가지고 노관(盧綰)의 사절 장승(張勝)을 설득하기도 했고, 흉노의 힘을 빌리려고도 했으며, 진희(陳豨)를 도와 유방과 끝까지 싸우려고도 했다. 책략은 고명했고, 파괴력을 지녔지만, 장연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그가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누군가 승계하였을까? <사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태후, 괴리(槐里) 사람이고, 모친은 장아(臧兒)라고 한다. 장아는 고 연왕 장도의 손녀이다." 이 장아가 반드시 장연의 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조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장아모녀의 이후 행위를 보면, 구천지하의 장도, 장연은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누가 딸이 아들만 못하다고 말하는가.

 

장아는 먼저 왕중(王仲)에게 시집가서 1남2녀를 낳는다. 왕씨의 딸이 첫째였다. 왕중이 죽은 후, 장아는 전씨(田氏)에게 개가하여 전분(田蚡), 전승(田勝)을 낳는다. 세월이 흘러 왕씨가 장성하자 먼저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가고, 딸을 하나 낳으니 이름이 김속(金俗)이다.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관상을 보는 관상쟁이는 그녀의 생활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장아가 점을 쳐보니, 두 딸이 모두 귀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딸을 김씨에게 빼앗아 온다" 모친이 딸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도록 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골육간에 생이별을 하게 만들다니 그것은 누군가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김씨는 노하여, 헤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부부 사이는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딸이 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모친으로서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왕씨는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담담하고 차분했다. 모친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신의 후손이 황궁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신념이 굳건한 복수자의 앞에 이는 전혀 문제로 되지 않는다. 장아모녀는 '정보'를 얻어낸다. 태자(한경제)가 여색을 좋아하고, 장공주가 가장 열심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조건이 좋았다. 그래서 관계를 동원하고 부탁하여, 왕씨자매는 전후로 태자의 침상에 오른다. 이제 복수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한경제가 즉위한 다음 해, 유철(한무제)이 출생한다. 이때 유영은 일찌감치 태자였다. 이는 왕태후(당시에는 왕미인이라 칭함)의 심정은 왕유의 시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행도수궁처(行到水窮處), 좌간운기시(坐看雲起時)"(물이 끊어지는 곳까지 걸어가고,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만일 노력하지 않고,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면 가장 좋은 결말은 번왕의 태후였을 것이다. 어찌 '복수'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헛된 이름만 얻느니, 일어서서 노력하여 추구해야 한다. 그녀는 율희를 공격한 세 번의 도끼질은 이렇게 귀납시킬 수 있다: "꿈에 해를 배에 품다(夢日入懷)",  정략결혼 그리고 나쁜 지슬 남에게 떠넘기기. 궁중투쟁의 실력을 드러낸 것이다.

 

왕씨의 일련의 조치하게 유철의 정치적 지위는 신속히 상승하고, 4살에 교동왕이 되며, 7살에 황태자에 오른다. 14살에는 황제로 즉위한다. 모친은 자식이 잘되면 같이 잘되는 것이다. 그녀 본인은 황후 내지 황태후가 된 후, 더욱 적극적으로 조정에 관여하고, 외척세력을 심어 둔다. 그녀는 모친 장아를 평원군(平原君)에 앉히고, 여동생의 네 아들도 모두 왕에 봉한다. 딸 김속은 수성군(修成君)이 된다. 외손녀는 회남왕의 태자에게 시집을 간다. 오빠인 왕신(王信)은 개후(蓋后)가 되고, 동모이부의 두 동생도 각각 후(侯)에 봉해진다. 전분은 무안후(武安后)가 되고, 전승은 주양후(周陽后)가 된다. 전분은 나중에 한무제의 재상이 된다. 실로, "일인득도(一人得道), 계견승천(鷄犬昇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무제가 친정을 한 전후 10여년간, 조정의 귀족은 모조리 연왕 장도의 후손들이었다. 한무제의 강산에서 절반은 유씨가 아니어던 것이다.

 

왕씨기 성공을 거둔 후, 이미 죽은 왕중을 공후(共侯)에 봉하고, "원읍(園邑) 이백가(二百家)를 준다" 모친 장아의 두번째 남편, 즉 그녀의 새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작위도 내리지 않는데, 이는 생부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니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가련한 김왕손도 책봉을 받아야 했다. 후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일은 덮어둔다. 이를 보면 한 사람이 당당하고 자신있게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이 '복수'극 중에서, 왕씨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의 모계 구성원들을 따져보면 사료에서 거의 좋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도의 후예들이 '집단으로 몰려와서' 유씨를 해친 것같다. 예를 들어, 개후 왕신은 술을 좋아했고, 전분, 전승은 탐욕이 심했다. 왕신은 술을 좋아하지만 보복심리도 강했다. 명장 주아부(周亞夫)의 죽음은 그에게 일부분 책임이 있다. 전분은 용모가 추악하며, 전혀 절제하지 못했고, 교만방자하며 전횡했다. 적지 않은 양신맹장을 해친다. <한서>에는 김속의 아들의 악행도 적고 있다. "수성의 아들 중(仲)은 태후와의 관계를 믿고 경사에서 횡행했다"

 

아마도, 왕태후는 그녀가 친정식구들이 돈에 탐욕을 내고, 몇 가지 법을 어기고, 몇 사람을 해치게 되면, 한왕조는 공평과 정의를 잃고, 인심을 잃으며, 결국 유씨강산이 끝장날 것이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복수'의 숙원을 달성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본사실을 망각했었다. 청렴결백하고 대공무사한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그리하여 정치생태에서는 자정능력이 있고, 비바람에 버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원삭3년, 왕태후가 붕어한다. 그녀의 '복수사'도 끝이 난다. 그러나, 한왕조는 아직 중천에 뜬 해와 같이 사방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