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삼국간의 전투를 살펴보면, 적벽대전에서 서진이 촉한과 동오를 멸망시키고 통일할 때까지, 삼국간의 전쟁은 거의 멈춘 적이 없다. 기산에서 형주까지 그리고 합비까지의 길다란 전선이 있지만, 삼국이 다투는 진정한 촛점은 기실 '형주'였다. 기의 절대다수의 전쟁은 형주의 지배권장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조조와 주유의 적벽대전부터 시작하여, 관우가 일으킨 양양전투는 최종적으로 동오와 촉한의 여러해동안의 전쟁을 끝냈다. 나중에, 육손의 4차북벌에서도 마지막에는 강하(江夏)야말로 동오와 조위간에 서로 다투는 촛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힘을 다하여 업성을 함락시키고, 업성을 재건하고, 3만의 병력을 보내어 지키게 된다. 삼국말기, 육항과 양호가 일으킨 서릉전투도 핵심은 형주의 지배권을 다투는 것이었다.
삼국이 서로 접경하는 길다란 국경선에서 왜 형주가 쟁탈의 촛점이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형주가 삼국상쟁의 촛점이 된 것의 근본원인은 3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형주는 당시 중국의 중심지역이다. 교통요지이다. 삼국시대때 형주는 기실 아주 넓었다. 현재의 호북 형주지구만이 아니다. 북으로는 섬서성 한중일대부터, 남으로는 호북, 호남, 강서의 각 일부분까지 포함한다. 남북을 관통하고 동서를 연결시키며 지세는 평탄하고, 운수는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신속히 동서남북을 종횡할 수 있다. 동으로는 동오를 위협할 수 있고, 서로는 사천, 서역으로 쳐들어갈 수 있고, 북으로는 흉노등 북방정권을 억누를 수 있으며, 남으로는 바다로 나갈 수 있어 신속히 천하를 정복할 수 있다. 형주를 가지면, 천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형주는 삼국의 필쟁지지가 된 것이다.
둘째, 형주는 당시에 경제가 발달한 지역이다. 당시 천하의 분쟁에서 유표는 기본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형주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형주는 북으로는 한중평원이 있고, 가운데에는 강한평원이 있고, 남으로는 동정호평원이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과학기술은 발달되어 있었다. 형주를 가진다는 것은 전쟁을 이기는데 필요한 기반을 갖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이 있고, 물자가 필요하면 물자가 있고, 교통이 필요하면 교통이 있다. 당시,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유비에게 헌책한 것은 바로 형주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당시 유비가 천하를 다투려는 꿈은 바로 두 가지 노선에서 출발한다. 동으로는 형수, 서로는 기산. 아쉬운 것은 손권이 형주를 꽉 물고 놔주려 하지 않았다. 주유이건 노숙이건 모두 형주를 근본으로 보았다. 손권과 유비의 초기 갈등은 남형주에 집중된다. 관우가 일으킨 양양전투는 기실 형주의 주권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관우는 실수하여 형주를 잃는다. 이로 인하여 유비는 이릉지전에서 참패한다. 결국 제갈량의 양쪽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려는 꿈이 물거품이 된다. 동오와의 연맹을 잘 이용해야만 했고, 단일하게 기산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이는 제갈량이 최종적으로 거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근본원인이다. 적벽대전은 기실 삼국이 형주를 나눠가지는 전투였다. 삼국정립의 국면은 실제상 형주를 서로 나눠가진 것때문이다. 누구도 형주를 완전히 점거하지 못했다. 나중에 삼국분쟁은 모두 형주의 중요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전쟁은 기실 형주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유비와 조조의 한중지전도 기실 북형주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싸움이다.
셋째, 형주를 가지는 것은 장강의 천험의 요새의 전쟁발동기를 보유하는 것이 된다. 삼국시대는 냉병기시대이다. 장강 한줄기는 천험의 요새이다. 조조가 최종적으로 남하할 수 없었던 것은 적벽대전에서 대패하였기 때문이고, 근본원인은 장강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오가 보존된 근본원인이다. 그래서 형주를 갖는 것은 실제로 전쟁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나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방어할 수 있다. 적군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설사 실력차이가 크더라도, 대치국면은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중기, 동오의 육손은 형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쟁을 어디에서 시작하든, 모두 형주를 꽉 잡고 있었다. 이는 동오가 매번 전투에서 감히 너무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한 근본원인이다. 매번 겨우 3만가량의 군대를 동원한다. 동오는 모두 평원이므로 지킬 험준한 요새가 없다. 유일한 방어벽은 장강이다. 그래서 설사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대량의 군대를 보내어 장강을 지켜야 했고, 형주를 지켜야 했다. 그래야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장강에 의지하여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동오가 계속 남형주를 점거한 근본원인이다. 설사 촉한이 멸망하더라도 동오는 10여년을 더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후주 손호의 능력이 너무 약하지 않았더라면, 삼국귀진(三國歸晋)이 어느 때가 되어야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후기에 이르러서도, 육항은 3만군대로 서릉에서 양호의 10여만군대를 격패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오가 남형주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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