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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거의 패전이 없는 육손(陸遜)의 4차북벌

by 중은우시 2016. 6. 30.

글: 정정(丁丁)


삼국시대에 제갈량의 5차북벌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이다. 비록 제갈량의 5차북벌 가운데 승전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제갈량의 뛰어난 군사능력에 감탄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패한 원인은 모두 부하가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그것은 부하의 잘못이고, 제갈량과는 관계가 없다. 제1차북벌, 이는 제갈량의 최대의 북벌전투이다. 제갈량은 자오계(子午計)를 세우고, 첫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마속이 가정을 잃고, 결국 제갈량의 제1차북벌은 실패로 끝난다. 제갈량은 결국 읍참마속하게 된다; 제2차북벌, 은 양초(糧草)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위군이 충분히 준비하고 있어 할 수 없이 철수한다. 철수하는 도중에 위나라장수 왕쌍(王雙)을 참한다. 쌍방은 기본적으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제3차북벌, 제갈량이 위연과 오일을 기용하여 방어반격의 전략을 채택한다. 지세를 이용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는 제갈량의 5차북벌중 첫번째 승리이다. 아쉽게도 아주 작은 전투였을 뿐이다; 제4차북벌은 중형규모의 국지전이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최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전과는 풍성했다. 선비족 가비능(軻比能)을 거두고 많은 물자를 획득한다. 그리고 조조의 군량도 빼앗는다. 또한 위나라 명장 장합(張)을 기습하여 죽인다. 특히 사마의를 격패시킨다. 사마의는 이때부터 제갈량을 겁낸다. 전갑(戰甲) 5천, 각노(角弩) 3천을 획득한다. 아쉽게도 이엄의 양초공급에 문제가 생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갈량의 이번북벌은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심지어 조위정권을 뒤흔들 수도 있었다; 제5차북벌, 이는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고, 또한 제갈량이 지휘한 전면전이었다. 아쉽게도 사마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저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고, 안전하게 회군한다. 사마의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제갈량이 철군한 이후 제갈량이 배치한 것을 보고는 자기가 출병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갈량이 최후의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제갈량의 5차북벌중 2번은 전면전이다. 즉 제1차와 제5차이다. 제1차는 전면적 실패이고, 제5차는 제갈량이 최종승리를 거두기 전에 먼저 죽는다; 제2차, 제3차는 국지전의 소형전투이고 한번은 실패하고 한번은 작은 승리를 거둔다. 둘 다 무시할만한 수준이다;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것은 제4차북벌이다. 이는 중형의 국지전이다. 대승을 거두었다. 만일 양초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번 북벌은 아마도 삼국의 국면을 바꾸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내부협조에서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손류연맹(孫劉聯盟)의 또 다른 일방인 동오정권과 촉한정권은 기실 서로 북벌에 협조했다. 그리고 왕왕 서로 호응했다. 또한 동오의 북벌도 횟수가 적지 않다. <삼국지>의 기재에 따르면, 최소한 4차이다. 제갈량의 북벌과 비교하면, 동오정권의 북벌에서 취득한 전과는 기실 훨씬 휘황하다. 특히 촉한북벌과 비교하면, 5차북벌의 총사령관은 제갈량이었지만, 동오정권 북벌의 총사령관은 육손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왕왕 제갈량의 5차북벌만 관심을 가지고, 육손의 4차북벌은 역사의 긴 강물 속에 매몰되어 있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실상, 육손이 지휘한 4차북벌은 매번 직면한 전쟁국면이 서로 달랐다. 그러나, 육손은 거의 모두 담담하게 대응했고, 서로 다른 전쟁장면마다 서로 다른 전략을 쓴다. 제갈량의 5차북벌과 비교하면, 군사지휘재능은 전혀 손색이 없고 심지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몇번은 위기를 반전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게 만들었다.


제1차북벌은 유명한 석정지전(石亭之戰)이다. 당시 손권은 파양태수 주방(周舫)을 조휴(曹休)에게 거짓투항하도록 시킨다. 조휴는 10만대군을 이끌고 환성(皖城)으로 진격한다. 위명제는 사마의에게 대군을 이끌고 강릉으로 출발하도록 명령하고 가규(賈逵)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동관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삼로의 대군이 동시에 진격한다. 보무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기실 동오에서 잘 쓰는 전략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조조에 대승을 거둔 것도 황개가 조조에게 거짓투항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조위는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조휴는 친히 맞이했다. 육손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조휴를 기다리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당시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에 임명했고, 주항, 전종을 좌우도독에 임명해서 각각 3만대군을 이끌고 양쪽에서 협공하도록 했다. 당시의 조휴는 이미 주방이 투항한 것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믿고 육손과 일전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최종적으로 조휴는 육손이 파놓은 포위망에 갇힌다. 아쉽게도 육손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주항이 바친 계책을 듣지 않는다. 비록 조휴는 거의 전멸했고, 참살당하거나 생포된 사람이 1만여명에 이르고, 거의 모든 군수물자를 노획당했으며, 만일 가규가 적시에 지원해주지 않았더라면, 조휴는 아마도 전쟁터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는 해도 조휴는 울화병으로 죽고 만다.


이번 북벌은 손권이 일거에 조위정권을 격패시킬 최선의 기회였다. 아쉽게도 육손은 이 방면에서 준비가 부족했다.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없었다. 만일 주항의 계책을 채택했더라면, 조위의 삼로대군을 전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조위정권을 소멸시키거나 최소한 와해시키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 주유 혹은 제갈량이었다면, 삼국의 흐름은 여기에서 바뀌었을 것이다. 이번 전투는 제갈량에게 계시하는 바가 컸다. 북벌로 조위정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나중에 북벌을 계속 고집한 근본원인이다. 이는 손류연맹이 동서에서 협력한 가장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제2차북벌은 가화(嘉禾) 5년에 발생한다. 손권이 친히 북벌한다. 육손과 제갈근으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한다. 주전장에서 손권의 주력은 전황이 불리하여 손권은 병력을 이끌고 후퇴한다. 제갈근은 그 사실을 알고난 후 강물이 다시 내려가고, 수중에 병사도 얼마 없게 되자, 놀라서 미치려고 한다. 그래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어 빨리 철수하자고 말한다. 이때의 육손은 허장성세를 보이며 우선윤건(羽扇綸巾)을 하고 공성계를 펼친다. 심복 한편(韓扁)을 거짓뜻을 담은 서신을 가지고 손권에게 가도록 하는데 조위군에게 붙잡힌다. 그리하여 조위군은 육손의 군사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다 알게 된다. 그러나 육손은 제갈근의 서신도 본체만체하고, 심복이 붙잡혔는데도 신경쓰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을 보내여 농작물을 재배하게 하고, 부하들과 평화로운 때인 것처럼 바둑을 두고 오락을 즐겼다. 제갈근은 도저히 더 이상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친히 육손에게 가서 상의한다. 이때, 육손은 제갈근에게 걱정할 것없다고 다독이며, 여전히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제갈근으로 하여금 수군을 지휘하게 하고(당시 동오의 수군은 가장 강대하여 수군을 지휘하는게 가장 안전했다), 자기는 육군을 이끌고 양양으로 진군한다.  육손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위군은 육손이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여(한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양양을 공격하자, 그저 쳐다만 보았을 뿐 공격하지는 못했다. 육손은 사냥을 한다고 하면서 암중으로 주준, 장량등을 보내어 강하, 신시, 안륙, 석양등지를 공격한다. 오군이 전면적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위군은 놀라서 급히 성안으로 들어간다.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성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위군은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고 결국 문을 걸어닫을 수 있었다. 겨우 1만의 군대를 가진 육손이 천여명을 참살하고, 안전하게 철수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공성계에 관한 내용은 기실 육손이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