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옥희(花玉喜)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금년 5월 20일, 공안과 민정부문의 어레인지로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공안초대소에서 이혼수속을 처리했다. 전체 과정은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보시라이는 서명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의 착각이 보씨집안 2대를 모두 망쳤다." 구카이라이는 이런 말을 던진다: "이 인생의 악몽은 너무 늦게 끝났다." 이어서 두 사람은 몇번 소리내어 웃었다. 떠날 때 서로간에 인사도 하지 않았고, 작별의 말도 없었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가 각각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확실히 보시라이는 자신이 구카이라이를 봉황으로 착각하였고, 그 결과 구카이라이가 보시라이집안의 2대를 모두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이 2대의 사람은 당연히 보시라이와 그의 아들인 보과과이다. 구카이라이의 말은 분명히 보시라이와의 혼인이 '인생의 악몽'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악몽이 너무 늦게 끝난 것을 한탄했다. 확실히 그들은 모두 그들의 혼인이 잘못된 결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두 사람이 소리내어 몇번 웃은 것은 일종의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는 이별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해탈후의 마음의 평화이다. 더더욱 결연하게 헤어지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두 사람의 혼인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인생 최대의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혼인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른 것일까.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두 사람의 혼인은 실제로 이런 지경에 이르른 것일까? 일찌감치 예상된 것일까? 보시라이사건의 재판현장에서 보시라이가 재판장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구카이라이가 보과과를 영국으로 데려가서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 것은 완전히 그녀가 혼자서 한 일이고, 원인은 그에게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사리이 본인은 산동 지난의 중급법원에서 재판받을 때, 공개적으로 구카이라이와 왕리쥔이 "딱 발라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확실히, 보시라이는 집안의 추한 일까지도 들춰내기를 꺼리지 않았다. 구카이라이와 왕리쥔의 관계까지 공개한 것이다. 보시라이는 다만 구카이라이와의 혼인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왜 이렇게 공개적으로 떠벌였을까? 그들은 누구도 자신의 혼인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단지 권세와 재물을 추구하고 젊고 아름다운 혼인을 추구한 것일까? 일단 조건이 사라지면, 이 혼인은 반드시 붕괴되고 해체되는 것일까?
2013년 8월 26일, 보시라이사건이 지난중급법원에서 진행되었다.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사건의 중요증인이다. 부정부패, 뇌물에 대하여 보시라이는 모조리 부인했고, 책임을 구카이라이에게 떠넘겼다. 구카이라이가 '미쳤다', '정산이 비정상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아마도 이때의 보시라이, 구카이라이는 모두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서로 책임을 미뤘던 것같다. 그러나, 이렇게 책임을 떠미는 것은 그들의 갈등을 격화시켰고,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때 그들의 혼인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보시라이가 "나는 구카이라이에 대하여 애정이 남아 있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보시라이 자신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보시라이가 구카이라이를 계속 속이려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이 부부는 원래 서로 속이는 사람이었다.
기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갈등은 법정에 가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재판과정에서 보시라이는 외도를 인정했다. 바로 이것때문에 구카이라이는 보과과를 데리고 화가나서 해외로 나가버린 것이다. 이때 부터 두 사람의 생활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러 해동안 보시라이는 여가수, CCTV아나운서와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보시라이는 진정으로 이 혼인을 대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구카이라이는 왕리쥔과도 배후에서 관계를 맺고, 영국상인 닐 헤이우드와도 애정갈등의 풍파를 일으킨 것일 것이다.
보시라이와 그의 전처인 리단위의 혼인도 절대 진지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었다. 리단위의 부친은 일찌기 북경시위제1서기를 지낸 리쉐펑이다. 보시라이와 리단위는 고위간부출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장경력은 서로 달랐다. 리단위가 열정적으로 보시라이를 쫓아다닐 때, 보시라이의 모친 후밍은 박해를 받아 죽었고, 형제자매 7명은 속속 감옥에 들어가거나 시골로 내려갔다. 보시라이와 리단위는 1976년에 마침내 혼인이 골인한다. 리단위가 보시라이의 생활에 개입할 때, 보이보(보시라이의 부친)는 해방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된다. 그런데 리쉐펑은 다시 임표집단에 연루된다. 보시라이의 지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보시라이는 리단위에게 싫증을 느낀다. 1981년 보시라이는 리단위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지모에 뛰어난 리단위는 이혼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그녀는 보시라이를 진세미(陳世美)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리고 제3자 구카이라이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전국부녀연합은 공개적으로 보시라이가 얼마나 나쁜지를 얘기하고 리단위는 자신이 현역군인임을 들어 최고법원에까지 군인혼인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북경내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막가파식의 수법으로 어찌 혼인관계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오래끈 이 이혼사건은 4년여를 끌고서야 결말이 난다. 리단위는 4,5살된 아들의 이름을 리왕즈(李望知)로 개명시킨다. 이때부터 리단위는 보시라이와 10년간에 걸친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게 된다. 리단위는 머리를 산발하고, 백만자가 넘는 고발장을 써낸다. 고발장은 보시라이를 따라 금현, 대련까지 냈고, 보시라이가 가는 뒤에 계속하여 '폭탄'을 던졌다.
확실히, 보시라이는 위난시기에 리단위와 함께 했고, 보시라이의 환경이 좋아지자, 리단위는 도태품이 된다. 그러나, 리단위도 어찌 보시라이를 진정으로 사랑했겠는가? 만일 보시라이와 진정 사랑했다면 어찌 보시라이의 명성을 이렇게 깔아뭉갤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보시라이의 명성이 더욱 커지고 대권을 장악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자, 리단위는 전략을 바꾼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녀와 이미 성년이 된 아들 리왕즈가 다시 보시라이의 품으로 돌아간 것같았다. 그리고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의 이혼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녀는 보시라이의 명성을 빌어 스스로 사업을 개시한다. 리단위의 아들 리왕즈는 보시라이의 기치를 내걸고 다롄의 경제계에서 큰 돈을 번다. 확실히 이때의 리단위는 보시라이와의 10년혈투를 잊어버린 것같았다. 이런 리단위는 얼마나 이익에 밝은가. 그리고 명리를 얼마나 추구하는가. 확실히 보시라이와 리단위의 감정도 '공리형'이다.
구카이라이는 해방군 전 정치부부주임이자 신강구위 제2서기를 지낸 구징성(谷景生)장군의 다섯째 딸이다. 보시라이는 이혼전에 이미 용모가 예쁜 구카이라이와 내왕을 했다. 1987년말, 그들 사이에는 아들 보과과가 태어난다. 보이보가 나서서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를 결혼시킨다. 구카이라이는 남편의 기세를 빌어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돈도 많이 긁어모은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한때 서로 사랑하는 '금동옥녀'로 칭송되었다. 보시라이가 출석하는 행사에 항상 구카이라이를 데리고 갔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잠재우려는 겉모습일 뿐이었다.
보시라이와 여가수, CCTV아나운서와의 추문이 계속되자, 구카이라이가 화가나서 아들 보과과를 데리고 해외로 갈 때, 그리고 구카이라이가 왕리쥔, 영국상인 닐 헤이우드와 여러번 애정갈등으로 풍파가 일어났을 때, 보시라이, 구카이라이 그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신중하게 이 결혼을 대하지 않았다. 구카이라이와 영국상인 닐 헤이우드간에 경제분쟁이 생겼을 때는 자신과 감정적인 갈등을 겪던 닐 헤이우드를 독살하기까지 한다. 보시라이, 구카이라이라는 소위 '금동옥녀'는 결국 둘 다 법정에 서는데,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보시라이는 자신의 두 처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에 대하여도 책임을 질 리가 없다. 보시라이는 그저 이런 추문때문에 중공18대 중앙장처국상임위원으로 올라가는데 영햐을 미칠까봐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독수를 쓴다. 경제범죄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친아들인 리왕즈를 체포하여 인질로 삼고, 리단위에게 계속 외부에 그에 대하여 불리한 말을 퍼트리지 말도록 협박한다. 보시라이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삼았다. 이런 보시라이가 어찌 이들 처들과 진정한 애정이 있을 수 있겟는가. 이런 보시라이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확실히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혼인은 그저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은 보시라이의 성격이 냉막하고 냉혹한 것때문일 것이다.
보시라이의 충칭시대는 지나치게 잘난체 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일반인의 인상에서 충칭은 거의 '독립왕국'이었다. 심지어 어떤 민중은 보시라이를 '평서왕(平西王)'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보시라이의 야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일부 보시라이숭배자들은 보시라이의 공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 유치한 것일 뿐아니라 안목이 좁다는 것을 말해주고, 또한 극단적으로 우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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