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일명(劉逸明)
2015년이 시작하는 첫째 날, 보시라이의 장남 리왕즈는 웨이보에 글을 실어, 그가 현재 옥중의 생부와의 관계를 얘기하고, 그의 개인적인 바램을 말했다. 그가 부친의 덕을 보아 이익을 추구했으며 그의 사업은 보씨가족의 빙산의 일각이라는 보도가 나온 후, 리왕즈는 이런 류의 보도에 대하여 부인하면서 5년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이 낙마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일생이 망쳐졌다고 한다.
보시라이의 아들 가운데, 보과과가 가장 유명하다. 리왕즈는 비록 장남이지만, 보시라이와 리단위(李丹宇)가 일찌감치 헤여졌으므로, 보시라이사건이 발발하기 전에, 리왕즈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보시라이 재판때 리왕즈는 방청석에 아들의 신분으로 앉아 있어서, 여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보과과는 보시라이사건으로 계속 해외에 있으면서 상갓집개와 같은 신세가 되어 있다. 보시라이가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분명 리왕즈와 마찬가지로, 현장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보시라이의 부패사건과 많은 관련이 있어 스스로의 입장을 잘 알고, 제 발로 그물에 들어가지 않아, 지금까지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
리왕즈와 보과과는 보씨집안에서의 지위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비록 같은 부친의 소생이지만, 성격도 전혀 다르다. 보과과는 교횡발호(驕橫跋扈), 성색견마(聲色犬馬)하다. 그러나 리왕즈는 순규도구(循規蹈矩), 노실파교(老實巴交)하다. 여론은 보과과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러워하는 것이었으나, 보시라이가 낙마한 후에는 개패듯이 두들겨 맞았다. 민중이 뱉은 침이 강과 호수를 이루어 보과과를 익사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보시라이는 비록 위법난기(違法亂紀)하고,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리왕즈는 보시라이에 대한 정이 깊다. 재판현장에 친히 참석했을 뿐아니라, 보시라이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자주 가족의 신분으로 감옥에 접견을 간다.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리앙즈는 보시라이와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리단위가 막아서이기도 하고, 구카이라이가 반대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만일 보시라이가 죄수가 되지 않았더라면, 리왕자는 아마도 여전히 부친을 한번 만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웨이보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과거 2014년은 그의 30년이래로 부친을 가장 많이 만난 한 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따스하게 느끼고 있다. 그는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접견기회를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생은 고단하다"고 탄식한다.
리왕즈는 1977년생으로, 원래 이름은 보왕즈(薄望知)이다. 보시라이의 전처인 리단위의 소생이다. 두 사람이 이혼한 후, 리단위는 아이의 성을 이씨로 고친다. 리왕즈는 북경대학 법학원 본과를 졸업했다. 나중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를 한다. 석사를 마친 후, PE투자업종에 종사하며 다렌시의 회사를 대상으로 하는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관련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여러 저명한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았고 나중에 씨티은행으로 가서 요직을 맡는다. 금융과 투자계에서 아주 활발히 활동했다. 리왕즈는 현재 허차이(和才)펀드의 파트너이다. 북경대학자선,체육및법률연구센터 연구위원회 연구원이기도 하다. 비록 리왕즈의 길을 보시라이가 닦아준 것은 아니지만, 보씨집안과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그가 보이보의 손자라는 신분만 가지고도 많은 기업들은 기꺼이 그를 채용하려 할 것이다.
리왕즈는 비록 보시라이의 장남이지만, 보시라이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중국에서 편안하게 일하고 생활하고 있다. 그의 모친 리단위는 30년이래로 보시라이와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은 이혼한 후 관계가 물과 불같이 나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왕즈는 웨이보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어떤 때는 생각한다. 그(보시라이)를 장례식장에서 보지 않고 법정,감옥에서 보는 것이 행복인가 비운인가. 참으로 조화농인(造化弄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리왕즈의 심정은 아들의 입장인 사람이라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왕즈는 자신이 보시라이의 아들이라고 하여, 무조건 부친이 억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시라이의 위법난기는 기실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고, 기율검사부문과 사법기관이 충분한 관련증거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리왕즈의 한두마디로 뒤집어질 수 있겠는가? 만일 과거라면, 리왕즈는 아마도 보시라이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법기관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는 사실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보시라이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를 채용한 곳에서도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사업에서 성공한 것이 부친의 덕을 본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소수인의 견해이다. 리왕즈가 만일 억울하다고 여긴다면, 보시라이의 낙마가 그의 일생을 망쳤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능력과 사실로 말하면 된다.
아들된 입장에서 뭐든지 부친의 편을 들 수는 없다. 시시비비는 반드시 가려야 한다. 웃사람이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불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개석의 손자인 장우박(蔣友柏)은 조부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존중을 받는다. 리왕즈는 일찌기 해외유학을 한 고급인재로서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넓은 시야와 이상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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