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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두 차례 충칭사건의 같은 점과 다른 점

by 중은우시 2017. 7. 23.

글: 사천기(謝天奇)


중국공산당 18대를 앞두고, 2012년 2월 6일, 충칭부시장,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한다. 장쩌민집단의 보시라이, 저우용캉등의 정변음모도 곧이어 드러난다. 그후 3월 15일, 당시 정치국 위원이던 보시라이는 충칭시위서기 직위에서 면직된다.4월 10일에는 중공중앙위원 및 정치국위원이 직위도 정지되고,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 왕리쥔사건은 중국정계에 폭풍을 불러왔고, 그 진동은 아직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19대를 앞두고 2017년 7월 15일, 중공정치국위원 쑨정차이(孫政才)는 충칭시위서기의 직위를 면직당한다. 충칭의 관료사회는 다시 한번 흔들린다. 사건내막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고, 정치적 결과는 아직도 발효되고 있다.


두 차례의 충칭사건을 비교해보면 여러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첫째, 시간적으로 민감한 시점이다. 모두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5년에 1번 있는 교체기에 이루어졌다.


2012년 충칭사건은 중공양회 전날 발생하고, 보시라이는 양회가 끝난 이후의 다음날 충칭시위서기의 직위를 면직당하고 베이징에서 구금된다.


이번 충칭사건은 중공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 전날 발생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쑨정차이는 전국금융공작회의기간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징시호텔(京西賓館)에 구금되어 있다.


둘째, 공안국장과 시위서기가 연이어 사건에 휘말린다.


2012년, 보시라이가 낙마한 것은 충칭의 공안국장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 것에서 시작된다. 왕리쥔은 원래 보시라이의 심복부하였다. 두 사람간에는 여러가지 흑막이 연결되어 있다. '흑타(黑打)'등. 나중에 헤이우드가 구카이라이에게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목하게 되었다.


이번에 쑨정차이가 면직되기 전에 충칭공안국장 허팅(何挺)이 먼저 낙마했다. 일찌기 4월초, 허팅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계속 나타났다. 6월 6일, 허팅은 면직된다. 허팅은 전 '정법왕(政法王)' 저우용캉이 가장 아끼던 부하중 하나였다. 그의 전임자인 왕리쥔과 마찬가지로 허팅은 재직기간동안 파룬공을 박해한다.


허팅과 쑨정차이의 관계도 밀접했다. 그들은 모두 2012년 장쩌민파의 인물인 보시라이, 왕리쥔이 체포된 후 낙하산으로 충칭에 내려와서 각각 보시라이와 왕리쥔의 직위를 넘겨받았다. 두 사람은 근 5년간 함께 일을 했고, 금년 9월에 만54세가 되는 쑨정차이와 55세가 되는 허팅은 나이가 비슷할 뿐아니라, 모두 산동성 롱청(榮成) 사람이다.


이전에 허팅사건이 터진 후, 허팅을 잘 아는 소식통은 <남화일보>에 이렇게 말한다: "허팅은 자주 쑨정차이와 관계가 밀접하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수십년의 사귄 친구"라고 형용했다.


셋째, 보시라이와 쑨정차이는 모두 장쩌민파 후계자라는 색채를 지니고 있다.


2012년 왕리쥔 사건이 발생한 후, 장쩌민차의 정변음모가 발각된다.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파 정변음모에서, 보시라이는 장쩌민이 암중으로 지명한 장쩌민파와 중공의 후계자였다. 장쩌민파는 보시라이가 "18대"때 먼저 정치국상임위원에 들어가서, 저우용캉의 정법위서기 직위를 넘겨받고, 다시 시진핑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대체하게 하려 했다고 한다.


이번 충칭사건의 주인공인 쑨정차이는 "18대"때 다크호스로 정치국위원이 된다. 후춘화(胡春華)와 함께 단 2명뿐인 60년대생 정치국위원이 된다. 그리하여 후계자중 한 명으로 꼽혔고, "19대"에 정치국상임위원에 들어갈 강력한 후보가 된다.


쑨정차이가 면직된 후, 그가 처음에 장쩌민의 당매(堂妹)인 장쩌후이(江澤慧)에게 발탁되고, 나중에 장쩌민파의 거두들인 자칭린(賈慶林), 류치(劉淇), 쩡칭홍(曾慶紅)등이 오랫동안 배양했으며, 장쩌민파에 의하여 후계자로 추천된 관료로서의 행적과 내막이 모조리 폭로된다.


쑨정차이는 아마도 보시라이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이는 의미한다. 후진타오, 시진핑이 손을 잡고, 5년의 시간동안 전후로 2명의 장쩌민파 후계자를 끌어내린 것이다.


두번의 충칭사건의 최대 상이점은 시진핑 장쩌민의 싸움태세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18대"를 전후하여 양파의 싸움에서 장쩌민파세력은 명백히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이는 장쩌민파가 "18대" 고위층인사에 간여하고, 충칭사건 발생후 넘겨받은 관리의 파벌색체를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당시 보시라이를 이어 충칭시위서기를 맡은 장쩌민파 고관은 당시 국무원 부총리로 있던 장더장(張德江)이었다. 장더장은 그 후에 "18대"에서 정치국상임위원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된다. 전인대를 장악하고 시진핑에 대항한다. 그후 충칭시위서기를 맡은 쑨정차이는 금년초 중앙기율검사위원회로부터 "보시라이,왕리쥔'의 여독을 숙청하는데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왕리쥔의 뒤를 이어 충칭시공안국장이 된 허팅은 저우용캉이 가장 아끼는 부하중 하나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허팅은 장더장의 "두껑을 덮어두라", "장쩌민파를 보존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충칭에서 보시라이, 저우용캉, 왕리쥔의 일당을 보호하고 비호했으며, 민영기업오너의 억욿한 사건을 바로잡는 것도 계속 막아왔다.


과거 5년동안, 시진핑, 왕치산은 장쩌민파이 당,정,군에서의 상위직에 있는 부하들을 제거했다. 시진핑진영은 시진핑-장쩌민싸움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였다.


이번 충칭사건이 발생한 후, 쑨정차이를 이어 충칭시위서기가 된 사람은 시진핑의 심복인 옛날 부하 천민얼(陳敏爾)이다. 


7월 17일, 부임한지 이틀째인 천민얼은 시위상위(확대)회의를 주재했다. 천민얼은 충칭관리들에게 시진핑의 '핵심지위'를 유지보호하고, 정치적 소양을 제고하며, 전면적으로 '보시라이,왕리쥔' 여독을 제거하라고 요구한다.


천민얼이 이렇게 빨리 입장을 밝힌 것을 보더라도, 쑨청차이의 정치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충칭의 관료사회에 대숙청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시진핑진영은 과거 5년간 이미 장쩌민파의 당,정,군세력을 심도있게 숙청했다. 시진핑당국이 다시 고개를 돌려 충칭의 관료사회를 숙청하려고 하고, '보시라이, 왕리쥔'여독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장쩌민파의 '최종큰호랑이'를 포위공격하기 위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충칭의 "보시라이.왕리쥔'여독의 배후는 장쩌민, 쩡칭홍등 장쩌민파의 고위층은 정변과 장기적출행위등 두 가지 핵심약점을 가지고 잇다.


현재는 "19대"의 직전으로 베이다이허회의를 하는 민감한 시기이다. 쑨정차이가 면직된 사건은 계속 발효되고 있다. 사건이 시진핑, 장쩌민 양파간의 "19대"고위층인사를 놓고 생사의 싸움을 벌이는데 풍향계가 될 것이다. 일단 장쩌민파는 목숨을 걸고 반격할 것이고, 시진핑당국은 쑨정차이사건의 정치적인 의미를 업그레이드시킬 것이고, 공개적으로 충치의 '보시라이,왕리쥔'여독배후의 정변과 장기적출행위를 청산할 것이다. 그것이 장쩌민, 쩡칭홍등 장쩌민파 고위층을 사지로 몰아넣을 방아쇠가 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