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홍대전(洪大全): 청나라조정의 흠차대신이 날조한 '홍수전의 동생'

중은우시 2016. 6. 8. 23:56

글: 이자지(李子遲)


초량(焦亮)이 포로로 잡힌 후, 금방 그는 호남 천지회(天地會)의 성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새상아(賽尙阿)는 원래 영안(永安)을 지키는데 실패하여 함풍제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그에게 주모자를 체포해오라고 명령한다. 만일 체포하지 못하면 엄히 처벌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 대동산(大峒山)에서 다시 4명의 총병(總兵)이 전사하고 청군은 일패도지한다. 이렇게 되니 총사령관인 그는 더욱 죄책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상아는 막료이자 호부원외랑인 정수존(丁守存)과 비밀리에 상의한 후, 초량을 홍수전의 형제인 소위 '천덕왕(天德王)' 홍대전이라고 하기로 한다. 그리고 정수존은 <홍대전전(洪大全傳)>을 쓴다. 새상아는 초량을 북경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다시 홍대전이 함풍황제에게 올리는 <진정파적표(陳情破賊表)>를 날조한다. 초량은 북경으로 압송된 후, 금방 처형된다.


당시, 청정부의 어떤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홍대전은 태평군의 중요지도자가 아니다. 총ㅅ량관이 영안주에서 포위당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죄를 피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이다. 함풍제도 이런 견해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초량이 체포된 후 일부러 신비스러운 척 하면서 스스로 천덕왕 홍대전이며, 홍수전의 형제이고 나란히 만세(萬歲)로 불리웠으며, 양수청(楊秀淸)은 그들 형제의 신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새상아는 대동산에서 참패하면서 패배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의 투항을 허용하고 공을 세워 죄를 면하려 한 것이다. 홍대전도 협력에 동의하고 장편의 진술서를 쓴다. 그리고 새상아는 초량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그후, 홍대전은 북경으로 압송되는데 도중에 하남성 신양을 지날 때, 비로소 그는 이번에 북경에 가면 흉다길소(凶多吉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상함풍황제표문>을 쓰게 된다. 정수존은 이를 허용하나, 조건은 홍대전이 이전의 진술을 뒤집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 황제에게 올리는 표에서는 내용이 더욱 거창했다. 그는 스스로를 과대포장하여, 자신은 병법을 읽어서 장악하고 있으며, 병서를 가지고 있는 광세기재라고 적었다. 또한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탐관오리에 반대하는 것이지 황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조정에는 계속 충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태평천국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상대할 재지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만일 사형에 처하지 않고 기용해주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초량은 여전히 처형당한다.


초량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가 태평천국에 투신할 때도 이 이름을 썼다. 홍대전은 새상아등이 날조해낸 것이다. 최소한 그가 포로로 잡힌 후에 바꾼 이름이다.


초량의 본명은 초옥창(焦玉昌)이다. 그는 제갈량의 병법을 가장 존경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량(亮)으로 바꾸었다.


초량의 형제와 처도 호남 천지회 회원이다.


그의 큰동생 초옥명(焦玉明)은 <흥녕초씨족보>에 따르면 일찌기 장사 악록서원에서 공부한 선비이다. 1852년 호남 침주(郴州)에서 태평군에 참가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천경 궁전에 걸어놓은 대련(對聯)인 :"용비구오(龍飛九五), 중개요순지천(重開堯舜之天); 호분삼천(虎賁三千), 직저유연지지(直抵幽燕之地)"가 그의 글이라고 한다.


그의 둘째동생 초옥정(焦玉晶), 즉 초삼(焦三)은 초량이 떠난 후, 초량의 처인 허월계(許月桂)와 "초군당(招軍堂)의 두령이 된다. 1855년, 광동 천지회 홍건군과 서로 호응하여 두 사람은 깃발을 들고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허월계가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초삼은 삼성군사(三省軍師)가 된다. 다음해에 실패하고 두 사람은 가화현 아문으로 찾아가서 투항한다. 그 후에 장사로 끌려가서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