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태평천국의 외교실패

by 중은우시 2012. 9. 20.

글: 정흠남(丁鑫南)

 

청나라 동치(同治)3년(1864년), 천경의 장강에는 소슬한 한풍이 불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의 실패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가지 이다. 필자는 천조(天朝, 여기서 '천조'는 태평천국을 가리킨다)의 외교분야에서의 실책을 3가지 방면에서 분석하고, 천조의 외교사상, 외교노력 및 홍인간(洪仁玕)의 외교주장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검토해보고, 외교실패의 원인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내고자 한다.

 

1. 일방적인 외교사상

 

태평천국과 서방열강은 모두 하느님을 신봉하므로, 천조는 처음부터 서양인들을 형제로 보았다. 그들의 침략행동과 실질은 인식해지 못했고, 그들에 대하여 당연히 가져야할 경계심도 가지지 않았다.

 

1853년, 동왕 양수청이 영국공사 Sir George Bonham에 보낸 고유(誥諭)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해외의 영국국민이 만리를 멀다않고 와서 우리 나라에 귀순하니 천조의 장사병졸은 극력 환영한다. 하늘의 천부 천형도 너희의 충성과 의리를 칭찬할 것이다. 이에 특별히 명을 내리노니: 너희 영국 오랑캐들이 너희 인민을 데리고 자유롭게 출입하며 마음대로 드나들고, 우리 천조의 군대를 도와 요적을 섬멸하든지, 아니면 평상시대로 상업을 경영하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라. 너희들이 우리를 따라 천왕을 잘 모시고, 공을 세워 천부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를 깊이 바란다."

 

이 고유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마음대로 드나들게(自由出入, 隨意進退)"하도록 하고, "상업을 경영하는 것을 하고싶은대로 하라(經營商業, 悉聽其便)". 이는 당시의 역사적 여건하에서 자연경제를 위주로 한 태평천국에게는 아무런 좋은 점이 없었다. 그저 열강의 경제문화 침투에 유리한 것일 뿐이아.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국가주권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태평천국운동 후기에 접어들면서, 열강은 갈수록 공개적으로 청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병력을 파견하여 태평군 '소탕을 협조'한다. 그러나, 천조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서양인들을 그들과 "함께 하느님과 예수를 신봉하고, 하나의 종교를 서로 전하니, 허가손해(虛假損害)의 생각이 없다. "의리와 우의가 돈독한 것이 한 집안과 같다" 열강이 중립을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을 뿐아니라, 그들이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는 망상을 품었다. 이는 천조의 지도자들의 광적인 종교열정로 인하여 벌어진 웃지못할 일이다. 같은 종교를 믿는 열강에 환상을 품었으나 나중의 국세의 발전상황을 보면, 이는 태평천국의 일방적인 바램일 뿐이었다.

 

2. 철저하게 실패한 상해외교

 

1860년 태평천국과 서방열강은 상해문제를 두고 일련의 외교활동을 벌이는데, 이는 천조의 외교상의 우매와 무지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1860년 7월 1일, 태평군이 상해에 접근하는데, 상해는 통상항구의 지위를 지녀서 태평천국이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천조의 집권자(정치적으로는 홍인간, 군사적으로는 이수성)는 시종 상해를 공격하여 점령할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고, 희망을 평화협상에 걸었다.

 

관건적인 실수는 협상대상의 선택에 있었다. 태평천국의 집권자들은 두 명의 외국선교사를 협상대상으로 삼는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서방각국의 공식대표자격을 아예 갖추지 못했다. 천조의 지도자들은 그러나 두 선교사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그리고 이수성(李秀成)은 가마를 타고 대군을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상해성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포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배신기의(背信棄義)"했다고 크게 욕한다. 사실상, 서방각국은 근본적으로 여하한 공식대표자격을 가진 외교관도 태평천국과 여하한 구두 혹은 서면합의를 달성한 바 없고, 천조군대가 상해로 진입하도록 동의한 바 없다. 그리고 유일하게 공식대표자격을 갖춘 각국의 주상해영사는 태평천국측과 상해문제에 대하여 여하한 실질적인 협상도 거부했다. 그저 태평천국측은 현실을 직면하고자 하지 않을 뿐이었다.

 

또 다른 치명적인 착오는 근본적인 것이다. 당시의 국제적인 환경을 보면, 태평천국은 처음부터 상해를 건드리려 해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상해는 서방열강의 재중국이익이 집중된 곳이었고, 상해를 건드리는 것은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상해는 태평천국 자체에 대하여 전략적 가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상해를 건드린 것은 열강들이 공개적으로 청나라정부를 도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핑계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당시 입장이 곤란했던 태평천국에 더욱 불리한 국제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바로 모가기(茅家琦)선생이 말한 바와 같다:

 

"(태평천국)의 더욱 주요한 잘못은 그들이 청왕조와 외국자본주의침략자간에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해결할 수 없었던 모순을 이용하여, 양자가 결탁하여 자신에 반대하는 것을 저지하고, 외국자본주의세력이 오랫동안 중립정책을 집행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점에서 역량을 집중하여 주요적수인 청왕조를 타격했다면, 양쪽에서 적을 맞이하는 국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해낼 수 없었다면, 이는 스스로 양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처지에 빠지게 만들었고, 이 잘못은 다시 상해진공문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3. 비극인물 - 홍인간

 

홍인간은 역사가들이 태평천국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선진적인 외교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얘기되어진다. 확실히, 그는 대외정책의 어떤 분야에서 그의 선배들보다 확실히 어느 정도 진보되었다.

 

그는 1859년 소위 "유원(柔遠)"정책을 제기한다: "무릇 외국인들은 기예가 정교하고, 국법이 넓고 깊다. 마땅히 먼저 그와 통상을 허락하여야 하나, 다만 한지(旱地)로 마음대로 진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백성들이 그들을 기이하게 여겨서 뜻밖의 사고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인간이전의 태평천국의 집권자들은 통상의 잠정보류를 주장했다. 여기서 홍인간의 정책은 자유통상이었다. 이는 서방국가의 지지를 쟁취하는데 일정한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그외에, 그는 또한 "목사등 기예를 가리치는 사람을 불러들여 우리 백성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위하여 정책을 바치도록 해야하고, 국법을 비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 뜻은 바로 비록 자유통상을 허용하기는 하되, 외국인들이 중국내정에 간섭하거나, 중국법률을 위반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진보한 것이다.

 

중국과 외국의 예절과 관습의 차이문제에 대하여, 홍인간이전의 집권자들은 서방사절이 태평천국을 방문했을 대 천조의 예의를 사용하도록 요구하였었다. 이는 여러가지 불편을 초래했다. 그러나 홍인간은 "구동존이(求同存異)"의 방침에 기하여, "너희는 가볍게 꿇지 않고, 우리는 가볍게 나가지 않는다. 각자 그 예를 지키는 것이 양쪽이 모두 이익되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홍인간이 집권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대외주장은 <자정신편>의 약간의 중요내용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의 후기에 효과적으로 관철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비록 태평천국의 외교정책에 일부 개선을 가하지만, 그러나 부족한 점도 여전히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저작 <자정신편>에서 중국을 "중지(中地), 만지(滿地), 몽고지(蒙古地), 전장(前藏), 후장(後藏)"으로 나누고, 통일된 한 나라로 보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의 협소한 민족관을 엿볼 수 있고, 주권관념이 박약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외에, 그는 다른 태평천국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열광에 좌우되었다. 서방각국은 천조와 신앙이 같아서 '형제지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열강의 침입에 대하여 경계를 늦추었다. 설사 나중에 자신의 '서양형제'에 상처를 깊이 입게 되고, 이로 인하여 외교사상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서방열강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고, 태평천국이 실패한 원인을 '서양형제'의 배신기의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상해문제의 외교실패에 대하여, 홍인간도 미룰 수 없는 책임이 있다. 태평천국의 유일한 근대선진외교사상을 지닌 인물로서, 상해사무에서의 표현은 무지하고 멍청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홍인간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몇 안되는 외부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지닌 인물이며, 근대개혁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 정책은 당시의 사회환경하에서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가 없었다. 외교분야에서 확실히 어느 정도 태평천국과 서방국가의 교류를 촉진시켰고, 그의 전기의 외교노력은 실질을 중시하는 것이었지만, 시운이 따르지 않고, 천조 자체의 한계성으로 실패하고 만다. 홍인간은 피살되기 전에 태평천국의 실패원인을 이렇게 썼다: "우리 왕조의 화환의 근원을 말하자면, 서양인들이 요적을 도운 일이다...다만 만일 양인이 적군을 도우지 않았으면, 우리를 장기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다. 다만 요군이 서양인을 매수하여 우리 군을 공격하여, 우리 왕조는 연속하여 성을 빼앗기고 연전연패한다. 우리 군은 막을 수가 없었고, 말일이 도래하게 되었다." 후인들이 보기에, 태평천국실패의 '화환의 근원'을 서양인의 배신으로 돌린 것은 너무 편파적이다. 이는 확실히 태평천국 자신의 내부적 원인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홍인간이 참혹한 댓가를 치른 후에 그의 외교사상에 대한 마지막 결론이다.

 

4. 태평천국 외교실패의 원인분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해보면, 태평천국의 외교는 왜 실패로 끝났을까?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외교사상의 일방성, 외교활동의 우매와 무지 그리고 외교주장의 실제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외교활동의 여러가지 실책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태평천국과 서방열강간의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근본모순이다;

 

첫째, 태평천국은 중국의 독립주권을 견지하였는데, 이는 서방열강의 식민이익과 근본적인 충돌이 존재했다; 둘째, 태평천국은 아편금지입장을 확실히 했는데, 당시 서방은 아편무역에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정상상업무역의 이득을 훨씬 초월했다. 이 두 가지 모순은 태평천국의 정치이익과 경제이익에서 모두 서방열강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이는 서방이 태평천국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태평천국외교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천조는 서방의 중립을 쟁취할 기회가 있었고, 최소한 청왕조를 돕지 않게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한번 해낸 적이 있다. 이 가능성이 존재하는 원인은 첫째, 태평천국 자체가 신속히 발전하여, 서방열강이 그들의 역량을 가볍게 볼 수가 없었다. 부득이 그들과 적이 되었을 때의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태평천국의 정치, 경제정책은 청왕조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악의가 없는 외국인들에게 환영하는 태도를 취했다, 서방과 상업무역을 진행하는데 대하여 아주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만일 태평천국이 정권탈취에 성공하면, 서방은 아편무역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대외무역관계를 건립할 수 있었다. 이는 장기적 이익에 부합된다.

 

다만, 바로 태평천국의 영국친구가 말한 것처럼, 만일 태평천국이 단기간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면, 서방은 그 세력을 꺼리고, 장기적인 상업이익의 필요에 따라, 아마도 중립을 취했을 것이고, 앉아서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마치 나중에 서방이 국민정부북벌을 대하던 태도와 같다). 다만, 태평천국 자체의 내분 및 여러가지 의사결정의 실책으로 인하여 갈수록 승리에 가까워지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형세는 오히려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태평천국의 적수인 청왕조는 "차사조초(借師助剿, 군대를 빌려서 소탕에 도움을 받다)"의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서방이 태평천국진압을 도와주는데 대한 조건으로 제시한 교환요구를 받아들인다. 이러헥 되자, 서방의 정책은 전면적으로 청왕조에 기우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은 외교적으로 철저히 실패한 것은 당연히 외교활동의 실패에 원인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발전의 한계성으로 열강들이 철저히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