쟉자: 왕욱기(王昱祺)
진(秦)은 한(韓)을 멸망시킨 후 다음번 목표는 지연으로 볼 때 위(魏) 아니면 조(趙)이다. 나머지 3개, 제(齊), 연(燕), 초(楚)는 너무 멀어서 당분간 타격범위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조 두 나라는 기실 상당히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조나라는 총사령관인 이목(李牧)은 용병이 신출귀몰하여 왕전(王翦)도 심히 꺼리는 장수였다.
거리로 보면, 위나라의 대량(大梁)은 위치로 보아서 진나라가 공격하기 더 유리했다. 위나라가 진나라의 다음 번 목표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러나 진시황은 먼저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아마도 이는 숨어있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
몇년동안 조나라는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기원전231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지 1년전, 조나라의 대군(代郡)에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대군의 절반이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지진의 급수가 아주 좊아서, 지면이 동서로 이동한 거리가 1백3십보(150미터)에 달하였다. 당산대지진보다 맹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지진으로 대군의 대부분의 건물은 무너졌고, 건물이 무너지면서 깔려죽은 백성은 부지기수이며, 생존자들도 대부분 부상을 입거나 돌아갈 집이 없었다. 이목이 여러 해동안 경영했던 대군이 돌연 인간지옥으로 바뀐 것이다.
전국시대의 지식으로는 지진을 해석할 도리가 없었다. 지진의 통상적인 해석은 변천(變天)이었다. 수백년전의 서주가 멸망하기 전날, 그 발원지에서도 지진이 발생했었다.
지진은 조나라의 북방에 대하여 거의 파괴적인 피해를 입혔다. 다행히 한단등 핵심지역은 지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해, 전체 조나라는 다시 한번 천재지변을 당한다.
이번에는 가뭄이었다. 조나라는 영토의 많은 지역이 가뭄에 시달린다. 대지는 메마르고, 뜨거운 햇살아래 말라버린 풀을 제외하고는 들판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빨간 해가 이글이글 타올라서 마치 불이 붙은 것같고,
들판의 야채와 벼묘목 반은 말라서 타버렸다."
가뭄은 조나라를 불모지로 만들었다. 사람과 가축이 대거 죽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다.
매해 이어지는 천재지변으로 조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된다. 그리고 하늘의 뜻은 조나라가 멸망할 것을 암시했다. 천시,지리,인화중에 천시는 첫째로 놓았다. 그래서 진시황은 위나라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조나라로 직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천시를 중시한 것이다.
조나라와 진나라는 모두 같은 조상이다. 모두 성(姓)이 영(嬴)이다. 서주(西周) 때, 조씨(趙氏)는 조성(趙城)을 봉지(封地)로 받았다. 진씨(秦氏)는 조씨에 빌붙어 살았다. 두 씨족은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진씨는 백작의 칭호를 받게 되고, 나중에는 영성을 정통이 된다. 다시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진나라가 사방이 패자가 되고 조나라는 북방을 횡소(橫掃)한다. 영성의 양대가족이 동시에 거대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은 전국시대 말기이다. 제후국들단에 눈이 벌겋게 되어서 싸우고 있고, 진,조 사이의 혈연관계는 일찌감치 옅어져 있었다.
진시황이 목표를 정했는데, 정말 이 조나라라는 오래된 라이벌과 싸우려면 아주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고, 일격필살해야 했다.
이번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병력을 삼로(三路)로 나눈다.
중로(中路)는 왕전이 통솔한다. 이는 진나라의 주력이고 근 20만에 이른다. 태원군에서 출발하여 태행산의 "정형(井陘)"을 올라가 조나라의 중부를 공격한다.
왜 왕전의 주력군은 "정형"으로부터 출발했는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했다.
첫째, "정형"은 조나라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는 조나라를 둘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진나라군으로 하여금 많은 양초(糧草)를 절약하게 해준다. 그리고 진나라군대의 진공속도를 크게 늘여준다.
둘째, 또 다른 장점은 조나라군대의 주력을 중부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은 반드시 비게 될 것이다. 진나라군대의 제2로와 제3로군은 바로 남북의 양쪽끝으로 진격한다.
제2로는 남로군(南路軍)이다. 양단화(楊端和)가 통솔한다. 동군에서 조나라의 남장성(南長城)을 공격하며 한단을 위협한다.
양단화와 왕전은 거의 동시에 출발한다. 당초에는 환기(桓齮), 왕전과 함께 "진왕삼호장(秦王三虎將)"으로 불린 인물이다. 비록 큰 공을세우지는 못했지만 노련한 장수이다.
제3로 북로군(北路軍)은 이신(李信)이 통솔했다. 태원군에서 출발하여 북상하여 조군의 운중군, 안문군, 구원군, 오원군, 대군을 공격한다.
이신은 이전까지 한번도 한 군대의 사령관을 맡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집안이 혁혁하다. 그래서 진시황은 파격적으로 젊은 청년인 이신을 북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진나라의 3로대군은 서로 천리가 떨어진 3개의 방향으로 조나라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 의도는 분명하다. 조나라에는 이목 1명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에 3개의 전선을 돌볼 수가 없다.
3로대군의 총병력은 30만이 넘는다. 이는 장평지전이후 매우 보기 드문 병력이다. 왕전은 진시황에게 병력을 더 많이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조나라와의 일전은 국력을 다 끌어모은 대회전이다.
이는 대체로 왕전의 용병풍격이다. 그는 대병력작전에 뛰어나다. 그의 군대수량이 상대방보다 배가 넘으면 그는 백전백승이다.
상앙변법이래로 진나라는 전민개병(全民皆兵)이었다. 진효공때, 일정한 나이가 된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다만 진나라군대는 전쟁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관중은 항상 남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진효공의 손자인 진소양왕때, 일찌기 13살이상의 남자를 전쟁터에 내보낸 적이 있다.
진시황이 즉위한 초반 몇년간 일찌기 하급관리들에게 10명중 반드시 2명은 전쟁터에 나가라고 명령을 내린다. 병력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이다.
진나라가 획득한 영토가 많아질수록 가용할 수 있는 병사는 계쏙 감소했다. 통일천하후에 여러번, "관중에 남자가 없다"는 현상이 계속되었고, 이는 한나라초기까지도 여전히 그러했다.
그러나 이 몇년 진나라는 휴식을 취하며 병력을 늘인다. 특히 한나라를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병합하고, 한나라의 근 10만의 병력을 얻어서 보충한다. 진시황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적지 않게 늘어난 것이다.
먼저 인원수가 가장 적은 이신의 북로군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이신은 진양에서 출병하여, 2만을 거느리고, 태원군의 북대문 낭맹을 지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조나라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대군(代郡)이다.
이번에 이신은 3로군중 하나의 부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독자적으로 대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왕전이 그에게 내린 명령은 북방의 몇 개 군의 군대를 붙잡아 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큰 공을 세울 생각은 말고 큰 잘못만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신의 군대는 금방 대군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이미 옛날 대왕통치시기의 그 유목상태가 아니었따. 조나라는 이 곳을 백년간 경영했고, 대성은 견고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2만 진나라군대의 맹공을 한동안 막아내기는 충분했다.
사전의 계획대로라면, 이신의 군대는 대성 부근에 군영을 세우고, 전체 북방의 몇개군이 감히 이목의 조나라군대주력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이렇게만 해도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수가 바깥에 나가면 군령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 대군에 도착한 후, 이신은 물만난 고기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신에게 대군에서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조나라 북방의 몇개 군은 원래 병력이 상당히 충분했다. 30만이 넘었다. 다만 이목이 흉노를 대파한 후, 계속 병력을 조나라 본토에 보내게 되었고, 나중에 호첩(扈輒)의 십만조군이 궤멸한 후, 이목은 십여만의 북방대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리하여 단지 2,3만의 병력만 북방에 남아 있게 된다.
조나라 북방의 몇 개 군은 현재 병력이 전성기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몇 개의 큰 성도 겨우 2,3천명이 지키고 있었다. 기실 남하하여 이목을 지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신은 대군에 도착한 후, 비로소 발견한다. 조나라군대의 병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2만의 진나라군대로 이신은 자신을 가진다. 역량을 집중하면 어떻게 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신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린다. 대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으려던 전략을 버리고, 대성을 맹공하고, 일거에 함락시킨다.
이어서 이신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향후 반년동안, 이신은 조나라의 북방의 성읍을 못을 뽑는 것처럼 하나하나 점령한다.
이신의 이 진나라군대는 인원수가 많지 않지만, 전적은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다시 남부의 양단화의 대군을 보기로 하자.
양단화가 이끄는 진나라군대는 8만이다. 조나라의 남장성을 거짓으로 공격하는 척한다.
사전에 한 계획에 따르면, 만일 조나라군대의 주력이 북상하여 왕전의 군대를 가로막는다면, 남장성과 한단은 분명히 빌 것이다. 양단화는 8만의 군사력으로 남장성을 취할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한단까지도 일거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단화는 당연히 발휘해야할 수준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중에 이목이 조나라군대의 주력을 이끌고 북상하여 왕전군과의 결전을 하려고 할 때까지 양단화는 계속하여 조나라의 남장성을 점령하지 못한다. 이목이 죽고나서 왕전이 대승을 거둔 후 남하할 때, 양단화는 비로소 기회를 잡아 남장성을 돌파한다.
조나라쪽에서, 무안군 이목은 아주 정확하게 양단화의 능력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양단화가 남장성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장성으로 가서 양단화와 싸우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왕전의 군대와 정면으로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목이 십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중부의 "정형"으로 가서 진나라군대를 공격한다. 나머지 성은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는다.
이목군의 주력은 조나라 북방 몇 개군의 군대이고, 기병이 많았다. 이동속도가 아주 빨랐다.
이목군이 군영을 차리고 십여만명의 군영은 몇리에 걸쳐 펼쳐진다. 기세가 대단했다.
왕전은 노련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비력 병력이 상대방보다 많았지만,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몇년전 환기가 참패를 당한 것은 왕전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교훈이었다.
환기가 도망친 후, 왕전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했다. 이목을 만나면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비록 9할의 승산이 있더라도 다시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해야 한다.
출정하기 전에, 왕전은 아들 왕분(王賁)에게 이렇게 교훈을 내린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병력을 잘 쓰는 자는 많았다. 병력을 잘 쓰는 자는 병사를 자주 쓰게 된다. 그러면 살아돌아오는 사람이 적다."
왕전의 결론은 아주 적절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병력을 잘 쓰는 사람은 많았지만 마지막에 전쟁터에서 죽지 않은 자가 드물다.
왕분이 묻는다: "부친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살아돌아오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왕비가 무겁게 말한다: "아들아 잘 들어라. 조심해서 몰아야 배가 만년을 간다."
왕분은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군사이념은 부친과 극히 유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수적이지만, 실제는 온건한 것이다. 그들 부자는 일생동안 패전한 전적이 없다.
현재 이목의 군대는 바로 왕전의 눈앞에 있다. 그는 자연히 군영을 나서서 교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척후병을 함양으로 보내어 태위 위료에게 즉시 이간계를 쓰도록 독촉한다.
왕전은 중간정도의 키에,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만일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면, 아무도 그가 진나라의 대장군인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몸에서는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왕전은 평소에 사람됨이 선량하고 우호적이다. 조정에서도 다른 대신들과 관계가 좋았다. 속이 깊었다. 그는 온화해 보이는 눈빛 속에 거대한 에너지를 숨기고 있었다.
매일 왕전은 높은 곳에 서서 이목의 군영의 포진을 살펴보았다. 그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좋은 계책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낙관적은 태도는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이 된다. 어떤 상황이 나타나더라도, 왕전은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그를 따르는 장군들에게 심적으로 안정되게 해주었다.
밤은 깊고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야생동물들이 잡초를 건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왕왕 이러한 때 왕전은 등을 끄고,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을 때, 비로소 살기를 가득 품고 눈빛을 기둥처럼 내뿜는다. 마치 칠흑같은 밤 속에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마음 속의 모든 적을 죽여버릴 수 있는 것처럼....
낮이 되면, 왕전은 미소장군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는 심지어 장병들을 질책하는 일도 드물었다. 전쟁터에서는 더더욱 온건한 방식을 취하고 장병들에게 모험을 시키지 않았다. 이는 백기의 군사이념과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다.
왕전은 각 군영에 진지를 굳게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명령한다. 장병들은 그에게 분명 좋은 계책이 있을 거라고 믿고 모두 그의 명령을 따랐다.
이목의 군대는 비록 강인하지만, 진나라로서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몇년간, 진나라는 내부로부터 한나라를 와해시키고, 싸우지 않고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위대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태위 위료는 조나라에서도 그 방법을 다시 쓰려고 생각한다.
한나라의 내부협력자는 남양태수등이었다. 그렇다면 조나라의 내부협력자는 상국(相國) 곽개(郭開)이다.
곽개는 상인출신이다. 그는 태수등보다 더 쉽게 매수되었다. 큰 돈의 유혹아래 그는 조나라 한단에서 유언비어를 퍼트려 이목이 병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고 떠벌인다.
곽개 이외에, 위료는 또한 소년 조왕천(趙王遷)의 모친 조태후(趙太后)도 매수한다. 이 태후는 원래 창기(娼妓) 출신이어서, 큰 돈과 미남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조나라의 조정은 마침 이 상인과 창기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연합하여 이목을 모함하니, 이목과 부사령관 사마상(司馬尙)은 한단으로 소환당하고, 오는 도중에 죽임을 당한다.
후임으로 조나라군대를 이끌게 된 두 장수는 조총(趙蔥)과 안취(顔聚)이다. 그들은 전투를 장악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왕전이 군대를 이끌고 맹공격을 가하니, 대승을 거두고 바로 한단성 아래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이때 양단화도 그 틈을 타서 남장성을 함락시키고, 왕전의 대군과 한단성 아래에서 회합한다.
한단성 안에서는 곽개가 호응한다. 한단성 전투에서 조총과 안취는 사망하고 조왕천은 포로로 잡힌다. 공자 조가(趙嘉)는 대군과 상곡군으로 도망쳐서 얼마 되지 않는 잔병을 다시 수습한다.
진시황은 한단성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천리나 떨어진 한단으로 가서 왕전의 공로를 치하한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왕전의 위명은 크게 떨쳐진다. 무성후(武成侯, 20급의 군공작위중 최고급인 20급이다)에 봉해진다. 양단화는 설정한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여 이때부터 진시황의 눈밖에 난다. 이신은 비록 공을 세웠지만, 임의로 전쟁을 일으켜서 공과 과를 상계해서 상도 내리지 않고 벌도 내리지 않는다.
한왕안과 마찬가지로, 조왕천도 유배된다. 그의 유배지는 더욱 궁벽진 곳으로 상용(上庸)의 방릉(房陵)이다.
공자 조가는 비록 대군과 상곡군에서 조왕(趙王)을 칭했지만, 역대왕조의 사관들은 인정하지 않고 통상적으로 조가를 대왕(代王)으로 칭한다.
몇년 후, 왕전의 아들 왕분은 연나라에서 대군을 공격한다. 조나라의 마지막 군사역량도 이때 소멸된다. 대왕 조가도 순국한다. 동시에 멀리 방릉에 있던 조왕천은 형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자 복국의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도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젊은 나이에 우울증에 걸려 죽는다. 후대조차 남기지 못한다.
이백여년전, 삼가분진때 진정공은 조, 위, 한의 세 집안의 핍박에 의하여 죽으면서 이런 저주를 남긴다: "너희 후손은 모두 편안히 죽지 못할 것이다." 그 뜻은 너희 3가의 후손은 정상적으로 죽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진나라의 마지막 국군이고, 그가 한 것은 고독한 저주였다. 지금 이 저주의 3분의 2가 이미 실현되었다. 한왕안, 조왕천은 모두 편안히 죽지 못했다. 위왕가(魏王假)의 운명은 또 어떠할 것인가?
조왕천은 죽기 전에, 기침을 하면서 다시 악독한 저주를 내린다: "조정(趙政, 진시황). 너는 간신으로 조씨형제를 이간하였다. 언젠가 조나라사람이 반드시 너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
조나라는 이렇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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