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멸위(秦滅魏): 수엄대량(水淹大梁)

by 중은우시 2016. 5. 28.

글: 왕욱기(王昱祺)


한,조,연의 3국이 이미 멸망했다. 남은 3개의 제후국은 위(魏), 초(楚), 제(齊)이다. 종합적인 국력으로 보면 위나라가 상대적으로 약했고, 거리의 원근을 따지더라도 위나라가 가장 가까웠다. 의문의 여지없이, 진시황이 다음 번에 멸망시킬 제후국은 위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가 한, 조를 멸망시킬 때는 외교수단을 썼다. 상대방의 군신을 이간시켜 손쉽게 효과를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삼진(三晋)이지만, 진나라는 위나라에 무력을 쓰기 전에, 마찬가지로 몇 가지 수단을 쓴다.


먼저 위나라의 상황을 보자.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암시킨 후, 동생 희고(姬高)를 필(畢)의 땅에 봉한다. 희고는 필고(畢高)라고도 부르고, 작위는 후작(侯爵)이었다.


필지는필방(畢方)의 옛땅이다. 지금의 섬서성 함양 서북쪽이다. 북으로는 경영,경수 남안에 닿고, 남으로는 위수에 닿으며, 지면이 평탄하고 토지는 비옥하여 관중평원에서 부유한 곳이다.


그러나 서주 말기 주평왕이 동으로 이주하면서, 후작 필국도 견융의 공격아래 나라를 잃는다. 종주(宗主)일 필만(畢萬)은 위(魏)의 땅을 봉지로 받고, 필씨는 위씨로 바꾼다.


춘추시대 삼백년동안 위씨는 삼가분진의 일원이 되고, 전국초기에는 더욱 발전하여 중원의 패주가 된다.


지연의 이유로, 강성한 위국은 부득불 사방의 적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국력에 손실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위나라사람들은 완강했고, 전국시대 후반기에도 굳건하게 우뚝 섰고, 국력을 항상 약하지 않았다.


이때의 위나라 영토에서 진나라에게 계승한 것은 기본적으로 없었다. 그러나 위나라의 영토는 여전히 적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인구가 많은 땅이었다. 대다수의 토지는 초(楚)나라와 송(宋)나라에서 빼앗은 것이다. 위나라를 최대의 적으로 보아왔던 초나라는 위나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올 능력이 없었다. 이를 보면 위나라의 군사력은 아주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나라는 비록 위나라를 격패시킬 실력이 있었지만, 위나라를 멸망시키려면, 1,2년안에 완성할 수는 없는 정도였다.


진시황은 자연히 생각하게 된다 이전에 여러번 써서 성공한 이간계를 쓰기로....


진시황이 고른 이간대상은 위나라의 종실 안릉군(安陵君) 위구(魏咎)였다.


안릉군 위구는 위왕가의 동생이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다. 이런 세상사를 잘 모르는 어린 사람은 바로 책반의 좋은 대상이다.


안릉군이 봉지는 안릉이다. 이 곳은 영릉(寧陵)이라고두 불린다. 그래서 안릉군도 영릉군이라고도 불린다.


안릉이라는 곳은 바로 위나라의 서부와 중심지대를 연결하는 곳이다. 위나라의 판도에서 유대작용을 한다. 만일 안릉이 진나라에 편입되면, 위나라서부의 소릉, 양성, 노량, 곤양등지는 맹지가 될 것이다.


진나라가 만일 위나라의 서부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날개 하나를 잃는 셈이 된다.


이 전략은 마치 이전에 본 것같다. 30여년전의 장평대전때 진나라가 한나라의 야왕(野王)등이 땅을 차지할 때, 상당군을 한나라의 맹지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 두 번의 계책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미가 있다.


진나라의 서신은 먼저 안릉군과 접촉한 바 있다. 이번에 진나라사신은 진시황의 패를 내놓는다. 진나라는 오백리의 봉지를 가지고 안릉성과 교환하자고 한 것이다.


오백리봉지는 안릉 오십리의 10배에 이른다. 유혹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한나라사람 내사등이 줄곧 승진한 것만 보더라도, 설사 진시황이 안릉군에게 오백리 봉지는 내리지 않더라도, 안릉구에게 오백리영지의 태수는 하도록 할 것이다. 이는 아주 큰 거래의 카드이다.


안릉군은 겉으로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앗지만, 진나라사람들은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았고, 오만명의 진나라군대를 안릉성의 아래로 보내어 안릉군에게 압박을 가한다.


진시황과 위료에게 의외였던 점이라면 안릉군에게는 진시황과 타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안릉성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정한다.


이번에 진나라사람들은 위나라사람을 저평가했었다. 이전에 한나라의 남양태수등과 조나라의 상국 곽개는 모두 한나라, 조나라의 종실구성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배신을 하고 진나라에 의탁할 수 있었다. 이 안릉군은 그러나 위왕가의 친동생이었다. 자연히 죽더라도 위씨가족의 명예를 욕보일 수는 없었다.


안릉군의 성안에 수천의 위나라병사는 안릉군 위구의 지휘하에, 한 명도 겁을 먹지 않고, 하나같이 앞장서서 성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면서 진나라군대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때를 기다린다.


이 오만명의 진나라군대는 안릉을 공격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진나라사람은 대량을 공격하기 전에, 숫자가 유한한 병력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았다.


안릉군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위왕가는 사신 당차(唐且)를 함양으로 보내어 강화를 청한다.


당차는 일찌기 30년전에 위나라조정에서 활약했다. 당시에 신릉군(信陵君)이 대장 진비(晋鄙)를 격살하고, 위나라군대를 지휘하여 조나라 한단을 구원하러 간다. 나중에 조나라의 한단에서 호풍환우하게 된다.


당차는 이때 신릉군에게 한 마디 한다: "일에는 알아서는 안될 것이 있고, 알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 있으며,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있고, 잊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도 있다." 그 뜻은 어떤 일은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하고, 어떤 일은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되고, 어떤 일은 잊어버려서는 안되고, 어떤 일은 마음에 기억하여두지 안하야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신릉군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당차는 아예 쉬운 말로 설명한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알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됩니다. 남이 나에게 덕을 베풀면 내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남에게 덕을 베풀면, 잊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진비 한 명을 죽여서 조나라 수십만명을 구했습니다. 조왕은 당신에게 감사하여 멀리 한단에서 교외로 나와 맞이했고 당신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공로를 마음에 새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신지화를 당할 겁니다."


신릉군은 자기가 한단에서 벌인 여러가지 황당한 풍류사를 떠올리고 돌연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에게 두 손을 맞잡고 감사드렸다: "가르침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당차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세상일을 잘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다.


몇년이 지나, 진소양왕 말기에, 진나라는 대외적으로 군사행동을 벌이는 일은 드물었다. 위나라는 진나라와 전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초 두 나라는 계속 위나라를 나눠가지려고 하였다.


당시 제, 초는 온 나라의 병력을 모아서, 위나라를 점령할 생각을 했고, 위나라에게 형세는 아주 위급했다.


그때 이 당차가 위나라의 사신으로 함양으로 가서 진소양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 "대왕은 일만승의 위나라를 망하게 하면 강한 제, 조를 적으로 두게 됩니다. 제 생각에 대왕의 모신들이 실수한 것입니다."


당차는 순망치한의 이치를 얘기했을 뿐아니라, 명확하게 말했다. 위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진왕의 신변에 있는 모신들이 일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당시의 상황은 위나라가 확실히 양대 대국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제, 초가 위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만일 정말 제, 초가 위나라를 나눠가진다면, 그때 책임추궁을 하게 되면 위나라를 지원하지 말자고 얘기했던 모신들은 그 책임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의 일은 자연히 진나라의 모신들이 당차의 편에 서서 말을 하고, 그 설득력은 당차 자신이 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차가 총명한 점이다.


진소양왕은 나중에 병력을 일으켜 위나라를 구한다. 당차의 한 마디로 강진의 채략을 정하고, 위나라의 위기를 해소시키며, 제,초의 병력을 흩어지게 하니, 일거에 곤란을 없애는 공을 세운다.


안릉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 노신 당차는 다시 한번 함양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다.


함양, 진왕의 궁전.


진시황은 이 기괴한 사신을 만난다. 그리고 말한다: "과인은 오백리 봉지로 안릉군의 오십리땅과 바꾸려고 했는데, 안릉군은 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왜인가.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인가?"


당차가 대답한다: "안릉군은 선왕으로부터 봉지를 받았습니다. 비록 천리를 주더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오백리에 불과함에야."


진시황은 당차의 말투가 이렇게 강경한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생도 천자의 분노를 맛보고 싶은가?"


당차가 말한다: "신은 맛본 적이 없습니다."


진시황은 예리한 눈빛으로 어정의 아래에 있는 당차를 내려보며 말한다: "천자의 분노는 백만의 시신을 만들고 천리에 피를 흘리게 한다."


당차는 늙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온다: "대왕은 포의의 분노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진시황이 웃으며 말한다: "포의의 분노는 기껏해야 모자를 받고 맨발로 머리를 땅바닥에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당차가 말한다: "그것은 용부(庸夫)의 분노입니다. 선비의 분노가 아닙니다. 전제가 왕료를 암살한 것은 양성습월(養星襲月)이고, 섭정이 한괴를 찌른 것은 백홍관일(白虹貫日)이며, 요리가 경기를 찌른 것은 창응격어전상(蒼鷹擊於殿上)입니다. 이 세 명은 모두 포의지사입니다. 분노가 아직 드러나지 않을 때에도 하늘에서 징조를 보입니다. 신까지 합치면 이제 네 명이 됩니다. 만일 선비가 분노하게 되면, 두 사람의 시신이 드러누울 것이고 오보(五步)에 걸쳐 피가 흐를 것이며, 천하인들은 상복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진시황은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한편으로 우습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늙은 당차는 닭잡을 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진시황을 암살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는 2년전에 형가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 때 진시황은 그 일로 분노한 것을 떠올린다. 지금 당차가 다시 자신과 동귀어진하겠다고 말하니, 진시황의 얼굴색이 좋을 리가 없다.


진시황은 어쨌든 모범적인 군주이다. 그는 당차를 징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시켜 그를 잘 대우해준다.


진시황은 안릉성에서 막혔다. 그러나 진군은 위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멈추지 않앗다.


진시황시대에 진군의 행동에서 한가지 큰 특징은 직접 육국의 도성을 쳐서 그 도성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기타 성읍은 가만히 놔두어도 붕괴되었다.


기원전225년, 비록 오래 쉬지는 못했지만, 진나라대군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에 병력을 이끄는 대장은 왕전이 아니고, 여전히 왕전의 아들인 왕분이었다.


이때 진나라가 한, 조, 연을 멸망시키는 것은 각각 내사등, 왕전, 왕분이 완성했다. 왕전가족은 공이 아주 컸다. 진시황은 왕씨가족의 병권이 지나치게 크다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전, 왕분 부자 2명은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다. 이들을 놔두고 쓰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쓰자니, 절대로 둘을 같이 쓸 수는 없다.


진시황은 왕분을 선택한다. 왕전은 함양으로 불러서 비밀리에 감시한다.


왕분은 연나라 옛땅에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나라에서 수만의 대군을 모은다. 여기에 먼저 안릉에 도착해 있던 진나라군대를 합쳐서 약 15만명으로 보무당당하게 위나라의 도성 대량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때의 대량은 일찌감치 깊은 참호를 파고, 성을 수리하여 전투준비를 마쳐놓았다. 위왕가는 비록 즉위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종실을 보위하여 그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결심이 아주 굳건했다.


대량성에는 8만이 주둔하고 있었고, 양초도 3년 쓸만큼 충분히 있었다. 왕분의 이 십여만 인마는 대량을 점령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성안의 위나라군대의 반격도 대비해야 했다.


왕분은 왜 병력을 더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일까?


진나라는 몇년동안 조, 연, 한의 영토를 점령했고, 각지역에는 수비군을 증파하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빼낼 수 있는 병력이 확실히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시황은 왕씨가족에 대하여 방비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병력을 주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기원전225년의 봄, 왕분은 15만대군을 이끌고 50만대군이라고 큰소리치며 대량성 아래에 도착한다.


대량성의 삽심리 범위내는 수목이 모조리 뽑히고, 집은 모조리 무너뜨렸다. 진나라의 도,창,검,극이 숲처럼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에 군대는 사기에 넘쳐 보였다. 계속된 전투에도 전혀 피로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량의 성벽위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의 동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이 한 장수가 진나라군대를 무시하며 냉소를 날리며 한 마디 한다: "만일 내가 왕분이면, 그리고 정말 병사들이 강하고, 사기가 높다면, 아예 피로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을 나서 싸우도록 만들 것이다. 현재 진군은 위맹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자신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습할까봐 겁내는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저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는 진여(陳餘)이다. 나이가 젊은 그가 이런 견해를 지녔는데, 십여년후에 그는 영릉군 위구를 보좌하여 복국에 참여한다. 보기에 세간의 사정은 인과관계가 있고, 재능이 있는 자는 언젠가는 폭발한다.


또 다른 위나라의 수비장수 장이(張耳)는원래 위나라 외황성의 수비장수이다. 이번에 도성 대량으로 와서 방어에 협력하게 했다. 그는 진군의 동향을 관찰한 후 담담하게 한 마디 한다: "병마가 용맹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약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고, 대오가 정연한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싸우기 싫다는 뜻이다."


장이는 문학적으로 진여의 견해를 개괄했다. 역시 수준이 더 높다. 나중에 장이도 영릉군 위구의 오른팔왼팔이 된다. 위나라의 복국이 성공하도록 도운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대량성이 함락된후, 진시황은 장이와 진여의 수급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이다. 장이는 현상금이 천금인데, 이는 환기의 금액과 같다. 진여는 현상금 오백금을 걸었다.


왕분이 대량에 도착한 오일째 되는 날, 진나라군대는 투석거, 공성거, 뇌목거를 모두 조립한다. 이제 전투는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햇볕이 내리쬔다. 대량성의 성안성밖에는 진,위 쌍방의 병기와 갑옷은 햇살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공기에는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흘렀다.


왕분이 진공한 첫날, 십산만오천의 대군을 보내고 자신은 1만5천의 인마로 중군대장(中軍大帳)을 수비하게 했다.


십삼난오천의 인마는 삼로로 나누는데, 각각 북문, 동문, 서문을 공격한다. 각각 4만5천명이다.


4만5천명은 다시 3조로 나누어 매조 1만5천명이다. 3조는 돌아가며 돌격하여, 공격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장했다.


즉, 남문은 남겨놓고 공격하지 않았다. 병력이 부족할 때 고대 전쟁에서 상용으로 쓰던 수법이다. 상대방에게 도망칠 퇴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의지가 굳건하지 않은 자들은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북소리가 울리자 기수들이 깃발을 질서정연하게 흔든다.


13만5천의 인마가 3개방향에서 대량성으로 포위공격한다.


격렬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힘을 발휘한 것은 쌍방의 원거리공성무기 투석거였다.


위나라군대는 성벽위에 있으므로 투석거의 서정거리가 약간 더 길었다. 큰 돌과 나무토막들이 하나하나 진군의 진지로 떨어진다. 그러면 땅 위에는 구덩이가 하나하나 생겨난다. 도망칠 여유가 없는 진군은 거의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되었다.


진군은 일찌감치 이런 장면에 익숙하다. 전우의 참상은 본체만체하며 하나같이 구호를 외치며 운제등 공성무기를 매고 물결처럼 대량성으로 전진한다.


위군의 두번째 화살이 검은 비처럼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그러나 진군의 장병은 하나같이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 머리, 몸, 그리고 대퇴부를 보호한다. 일반적인 화살은 단단한 갑옷을 둟을 수가 없다. 중량을 줄이기 위하여, 진군의 배후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자들이있다. 이는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호기이다.


비록 화살이 진군에게 그렇게 큰 살상력을 보이지 못했지만, 위군도 투석기의 사정거리를 줄이지 않았다. 위군의 투석거는 하나하나의 뇌석과 곤목을 멀리 보내고 있었다. 목표는 진군의 투석거이다.


위군의 지휘자는 잘 알고 있었다. 진군의 투석거가 사정거리내에 들어오면 성벽위는 지면처럼 광활하지 못하여, 위군은 숨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수백의 형제들이 쓰러지고, 진군은 호성하에 도달한다. 위군은 먼저 함정, 도자, 반마삭등의 장애물을 설치해 두었다. 이전 며칠동안 깊은 방에 진군에게 여러번 제거되기도 했다.


한줄 또 한줄의 운제가 호성하에 놓여진다. 진군중 선등지사(先登之士, 선봉대)들은 운제를 매고 호성하를 건넜다. 위군의 방어역량이 어찌 이렇게 약하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쉽게 진군이 성벽아래까지 도착하도록 하였을까?


진군의 선등지사들이 운제를 가설할 때, 성루의 위군도 새로운 무기를 하나 꺼낸다.


그중 무기의 주체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끈이었다. 한쪽은 나무조각을 묶고, 위군은 나무조각을 호성하에 걸린 운제로 던진다. 나무조각은 관성으로 즉시 운제를 휘감는다. 순식간에 뱀처럼 운제를 휘감는다. 이어서 몇몇 위군이 밧줄의 다른쪽 끝을 잡아당긴다. 운제와 위의 진군은 즉시 뒤집어진다. 물 속에 빠진 진군은 무거운 갑옷으로 숨쉴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물 속에 잠긴다.


위군의 이 끈은 기름에 여러시간 담궜다가 꺼내서 말린 것이다. 집어던질 때 가볍고 부드러울 뿐아니라, 인성이 충분했다. 일반적인 검으로는 몇 번을 내리쳐도 잘리지 않는다. 위군은 확실히 숙련되게 잘 다루었다. 그들 여러명이 운제 하나를 상대하고 모든 투수는 정확하게 목조를 운제에 감았다. 그 후에 남은 사람들이 줄다리기처럼 한 방향으로 줄을 끌었다.


위군의 이렇게 호성하운제를 상대하는 무기는 어떤 병법서에도 나타난 바 없다. 이런 특수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위군이 방어에 준비를 면밀히 했다는 것과 더불어, 위군중에 확실히 고인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호성하에는 운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뒷쪽의 진군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그냥 죽으러 나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모두 더 이상 운제를 가설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호성하를 건넌 진군은 또 다른 성위의 위군과 격전을 펼쳤다. 그들은 운제를 설치하고 하나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위로 기어오른다. 위군은 돌과 장창으로 맞이했다.


뒤에서 지원하는 병력이 없으므로 소수의 진군은 성벽위로 올라가긴 했찌만, 즉시 벌집처럼 칼과 창에 찔려버린다. 그 후에 성아래로 버려진다. 더 많은 진군은 투석기에 맞았거나 혹은 장창에 찔려서 성루의 아래로 떨어져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공성하던 진군의 마지막 인원의 비명성이 끊어지자 불처럼 뜨겁던 전쟁터는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왕분은 마음 속이 꽉 막힌 것같았다. 진군의 이번 진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난다.


반시진후, 진군은 인원수를 점검한다. 5천명이 전사했다.


성루위의 위군은 사상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기름은 쇠솥 안에서 부글부글거리고 있었다. 위나라장수들은 뜨거운 기름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확실히 남겨두자는 뜻이다.


다음 날, 진군은 모든 운제를 새로 고친다. 운제에 실목판을 붙여서 다시 맹공을 가한다.


위군의 신무기는 목판을 묶을 수는 없었다. 진군이 밤을 새워 개조한 운제는 작용을 발휘한다. 그리고 설사 일부 운제가 호성하로 떨어지더라도, 목판은 여전히 수면위에 더 있게 된다. 사람은 목판을 밟고 서 있을 수 있고, 끈을 잡고 건너편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도 진군의 날은 아니었다. 위군은 성벽 5미터 거리내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공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성벽에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틀동안 1만여명을 잃는다. 대량성안의 수십만의 군민은 한 명도 남문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왕분의 대량성을 흔들려는 계책은 실패로 끝난다.


삼일째 되는 날 풍운이 다시 바뀐다. 큰 비가 하루종일 퍼붓는다. 위군은 분명 불로 공격하여 방어를 돕게 할 수는 없다. 왕분은 다시 한번 진격한다이번에 위군은 성아래에 극독의 약수를 쏟는다. 독약의 물이 사람의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 코로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없다. 약수는 빗물에 섞여서 진군의 오관으로 들어갔다.


진군에 있어서 이번 진공은 더욱 참혹했다. 중독된 진군은 즉시 사망하지 않고, 계속하여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일쨰, 왕분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삼일동안 1만5천명을 잃었따. 상대방의 사상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런 전투는 계속 할 수가 없다.


왕분은 대량성 아래에서 저지당한다. 그는 강공책 유화책을 다 쓴다. 대량성안에서 담판하도록 사신을 보낸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진나라사신은 위군에 의하여 성루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살당한다. 수급은 깃대에 꽂혀서 높이 걸린다.


두 나라가 싸우더라도 사신을 죽이지 않는다특히 강한 진나라의 사신의 경우에는 전국시대 후기에 각 제후국을 오갈 때 대우가 아주 좋았다. 위나라는 그런데 진군의 사신을 참살한 것이다.


당시의 위왕가는 정식으로 즉위한지 겨우 이년여가 되었다. 사람은 젊지만 키는 크고, 양강의 기운이 충만했다. 위나라선조의 그런 강자에 굴복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만일 위왕가가 처한 시대배경이 강진약위(强秦弱魏)가 아니었고, 세력이 비슷하였다면 위왕가는 분명히 큰 업적을 냈을 것이다.


위왕가는 진국의 사신을 참살하도록 명령한다. 그 뜻은 아주 분명하다. 위나라와, 대량과 생사존망을 같이하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위왕가의 성격이나 성질은 그의 선조들과 똑같다 완전한 사나이이다.


위나라에서 진나라사신을 참살한 후, 왕분은 격노하지 않고 그는 명을 내려 잠시 퇴각하도록 지시한다. 부친으로부터 유전된 좋은 성격이 그를 구한 것이다.


금방 장마가 온다. 여러해동안 작은 비가 내려서 평지는 물로 넘쳤고, 진흙탕이 된다. 진군의 사기도 이 계속된 빗물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진군의 중군대장에서 왕분의 손가락은 양피지도위를 한번헌번 긋고 잇었다. 표정은 담담했고, 사람들에게 고심막측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장안의 두 사람의 백성모양을 한 사람은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양고기탕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파람에 게눈갑추듯이 먹어냈고, 온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먹어댔다. 마지막 육탕까지 후루룩 다 마셔버린 다음에 두 사람은 배를 두드린다.


왕분은 그제서야 서두르지 않으며 장안의 두 현지 백성들에게 말한다: "두분 선생, 저는 멀리서 왔습니다. 듣기로 부근의 물고기가 아주 신선하다고 하던데, 제가 사냥을 마친 다음에 큰 물고기를 잡으면 제가 여러분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양고기탕을 먹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두명의 강직한 백성은 즉시 대답한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당연히 사냥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지형에 익숙해지려는 것이 참이다. 며칠이 지나자, 진군은 물길이 어지럽게 얽혀잇는 대량지구의 지형을 잘 알게 되었다.


대량성은 위무후 시기에 건설된 것이고, 시간은 겨우 백여년되었다. 그러므로 건설의 규격이 매우 높은 편이고, 각 방면에서 주도면밀하게 고려를 했다.


대량은 성이 클 뿐아니라, 양쪽으로 물이 돌아간다. 한쪽은 황하이고, 다른 한쪽은 변하이다. 이 두 개의 강은 대량에서 겨우 십여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대량의 호성하와 황하, 변하는 구거로 연결되어 있다.


수리공정에서 위나라사람들의 열정과 기술은 모두 일류였다. 그들은 대량 부근의 황하에서부터 수백리의 운하를 판다. 이는 남쪽의 회하까지 연결된다. 이름은 홍구(鴻溝)이다. 즉, 대량성의 호성하에서 출발하여, 배에서 발을 떼지 않고도 초나라의 진(陳)등 성읍에 도착할 수 있다.


대량은 전국후기 중원의 가장 중요한 수륙의 교통요지이다. 비록 진군도 여러번 대량 부근까지 쳐들어왔지만, 남북으로 왕래하는 상인의 장사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일단 전쟁이 끝나면 각지에서 대량으로 통하는 큰길에는 수레와 말이 끊이지 않았다. 남북으로 오가는 수레행열이 교차하면서 주야로 강물처럼 끊이지 않고 오갔다.


왕분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대량부근의 산천과 하류를 익히고 대량에 수공을 하여 물에 잠기게 하기로 결정한다.


위왕가가 진나라사신을 참살한 후, 왕분은 분노한다. 그러나 흥분하지 않고 한편으로 진시황에게 병력증강을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친히 나서서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인마를 지휘하여 댐을 판다. 그리하여 대량을 물에 잠기게 하기로 결정한다.


얼마후, 댐과 물길이 계속 건설된다. 그리고 십여일의 큰 비를 준비하고, 댐의 물은 기세가 대단했다.


댐을 무너뜨리는 날, 백기가 언도를 물에 잠기게 했던 잔혹한 광경이 대량에서 다시 재연된다.


대령상 내외의 구거는 물이 범람하고, 성벽을 3일간 침수되며 여러 곳에서 무너지고 쓰러진다.


왕분은 병력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간다. 격렬하고 잔혹한 수중전을 벌인 후, 위나라의 중심인 대량성을 점령한다.


위왕가는 최후시기에 부득이 옥새와 호부를 내놓는다. 이전에 진군의 사상이 비교적 컸기 때무에, 왕분은 봐주지 않고, 그를 포로로 잡아 수거(囚車)에 싣고 함양으로 보내어 진시황의 처분을 기다리게 한다.


위왕가의 수거가 대량에서 멀리 떨어지자, '산적'의 공격을 받아 위왕가는 비밀스럽게 죽임을 당한다.


이백여년전, 삼가분진때 진정공은 조, 위, 한의 삼가에 죽임을 당하면서 이런 저주를 내렸다: "너의 후인들은 모두 곱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 뜻은 너희 삼가의 후손은 모두 비정상적으로 사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진나라의 마지막 국군이다. 그가 내린 것은 고독한 저주이다. 지금 이 저주는 모조리 실현된다. 한왕안, 조왕천, 위왕가,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 죽지 못했다.


죽기전의 위왕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내가 하늘에서 명을 받고, 선왕으로부터 왕위를 받아서, 조상의 기업을 고수하다가, 비록 죽지만 여한은 없다."


이어서 위왕가는 진시황을 향해서 독기서질 저주를 내뱉는다: "과인의 사후 시신의 악취가 수레에 있더라도 진정 이 자식은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다. 반드시 과인의 뒤를 밟게 될 것이다. 과인은 하늘에서 기다리겠다." 그 뜻은 내가 죽은 후 즉시 묘당에 묻히지 못하고, 나의 시신이 길가는 도중에 악취를 내뿜게 될 줄은 몰랐다. 진정 이 자식도 하늘이 반드시 너를 징벌할 것이다. 너의 결망도 나와 같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