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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나라의 굴기

by 중은우시 2014. 4. 29.

글: 이중천(易中天)

 

진나라의 굴기는 확실히 변법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변법은 어쩔 수 없이 몰려서 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진효공이 그의 "구현령(求賢令)"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후들이 진나라를 비천하게 여긴다. 추악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기계(奇計)를 내서 진나라를 강성하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한다.

 

진나라는 정말 제후들에게 멸시당했는가?

 

그렇다. 예를 들어 기원전632년 성복지전때 진나라는 참전국이며 승전국이다. 그러나 반달후의 천토지맹(踐土之盟)에 패주인 진(晋)과 동맹국인 제(齊), 송(宋)은 다 참석하고, 중립국과 패전국인 노(魯), 채(蔡), 정(鄭), 위(衛), 진(陳)도 참석하지만, 진나라는 참석하지 못한다.

 

참석하지 못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사실상, 진나라 군주는 비록 주천자에 의하여 이미 정식으로 제후에 봉해졌지만, 제후들은 그를 제후로 취급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평기평좌(平起平坐)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나라사람들은 '중국'의 맹회에 참석할 자격이 없게 된 것이다. 이때의 진나라군주가 진목공이지만. 나중에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진목공이지만, 당시에는 졸부취급을 당했다. 전통적이고 정종의 화인화족들은 이런 신출내기를 인정해줄 리가 없다.

 

이것은 당연히 차별이다.

 

행운인 점은 차별을 당하면서, 진나라사람들은 기가 죽지 않고, 하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더더구나 스스로 타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분발도강(奮發圖强)을 선택한다.

 

도강의 첫걸음은 바로 다른 나라로부터 멸시받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문화가 낙후되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상앙변법 이전에, 진나라사람들의 생활방식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 형제 형수 제수가 모두 한 방에 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유목민족의 장봉(帳篷)생활습관때문일 것이다. 다만, '남녀구분'이 엄격한 화족(華族)의 눈에 이것은 문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졌다.

 

둘째는 정치의 혼란이다. 기원전425년(즉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진(晋)나라 대부 조양자가 사망한 해)부터, 진나라는 40년간 안정되지 못했다. 한 국군(진회공)은 자살하고, 한 태자(헌공)는 승계하지 못했으며, 또 한 국군(출공)과 그의 모후는 함께 피살되고, 시신은 깊은 물에 빠뜨려진다. 그 결과 위무후는 진나라내란을 틈타 진목공이 빼앗아갔던 영토를 다시 회수한다.

 

문화낙후는 당연히 그들이 원래 오랑캐족이었기 때문이다; 정치혼란은 귀족의 독재와 전횡으로 국군의 권한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앙변법의 핵심사상은 바로 군주독재의 중앙집권이다.

 

변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춘추에서 전국까지>라는 책에서 이미 설명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하며;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며;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영주제를 폐지한 것은 원래 귀족에 예속되어 있던 신민을 중앙에서 직접 관할한다. 인민은 바로 국군의 것이다. 봉건제를 폐지한 것은 경대부의 채읍을 군현으로 바꾼다. 토지는 바로 국군의 것이다. 세습제를 폐지한 것은 모든 관리는 중앙이 임명하는 것이다. 권력은 바로 국군의 것이다. 토지, 인민 그리고 권력이 모두 국군의 손에 장악된다. 당연히 권력이 집중된다.

 

권력집중이후의 국군은 손안에 지휘봉을 가진 셈이다. 이 자유자재로 뒤흔들 수 있는 지휘봉은 바로 "군공(軍功)"이라고 부른다. 군공이 있으면, 농민도 제후에 봉해진다; 군공이 없으면, 귀족도 체면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진나라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전(公戰)에는 용감하지만, 사투(私鬪)에는 겁쟁이다."  즉 국군을 위하여 싸우지, 자신을 위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외국인만 죽이지, 진나라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고관후록을 위하여 사람을 죽이지 자그마한 이익을 위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살인기계인가?

 

그렇다. 진나라의 군공은 인두(人頭)로 계산한다. 적 1명을 죽이면 1급이 올라간다. 적의 수급만 들고 오면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는다. 한 손으로 돈을 건네며 한 손으로 물건을 받는다. 이런 "호랑지국"에 적수가 어디 있겠는가?

 

육국의 패배는 당연한 일이다.

 

확실히 상앙의 변법이 없었더라면, 진나라의 굴기는 없었다. 문제는 군현제는 진나라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 진(晋). 제는 모두 진나라보다 빨랐다. 변법을 시행한 것도 진나라만이 아니었다. 위나라의 이괴(), 초나라의 오기(吳起)도 모두 상앙보다 앞섰다. 그렇다면 최후에 이긴 것이 왜 진나라일까?

 

아마도 여기에는 문화적인 요인이 있는 것같다.

 

문화가 한 나라와 민족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기이하다. 대체로 말해서, 너무 적으면 안되지만, 너무 크면 골치아프다. 월(越)은 문화가 너무 적어서 손해를 보았다; 초, 송, 로는 너무 많아서 손해를 봤다. 송나라는 은상의 고국이다. 노나라는 주공의 후손이다. 초나라는 그 사이에서 이익을 주워먹었다. 춘추시기, 주나라의 왕자조(王子朝) 반란이 있었다. 패배한 후, 그는 왕실의 대량 전적, 기물, 지식인과 과학기술인원을 이끌고 피난을 간다. 그 결과 원래 '오랑캐의 땅'이던 초나라가 화하문명의 세번째 중심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유가는 노나라에서 나오고, 묵가는 송나라에서 나오고, 도가는 초나라에서 나온다.

 

진나라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백지였다.

 

백지이면 누구든지 채울 수 있다. 진나라의 문화공백을 채운 것은 바로 법가이다. 법가는 지역성이 없다. 누구든지 돈을 많이 내면 그를 계책을 내놓을 수 있고, 그를 위하여 목숨을 걸 수도 있다. 리괴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고, 신불해가 한나라의 재상이 되고, 오기는 초나라로 도망치고, 상앙은 진나라로 도망친다.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가장 법가에 적합한 나라는 역시 진나라이다.

 

법가는 선진제자중 비교적 특이한 부류이다. 유가, 묵가, 도가는 모두 이상주의자나 복고주의자이다. 도가는 태고(太古)를 그리워하고, 묵가는 우세(禹世)를 그리워하며, 유가는 동주(東周)를 그리워한다. 법가는 실용주의자이며 공리주의자이다. 그들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것이고,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는 천도(天道)를 얘기하고, 묵가는 제도(帝道)를 얘기하고, 유가는 왕도(王道)를 얘기하지만, 법가는 패도(覇道)를 얘기한다.

 

법가는 패도를 얘기하고, 진나라는 강성을 도모한다. 그러니 자연히 뜻이 맞게 된다.

 

하물며 진나라의 민풍은 원래 표한질박했다. 전국시대까지, 그들의 예술은 기껏해야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나라는 화하문명에 아직 동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연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산도구와 살인도구로 훈련되기 딱 맞다. 심지어 진나라에 인재가 부족했던 것도 장점이 된다. 사방에서 인재를 불러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객경(客卿)을 중용한 결과 한단계 더 귀족에 타격을 가하고, 군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일석양조라 할 수 있다.

 

법가가 크게 활약하면서 뜻을 펼친다. 기실 그들의 카드는 군권지상이다; 수단은 고관후록과 엄형준법이다. 상을 크게 내리면 용맹한 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압박을 강하게 하면 양민이 될 수밖에 없다. 상앙과 진효공은 이 패왕조항과 강온의 두 손으로 진나라를 하나의 농장과 하나의 군영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국적으로 보조가 일치하고, 기율이 엄격하며, 명령이 그대로 집행된다. 국왕이 명을 내리기만 하면, 맹수처럼 적에게 달려든다.

 

이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횡행패도는 아무도 막기 힘들다.

 

역대이래로 화하의 제후들은 진나라를 멸시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함어번신(鹹魚飜身)하였다. 이 자그마한 함어가 모든 큰물고기를 잡아먹엇다. 지금 그들이 하는 것은 화하문명의 수혈이 아니라 환혈이다.

 

진시황이 혁명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