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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멸한(秦滅韓): 진나라 천하통일의 시작

by 중은우시 2016. 5. 5.

글: 왕욱기(王昱祺)


역사상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탄탄하기 그지없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마치 진시황이 왕전에게 수십만의 병력을 딸려서 보내기만 하면 실타래가 풀리듯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상 진시황의 위대한 점은 육국을 통일한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교과서같은 통일과정을 써내어, 후세의 각 왕조가 새로 건립될 때이면 모두 진시황이 개창한 역사의 선율을 배우고 따랐다는데 있다.


진시황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몇년동안 맹장 환기(桓齮)는 조(趙)나라 병사 10만을 참수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이목(李牧)에게 패배당해 전군이 몰살당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전국시대의 리듬이다. 네가 한번 이기면 내가 한번 이기는 서로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력을 다투고, 군사력을 다투고, 명장을 다툰다. 만일 진시황이 이런 리듬을 계속했다면 아마도 그가 살아있을 때 통일대업을 완성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환기 사건이후, 진시황의 심정은 한때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가 이목을 이기지 못하는데 어떡하면 좋은가?


진시황이 정식으로 즉위한 몇년간 진나라의 조정은 안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진시황의 내각 삼공구경이 모두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승상은 현재의 총리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여불위가 떠난후에 이 자리에 앉힌 사람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왕관(王綰)이다. 당시 왕씨집안은 진나라에서 세력이 아주 컸고, 왕관은 그 중의 대표인물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이 누구나 탐내는 직위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어사대부. 부총리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창평군이 초나라로 돌아간 후, 풍거질(馮去疾)이 맡았다. 풍거질의 조부는 풍정(馮亭)인데, 당시 한(韓)나라의 상당태수(上黨太守)였다. 그는 진나라에 저항하기 위하여 상당군의 수비군졸을 이끌고 조(趙)나라에 투항하고, 이로 인하여 장평대전이 일어난다.


진시황은 아주 근면한 국군이었다. 그는 매일 죽간문서만 120근을 보았다. 5만자가 넘었다. 이는 현대소설 반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모두 언간의해(言簡意賅)의 고문으로.....


진시황은 거의 모든 일에 관여했다. 그래서 승상 왕관과 어사대부 풍거질은 크게 유명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일을 진시황이 처리하기 때문에 공로가 그들의 것으로 얘기되기 어려웠다.


삼공의 세번째 직위는 태위(太尉)인데 이는 군사를 관리하는 요직으로 국방부장관에 해당한다. 이 직위를 맡은 사람은 위료(尉繚)였다. 진시황의 통일과정에 위료의 공로는 아주 컸다. 단지 위료의 공훈은 모두 진시황에 의해서 덮혔을 뿐이다.


삼공의 아래에는 구경이 있다. 구경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위(廷尉) 이사(李斯)이다. 정위는 법무부장관에 해당하고, 이치대로라면 이 직위는 이름을 날리기 어려운 자리이다. 다만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등의 업무를 했는데, 모두 법률이 보장해줘야 했다. 이사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이름을 떨친다.


다시 이전의 이슈로 돌아가서, 환기가 이목을 이기지 못했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이런 문제는 확실히 승상, 어사대부, 정위의 직책이 아니다. 당연히 군사를 주관하는 태위가 책임질 사항이었다.


태위 위료는 진시황에게 진언한다. 대형군사작전을 통하는 방식을 바꾸어, 교묘한 방식으로 동방육국에 대응하자고 한다.


진나라의 함양왕궁에 있는 밀실 안에서, 위료는 이렇게 진언한다: "무릇 열국을 강한 진나라와 비교하면, 진나라의 군현에 상당한다. 만일 열국이 분산되면 쉽게 도모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나로 합치면 공격하기 어렵다. 삼진이 합하자 지백이 망하고, 오국이 합하자 제나라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대왕께서는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진시황이 어찌 각개격파의 이치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하여야 상대방의 합종을 깨트릴 수 있을까? 그래서 묻는다: "열국을 분산시키고 합치지 못하게 하려면 경은 어떤 계책을 내놓겠는가?"


위료는 그의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지금 국가의 정책은 모두 호신(豪臣)들이 결정합니다; 호신이 어찌 모두 충성을 다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재물을 탐하는 무리입니다. 대왕은 창고의 보물을 아까지 마시고, 나에게 삼십만금을 주신다면, 여러 나라의 호신들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서, 그들이 계책을 제대로 세우는 것을 흐트리면, 제후를 모조리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은 크게 기뻐했다. 당초에 위료를 임용한 것은 주로 그가 위나라 객경의 특수한 신분이라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불위, 노애, 장안군등과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위료가 인재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 인재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시황은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삼십만금은 거의 국고의 모든 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장래 분명히 원금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진시황은 아예 국고를 위료에게 넘겨주고 마음대로 꺼내가라고 한다. 아무도 어디에 쓰는지 묻지 못하게 했다. 위료는 그리하여 창고의 돈을 꺼내서 빈객,사자를 각각 보내어 열국을 다니게 한다. 쓸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후하게 뇌물을 주어서 그 나라의 국정을 살피게 했다.


진시황과 위료의 생각대로 열국의 호신들 중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재물을 탐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래서 내부로부터 상대방을 와해시킬 수 있었다.


위료가 큰 돈을 뿌려서 매수하는데 가장 먼저 대상이 된 곳은 바로 거리가 진나라와 가장 가까운 한(韓)나라이다.


한나라는 춘추시대의 대국 진(晋)나라의 후예이다. 첫번째 한인(韓人)은 이름이 한만(韓萬)인데, 진목공(晋穆公)의 손자이고 곡옥(曲沃) 환공(桓公)의 아들이다.


한인은 진나라의 종실이고, 진나라는 다시 주(周)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다. 한인은 그리하여 혈통이 고귀했다. 춘추 300여년동안 한인은 진(晋)나라내에서 열심히 노력하였고, 마침내 진(晋)의 십여개 대가족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삼가분진(三家分晋)'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한나라은 거의 절반의 시간동안 삼천군(三川郡)과 상당군(上黨郡)을 점거하고 있어, 실력이 비범했고, 강대한 군사력으로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진(秦)나라가 동진한 이래 한나라는 제일선에서 진나라의 진격에 저항하는 제후로서 100여년간 분전한다. 한인의 용감함과 충성스러움은 칭송할 만하다.


이 때의 한나라는 영토가 이미 예전만 크게 못했다. 상당군은 진(秦)나라와 조(趙)나라가 나눠가졌고, 삼천군은 대부분의 땅을 진나라가 점거했다. 남은 영토는 신정(新鄭)과 양적(陽翟)의 두 곳이다. 신정은 한나라의 도성이고, 양적도 옛도성이다. 한나라가 정(鄭)나라의 도성 신정을 함락시키기 전에 양적은 바로 한나라의 도성이었다.


양적이 소재한 이 지역을 한나라사람들은 남양(南陽)이라고 불렀고, 초(楚)나라의 남양과 서로 대응했다.


한나라의 남양을 지키는 태수는 등(騰)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름은 있지만 성은 없다. 선진(先秦)의 관례를 보면 그의 출신은 분명 명문거족이 아닐 것이다.


등은 명문거족출신이 아니고, 충성도도 세습귀족만 봇했다. 매수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위료가 주로 매수하려는 사람중의 하나가 바로 남양태수 등이었다.


춘추전국 수백년을 살펴보면, 일국의 장군이 싸우지 않고 적군에 투항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다. 사건을 일으켜서 도망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적에게 투항하지 않았다.


당시 장평지전 전에 한나라의 상당군은 맹지가 되어 있었다. 상당의 전후 두 태수인 근주(靳黈)와 풍정(馮亭)은 끝까지 투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의 기개였다. 현재 이런 기개를 바꾼 것은 바로 위료였다.


기원전331년, 환기사건이후 겨우 2년이 지난 때였는데, 한나라의 남양태수 등은 한나라에서 중용되었으면서 진나라에 투항한다. 이는 아주 나쁜 투항의 기풍을 열어, 중국에서 이천여년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을 접수한 후, 등은 계속 태수로 임명하지 않고, 그를 중앙정부로 불러들여 내사(內史)로 승진시킨다.


내사는 전체 관중의 방어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이고, 진나라 군정의 고위층중 한 명이다.


진시황이 이렇게 임명한 것은 바로 투항한 장수에게 어떤 댓가가 부여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육국의 장수들에게 보라는 것이다.


후세의 각 왕조에서 상대방에서 투항한 장수에 대한 대우는 결코 낮지 않았다. 전현적인 사례는 한무제때, 한나라군인들중에서 전공으로 후(侯)에 봉해지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광같은 경우는 평생동안 후에 봉해지지 못한다. 그러나 흉노의 많은 투항장수들은 투항하자마자 바로 천호후에 봉해지곤 했다.


한나라의 남양이라는 곳은 만일 진나라군대가 강공을 하면 한나라군대의 강궁과 경노를 상대해야해서 수만의 생명을 댓가로 치러야 했다. 공격으로 취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현재태수인 등이 방어하던 한나라군대를 이끌고 투항했다. 진나라는 오히려 몇만대군이 더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는 싸우지도 않고 상대방의 병사까지 얻었으니, 태수등을 내사로 승진시키는 것도 이치에 맞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사등의 관료로서의 길이 여기가 끝일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마음 속으로 분명히 알았다. 내사등의 능력은 대임을 맡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내사등의 잠재력은 아직 완전히 발휘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원전330년 즉 1년이 지난 후 진시황은 대군을 이동시키면서 철저히 한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한다.


진시황으로부터 병권을 상징하는 호부를 받은 대장은 왕전도 왕비도 이신도 몽염같은 나중의 명장이 아니라 바로 신인 내사등이었다.


투항한 후 1년내에 이런 중임을 맡다니, 도대체 진시황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


아주 간단하다. 내사등은 한나라의 조야와 군대에서 여러 해동안 있었고 한나라의 모든 것을 잘 알았다. 적의 창으로 적의 방패를 찌른다는 것이다. 효과는 당연히 더 좋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한나라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1년전에 투항한 장수는 진나라에서 이미 병권을 한손에 거머쥔 대장이 되었다. 만일 진나라에 투항한다면,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사등이 진나라에서 받는 대우를 보고 많은 한나라의 신하들은 망성리기 시작한다. 저항의 결심이 명철보신의 태도로 바뀐 것이다.


심지어 한왕안(韓王安)까지도 흔들렸다. 위료는 사람을 보내어 한왕만(韓王萬)에게 서신을 보낸다. 말인즉슨 한왕안이 투항만 하면 진나라군대는 한나라사람을 한 명도 죽이지 않겠으며 한왕이 주천자로부터 받은 후작의 자리를 보전해주겠다는 것이다.


격렬한 사상투쟁끝에 한왕안은 타협을 한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는 것과 싸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투항하면 최소한 백성들은 고생을 덜할 것이다.


한왕안은 소거백마(素車白馬)에 앉아서 손에는 호부옥새를 받쳐 들고, 신정의 남문을 출발하여, 상대편의 큰 말을 타고 있는 장수에게 투항한다. 그는 바로 예전에 수하였던 남양태수 등이다.


한나라의 멸망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 후에 이어진 것은 한나라의 각 세력이 새로 배치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한나라군대는 진나라군대로 편입된다. 한나라 귀족의 영지도 대부분 진나라 소유로 귀속된다. 진시황은 관리를 파견하여 신정을 관리하고, 원래 한국의 옛 땅은 진나라의 새로운 군인 삼천군(三川郡)이 된다.


단지 한왕안은 신정에 남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정요소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정을 떠나야,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어 진시황이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이전에 망국지군을 처리하는 방법은 삼가분진때 진(晋)나라의 국군은 북상당의 둔류에 유배된다; 전씨대제때 제나라의 국군은 동해의 작은 섬에 안치된다;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월왕은 회계에 안치된다. 대우에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원래의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고 엄밀하게 감시하는 것이다.


진시황은 이전 사람들의 방법을 따라서, 한왕안을 남군 영도(郢都)의 한 황산(荒山)에 유배시킨다.


한왕안을 감시하기 위하여 진시황은 내사등을 남군태수로 임명하고, 한왕안에 대한 연금을 책임지게 한다.


남군은 초나라의 원래 도성인 영도가 있는 곳이다. 초나라는 이곳에서 최소한 600년간 있었고, 초나라의 중심지역이다. 진나라가 남군을 점령한 것은 50년이 되지 않았다. 남군의 민풍민속은 여전히 초나라의 풍속이었고, 초나라사람은 남군의 군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계속 책동했다. 남군은 이때 암류가 흐르고 있었고, 언제든지 홍수가 되어 덥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남군은 진나라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였다. 남군태수는 임무가 중대하고 맡아서 잘 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재 남군에 다시 한왕안까지 추가되니, 불안정요소가 또 늘어난 것이다. 내사등이 남군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내사등은 남군에 도착한 후, 즉시 3가지 조치를 취한다.


첫번째 조치는 내사등이 각급 현과 향의 관리들에게 <양리와 악리>라는 글을 하달하여, 진나라의 법아래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관리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은 관리인지를 설명하고,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알게 하려 했다. 이곳은 진나라의 영토이고 모든 것은 진나라법에 따라 처리된다.


두번째 조치는 2개월이 지나고 나서, 다시 <치죄령>이라는 문건을 하달한다. 모두 무엇이 진나라법인지 알았을 때니, 이제는 죄가 있는 사람을 치죄할 것이다. 각급 관리가 만일 관할지역내의 사무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일률적으로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세번째 조치는 다시 2개월이 지나고 나서, 내사등이 인원을 대거 파견하여 현, 향에 보내어 살펴보게 한다. 졸지에 관리와 백성들은 전전긍긍하고,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고, 초나라의 구세력에 호응하지 못한다. 남군은 이렇게 하여 비로소 점차 안정된다.


한나라가 통채로 진나라에 투항하였지만, 내사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승진하지 못한다. 승진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지위조차도 보전을 하지 못한다.


한왕안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대신은 전답과 재산을 국고에 넣고, 약간의 가산을 남겨주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진나라는 새로운 관리를 대거 파견하여 신정을 접수한다. 한나라의 대신과 귀족은 모조리 하야하게 된다.


기원전226년, 한나라가 멸망한  4년 후, 초나라가 진나라에 반격하는 틈을 타서, 신정의 한나라 귀족들이 집단으로 모반을 꾀한다.


신정에서 복벽에 참가한 한나라귀족은 진나라수비군의 잔혹한 진압을 당하고, 한나라의 종실은 이번사변으로 모조리 숙청된다. 한나라에 충성하는 자들은 뿌리가 완전히 뽑혀 버린다. 십여년 후 항우, 유방이 거사할 때 각 제후국의 봉왕중에서 한왕은 항상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신정이 평정되고, 진시황은 남군태수 내사등에게 하나의 명령을 내린다: 한왕안을 죽여라!


이것은 어떤 명령인가? 1800년후 도르곤도 오삼계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남명황제를 추살하라!


영교의 교외에 있는 황산에 날이 약간 밝아왔다. 조락한 석도에는 한왕안이 포의를 입고 이슬이 눈썹에서 서리가 되어 있으면서 초초하게 척후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렸다. 신정의 반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온다. 족히 수십기는 될 것같았다. 만일 신정에서 보내온 척후라면, 분명 단기필마로 조용히 올텐데, 도대체 누가 오고 있는 것일까?


한왕안의유약한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눈빛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입에서는 탄식이 나온다.


기병이 달려오면서 길가의 들꽃은 속속 떨어진다. 꽃잎이 떨어지면 사람은 애간장이 끓는다. 한왕안의 안색은 이미 누렇게 되었고, 마침내 검을 뽑아 자결한다.


이백여년전, 삼가분진때 진정공은 조, 위, 한의 삼가에 의해 죽으면서 이런 저주를 내린다: "너희의 후손들은 모두 편안히 죽지 못할 것이다." 그 뜻은 너희 조, 위, 한의 후인들은 정상적으로 죽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진나라의 마지막 국군이었고, 그가 한 저주는 고독한 것이었다. 지금 이 저주의 3분의 1이 실현되었다. 조왕천, 위왕가의 운명은 또 어찌될 것인가?


한왕안이 자결할 때, 그가 본 것은 진정공의 고독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진시황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과인은 황산에서 죽는데, 너도 궁실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그 의미도 아주 분명하다. 나는 황량한 산에서 죽지만, 너도 함양궁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왕안이 죽었다. 남군태수 내사등이든 평사왕 오삼계이든 결국은 옛주군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고 역사에 악명을 남기게 된다.


내사등은 오삼계보다 좋은 편이었다. 그는 어쨌든 오삼계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악명도 그다지 멀리 떨치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무겁다. 예를 들어, 형가. 그의 적수인 진시황도 그를 존중했다.


어떤 사람의 삶은 기러기털만큼 가볍다. 예를 들어 내사등이다. 한왕안을 죽이면서 그의 관료생애는 끝이 난다. 일시를 풍미했지만, 역사는 그에게 가장 합리적인 자리를 준 것이다.


태수등의 기개는 말할 것이 없지만, 진시황은 상대방의 장수를 투항하게 하여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만든다. 이것은 통일의 진전을 훨씬 앞당겼다. 나중에 조나라의 곽개(郭開), 제나라의 후승(后勝)은 모두 진시황에게 매수된다. 진나라가 조나라와 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이들이 큰 공을 세운다.


곽개와 후생은 역사상 소인으로 적혀 있다.


진시황이 시작한 이 "싸우지 않고 상대의 병사를 얻는다"는 전략은 후세의 왕조에서 모방된다. 유방에게 만일 항우의 전선에서 투항해온 한신이 없었더라면 한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연이 만일 수나라의 옛 장수 이정의 투항을 받지 않았다면, 당왕조의 통일은 얼마나 늦추어졌을지 알 수 가 없다.


후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승진제(漢承秦制)" 즉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했다. 한왕조는 진나라의 관료제도와 각종 도량형을 그대로 썼을 뿐아니라, 더더욱 받아들인 것은 기질이었다. 진시황의 이 "싸우지 않고 상대의 병사를 얻는다"는 전략도 포함해서.


이후 난세는 수십년을 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삼국, 오대십국 등등. 통일의 속도는 전국시대보다 훨씬 빨라진다. 각로의 제후들은 다른 제후의 장수의 투항을 받고, 각로의 호걸도 역시 자신의 주군을 선택할 수 있다. 강자와 강자가 연합한다. 이렇게 하니 자연스럽게 통일의 진전이 빨라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