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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순욱 vs 곽가: 누가 조조의 제일모사인가?

by 중은우시 2016. 5. 17.

글: 섭지추(葉知秋)


곽가(郭嘉)가 사망한 후, 조조(曹操)는 매우 비통해한다. 친히 곽가의 집으로 가서 조문을 한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곽가)의 모공(謀功)이 높았다." 곽가의 죽음에 대하여, 성격이 교활하고 편협한 조조마저도 비탄에 빠져서, "슬프구나 봉효(곽가), 아프구나 봉효, 애석하구나 봉효."라고 소리친다. 그래서 공자가 안회의 죽음에 대하여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天喪予).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비탄해한 것이 생각난다. 조조는 일찌기 순유(荀攸)등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순유등은 모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데, 오로지 곽가만 나이가 가장 어렸다. 원래 후사를 곽가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백발인이 흑발인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38세의 곽가가 53세의 조조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조조의 곽가에 대한 감정은 군주의 신하에 대한 애석한 정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지음(知音)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정도 있다.


그러나, 조조는 일찌기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어, 순욱에게 곽가를 칭찬한 적이 있다. 이는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 것일 뿐아니라 다른 깊은 의미도 있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거나 후세의 사가들이 보거나, 곽가와 순욱 사이에 누구의 공이 더 큰지에 대하여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일대효웅 사마의가 순욱을 이렇게 평가했다: "책은 먼 일을 전한다. 내가 스스로 귀로 들은 것은 백 수십년간, 현명한 인재로 순령군(순욱)만한 사람이 없었다." 건안12년, 원소를 평정한 후, 조조는 여러 대신의 공로를 평가하면서 이렇게 인정한 바 있다: "충정밀모(忠正密謀), 무녕내외(撫寧內外), 문약(文若)이다. 공달(公達)이 그 다음이다" 순욱은 조조의 진영에서 공훈이 제일이고, 순유가 제2이다. 진수의 <삼국지>에서 순욱의 전기는 제10이다. 조위의 여러 황제, 동탁등 제후, 하후,조씨 다음이다. 외성공신으로는 첫번째이다. 그리고 순욱은 전후로 이천호를 받는다. 곽가는 제14로 순욱과의 사이에는 이십여명의 공신이 있다. 곽가는 살아 있을 때 겨우 이백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곽가가 죽은 후 왜 조조는 이렇게 융중하게 곽가를 높이 평가해주고, 곽가가 원래 갖지 못했던 영예를 준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근본적인 목적은 곽가를 빌어서 순욱을 치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조조의 서신에 어떤 내용이 쓰여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곽봉효(곽가)는 마흔도 되지 않아서 11년간 같이 지내면서 갖은 곤란은 같이 겪었다. 그리고 그는 통달하고 세상일에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하였는데 일찍 죽어서 그를 잃었으니 비통하고 상심했다. 이제 그의 아들에게 천호를 주었지만 죽은 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추념의 뜻만 깊어진다. 봉효는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천하의 사람들 중에 서로 아는 사람은 적다. 그래서 안타깝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둘째,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봉효를 추념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는 세상 일이나 병법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또한 그는 병을 겁내서 남방에 전염병이 돈다고 하니 항상 말하기를 '내가 남방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이 계책을 논하는데,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견식과 계책이 충후할 뿐아니라, 공로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었다. 일을 하는 마음이 그러했는데, 어찌 그를 잊을 것인가.


이 두 통의 서신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시간. 207년 곽가가 병사하고 212년 순욱이 병사한다. 두 통의 서신의 시간은 이 5년 사이이다. 둘째, 대사. 208년 조조는 순욱의 계책을 써서 형주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오나라를 정벌할 때 손유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한다. 211년 마초,한수의 연합군을 깨고, 212년 조조는 손권을 공격한다. 그리고 순욱이 병사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이다. 우리는 조조가 순욱에게 쓴 서신에서, 곽가에게 어떤 뛰어난 점이 있는지를 칭찬한다는 것이다. 그런 곽가의 장점을 순욱이 가졌는가? 순욱이 가지지 못했으면 또 어떠한가?


조조가 열거한 곽가의 장점 중에는 27세부터 조조를 따라 전후 11년간에 이르렀다. 이 점은 순욱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29세의 순욱은 일찌기 조조가 동군태수, 분무장군을 맡았을 때, 조조를 따랐다. 조조 군영의 모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조조를 따른 사람이다. 곽가는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를 잡은 후, 순욱이 조조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자격을 보면 순욱이 선배이다.


지혜모략이나 같이 환난을 겪은 것으로 따지더라도 곽가는 순욱과 비교할 수 없다. 순욱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로는 3가지이다. 첫째, 연주(兖州)을 안정시켜 근거지를 건립했다. 조조는 동탁과 싸우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은 다 써버렸다. 그후에 연주에 자리를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조조를 도와 연주를 경영하고 조조로 하여금 여러번 대패하고서도 근거지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순욱이다. 둘째, 관도전투 이전에 조조와 원소의 양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조조의 군량이 거의 바닥날 즈음에 전군의 상하는 조조를 포함해서 모두 퇴각을 생각했다. 이때 순욱은 중론을 물리치고 원소와 일전을 겨루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은 양초의 공급을 책임져서 조조로 하여금 뒷걱정이 없도록 해주었다. 순욱의 이 서신은 조조로 하여금 퇴각결정을 바꾸게 하였고, 결국 관도에서 원소의 주력을 궤멸시킨다. 셋째, 관도지전 승리후, 전군의 상하는 조를 포함해서 조조군은 현재 대승하여 효과를 보았으니 중단하고 회군하여 정돈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욱은 다시 한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계속 추격해서 끝까지 싸우자고 한다. 아군도 피로하지만, 원소의 군대는 더욱 심할 것이다. 일단 원소에게 새로 정돈할 시간을 주면, 조조군의 관도지전에서의 우세는 없어질 것이다. 조조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소의 세력을 철저하게 소멸시킨다. 당연히, 조조가 예주, 서주를 평정할 때, 조조가 동서로 정벌을 다닐 때, 순욱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계책을 내놓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욱이 없으면 조조의 승리는 있을 수 없었다.


조조는 순욱을 제후에 봉해달라는 상소를 올릴 때, 이렇게 말했다: "순욱의 두 가지 계책으로 망할 것이 살아남았고, 화를 복으로 바꾸고, 특별하고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는 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제(유방)도 지종지공(指縱之功)을 귀하게 여기고 박획지상(搏獲之賞)은 박하게 했습니다. 고인들은 유악지규를 높이 쳐주고, 공발지첩은 그 아래로 쳤습니다." 이는 한고조 유방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릴 때, 소하를 1등으로 하고, 소하, 장량등 모신들의 공로는 높이고, 조참 번쾌등 무장의 공을 낮게 취급했다. 군주로서 장막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중요시 하고, 그 다음이 공성야전의 공로라고 본다. 순욱은 확실히 조위정권의 소하이다. 말그대로 제일공신이다.


곽가는 순욱과 비교하여 하나의 큰 장점이 있다. 바로, "그는 통달하여, 세상 일을 보는데 망설이는 것이 없었다." 조조는 여러번 얘기했다. "매번 큰 일이 있거나 적을 맞이할 때 신이 의사결정을 못할 때, 곽가가 이를 이루어 주었다." 조조는 곽가와 지기이다. 많은 경우 자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의사결정을 못내리고 있을 때, 곽가가 나서서 의견을 내서, 조조로 하여금 그 결정이 가장 적합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즉 곽가는 의견을 낼 때, 조조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조조에게 유리하면 하고, 조조에게 불리하면 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조가 두번째 서신을 쓴 시간은 적벽대전 이후이다. 서신에서 곽가는 일찌가 자신이 만일 남방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곽가는 몸에 병이 많았지만 조조와 국사를 논할 때는 항상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한다고 말했다. 조조는 강조한다. 곽가가 계책을 내놓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고, 조조의 대업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런 곽가가 병사한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조조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신하가 군주를 위하여 힘쓰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아주 정상적인 원칙이다. 왜 조조는 이를 중요하게 언급하면서 순욱에게 얘기한 것일까?


순욱은 결단을 내릴 때 조조의 이해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고, 한황실에 유리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았다. 곽가는 조조의 신하이고, 순욱은 비록 조조를 위하여 일하지만 많은 정도에서 한왕조의 신하였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전투에서는 실패했지만, 정계에서는 한단계 더 올라갔다. 동소(董昭)를 우두머리로 하는 대신은 조조에게 국공(國公)을 취하도록 건의하고 구석(九錫)을 갖추어서 조조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욱등이 조조를 보좌하여 중원패주의 지위를 얻은 후, 조조는 점점 한황실을 보좌하는 승상에서 자신의 독립왕조의 군주로 변해갔다. 공을 칭하는 것은 바로 조조가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순욱은 조정에서 조조 바로 다음가는 중신이다. 덕행이나 위망에서 그에 비할 자가 없었다. 순욱의 지지는 조조에게 위공이 되는데 아주 중요했다. 동소는 특별히 순욱에게 서신을 한통 보낸다. 순욱에게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고 권한다. 동소는 주공단, 강자아(강태공)가 주성공을 보좌한 것과 전단이 제나라영토를 빼앗은 후 제양공을 맞아들인 사적을 열거한다. 이 세 명의 공신은 모두 영토를 떼어 받았다. 그 후에 말한다. "지금 조공은 세상이 뒤집어지고 종묘가 불에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정벌에 나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삼십년이 흘렀다. 여러 오랑캐와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고 한황실을 되살렸고 유씨의 제사를 이어갔다. 세명의 공신과 비교해도 큰 산과 언덕만큼 차이가 난다. 지금 다른 일반적인 장수나 공신들처럼 후에 봉하여 일개 현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 어찌 천하인들의 바램을 만족시켜 주겠는가. 동소는 조조의 공로가 이미 이렇게 크다고 보았다.


그러나 순욱은 공개적으로 표시한다. 조조는 원래 의병을 일으켜 조정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고 마음 속에는 조정에 대한 충성이 있다. 그리고 겸허하고 양보할 수 있다. 군자로서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아껴야 한다. 동소 같은 사람은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정명한 순욱이 동소의 행동이 바로 조조의 뜻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다만 순욱은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다. 허도의 백관은 대다수가 생존을 선택하고 이익을 선택하는데, 순욱은 여전히 자신이 한왕조의 신하라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조조가 곽가는 통달했다고 칭찬한 것은 순욱에 대하여 그런 변통을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기실 조정의 문무대신은 대부분 조조의 일당이다. 순욱 너는 왜 항상 나의 반대편에 서려 하는가. 곽가가 죽고나서, 조조는 그의 아들에게 상을 내린다. 이것은 순욱에게 만일 네가 계속 나에게 대항한다면, 자손들에게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조조는 곽가를 지기로 여기면서 감탄한다. 너 순욱은 왜 나 조조의 고심을 몰라준단 말인가. 곽가는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면서 나 조조를 위하여 일했는데, 왜 순욱 너는 예전에 나의 스승이었고, 여러해동안 친구였는데 왜 재난이 지나가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가 되었는데 나의 정적이 되려 하는가.


조조는 순욱에게 암시한 것이고, 순욱에게 권한 것이고, 순욱에게 경고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이 두 통의 서신의 진실한 목적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