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부걸(張溥杰)
이천여년전에,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의 난이 일어난다. 이 의거의 남자1호주인공과 2호주인공은 진승, 오광 두 사람이다.
현재 보편적인 견해는 진승오광은 농민의 난의 비조라는 것이다. 그들의 반란은 가가가읍(可歌可泣, 찬미하여 눈물을 흘릴만큼 감동적인 것)할 만하다. 다만 마지막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필자는 진승오광의 난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진승오광의 난의 경과를 한번 복원해보자.
진이세원년(기원전209년) 칠월, 진승오광과 그의 팔백여명의 빈민은 죄인으로 징집되어 어양(漁陽)을 지키러 가는 중이었다.
행군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린다. 이때의 진승,오광은 대오에서 윤번제로 대장이 되는 제도에 따라, 대오의 오장(伍長)이 되었다.
그러나, 비가 너무 세게 와서, 도로는 진흙탕이 되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정한 기일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왕법에 따라, 머리가 잘리게 된다.
큰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의 지향과 포부를 볼 수 있다. 폭정앞에서 어떤 사람의 선택은 은인과 순종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순민(順民) 성격이다. 설사 도도(屠刀)를 그의 목에 걸어도, 그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별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만일 주상이 법외개은(法外開恩)하고 용서해서 죽음을 면하게 해주면, 그것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마지 않을 일이다. 오로지 적담충심으로 보답해야 한다.
다만 그들은 시종 운명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손을 펼쳐, 자신의 운명선이 분명히 보이는지 볼 생각을 않는다. 자신의 두 손이 자신의 운명선을 꽉 쥐고 있는지 보지 않는다. 만일 가능하다면 꽉 쥐어야 할 일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순민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묘당에 단정히 앉아서 온갖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 사람이 우리보다 고귀한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노비가 될 운명인가. 설마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도금했단 말인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수갑을 차고 있고.
진승오광은 바로 이 깊이 잠든 사람들 주에서 비교적 일찍 깬 두 명이다. 그들은 기한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때 죽는다. 도망쳐도 죽는다.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분기하여 반항하는 편이 낫다. 기껏해야 죽기보다 더하겠는가?
당시 진나라의 통치자는 바로 역사에 악명이 자자한 진이세, 호헤이다. 환관 조고가 조정을 장악하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다. 천하고진구(天下苦秦久)이다.
원래 황위를 계승했어야 할 부소는 민간에서 비교적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호해의 일당이 비밀리에 살해했다. 백성들 중 많은 사람은 부소가 이미 죽은 줄을 몰랐다. 그래서 항상 그가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행방불명된 사람은 초나라의 항연(項燕)이 있다. 바로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의 부친이다. 항연은 일찌기 초나라를 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초나라사람들은 그를 아주 존경했다. 진승오광은 이것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부소와 항연의 명의를 빌어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진승,오광은 괴력난신의 사건을 빌려서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신격화시킨다. 그들은 먼저 어부가 건진 물고기의 뱃속에 "진승왕(陳勝王)"이라는 포백(布帛)을 집어넣는다. 병사들이 발견한 후, 모두 놀란다. 소위 "진승왕"은 진승이 왕이 된다는 뜻이다.
저녁에 진승은 다시 오광으로 하여금 여우를 붙잡아서 주둔지의 옆에 있는 숲 속의 한 고묘로 데려와서 인화(燐火)를 만들고, 여우의 소리를 배워서 "대초흥(大楚興), 진승왕(陳勝王)"이라고 한다.
진승오광은 세만들기에 성공한다. 다음 날에 바로 그 효과를 보았다. 오광이 평소에 그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사람들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온다.
오광은 그보다 한등급 높은 장위(將尉)에게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후, 고의로 도망칠 것이라는 뜻을 흘린다. 이렇게 하여 장위가 격노하게 만든다. 술에 잔뜩 취한 정위는 과연 오광의 함정에 걸려들어, 채찍을 들어 오광을 때린다.
마음이 급해진 장위는 심지어 검을 뽑아서 본보기로 그를 죽이겠다고 소리친다. 오광은 이 기회를 틈타 검을 빼앗아 정위를 죽인다. 진승도 뒤를 이어 두 명의 정위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깃발을 들고 일어서자고 호소하며, 석파경천(石破驚天)의 말을 내뱉는다: "황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
여기까지 보면, 진승오광의 반란을 위한 노력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인정할 만하다. 첫째, 당시 국내형세에 대한 분석이 아주 투철했다. 원래 천하고진구였다. 백성들은 밤낮으로 명군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절대로 이것이 제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진왕조의 제도는 가장 좋은 제도였기 때문이다.
어렵게 진시황이 죽었는데, 원레 황위를 계승해야할 부소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의 갈등은 더욱 격화된다.
진승오광은 이러한 일촉즉발의 사회민감문제를 이용한다. 그리하여 부소와 항연의 기치를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둘째, 우리는 말한 바 있다. 진승오광의 여론조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괴력난신을 이용하여 진승의 이미지를 수립했다. 진승은 원래 사회하층에서 생활하던 밑바닥인생에 불과했다. 일찌기 고용되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과진론>의 작자인 가의에 따르면, "옹유승추(瓮牖繩樞,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며 맹예지인(氓隸之人, 천민)이고, 천사지도(遷徙之徒, 변방으로 유배되어 병졸이 되는 자)이다."
다만, 이처럼 재능이 일반인에도 미치지 못하고, 공자, 맹자같은 학식도 없는 사람이, 일련의 세만들기활동을 거쳐, 수백의 부하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시에, 천하에서 그에 호응하여 운집하였다. 얼마후 진승은 세력을 빌어 스스로 왕이 되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한다. 국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장'이 동사이며 장대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은 명사로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지간에 그 뜻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이렇게 기세등등하고 여론과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준비한 반란활동의 두 주인공인 진승과 오광은 왜 결국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였을까? 그들의 패배와 죽음은 그들의 반란이 철저히 실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승오광의 패배와 사망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연성은 바로 그들의 구호에 있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없다면" 너같이 농사짓던 진승조차도 스스로 왕이 되는데, 우리는 왜 안된단 말인가? 진승이 스스로 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일부 수하, 그리고 다른 지방의 일부 진왕조의 폭정에 시달리던 사람은 속속 독립하여 왕이 된다. 크고 작은 왕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것이다.
다만, 진왕조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즉시 명장 장한을 파견하여 진압한다. 유병산용(遊兵散勇)의 잡군은 원래 훈련을 제대로 받은 정규군과 차이가 컸다.
하룸려 모래알같은 유병산용은 정교한 무기도 없고, 통일된 작전계획이나 통일된 지도자도 없었다. 피차간에 마음 속에는 앙금이 남아 있었다. 진왕조가 아무리 부패해도 이런 오합지졸에게 패배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승,오광의 세력은 적지 않게 분산되어 있었다. 패배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승은 자신의 차부(車夫)의 손에 죽는다. 오광은 진승이 죽기 전에 대장 전장(田臧)의 손에 죽는다.
오광의 죽음은 약간 괴이하다. 왜냐하면 오광은 형양에서 독전하다가 수하 전장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는 진승에게 보내어진다. 진승은 이 특수한 선물을 받은 후, 전장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의 관직과 작위를 올려준다.
전장이 오광을 죽인 원인에 관하여,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진나라군대가 도착했다.....지금 가왕(假王, 오광을 말함)은 교만하고 병법을 모르고 계책을 모른다. 죽이지 않으면, 일을 망칠까 두려웠다."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인 것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은 것은 진승의 태도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진승의 의거이후, 교만방자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서 점점 형제들에게서 멀어졌다고 말한다. 오광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좋은 사례라는 것이다. 그외에 또 다른 사례도 이를 방증한다.
당시 진승과 다른 사람이 같이 고용되어 밭에서 일을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귀하게 되면 서로 잊지 말자."
그러나, 진승의 동료들은 모두 비웃었다. 평생 땅이나 팔 운명이면서 왜 땅 속을 관리할 걱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다만 진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작안지홍곡지지재(燕雀安知鴻鵠之之哉, 제비나 참새같은 작은 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같은 큰 새의 마음을 알겠는가)" 과연, 진승은 성공한다.
진승이 왕을 칭한 후, 진현(陳縣)에 정권을 수립한다. 옛날에 밭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막 궁문을 두드리자, 수비병사들이 체포한다. 그중 한 동료는 가마를 막는 방식으로 진승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한다.
진승은 그를 궁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자는 유모모가 대관원에 들어간 것같이 가는 곳마다 감탄하고, 보는 물건마다 기이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중에 궁전을 자주 드나들게 되니 갈수록 방자해져서, 하루종일 진승의 옛날 일을 떠벌이고 다니는 것이다.
진승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더 참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승에게 그를 죽이라고 건의한다. 진승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를 죽여버린다. 진승의 다른 옜 동료들은 그가 죽는 것을 보고는 모조리 흩어져 버린다.
누군가 이 일을 진승이 군중에서 유리된 증거라고 말한다. 진승의 실패원인을 여기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기실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라. 진승은 이미 옛날의 진승이 아니다. 옛친구를 불러서 접대하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당시 그 권력을 숭배하던 시기에, 만일 진승이 그들 옛 동료들도 그와 같았더라면 진승이 나중에 어떻게 위신을 세우겠는가. 그래서 이 점에서는 진승의 조치에 찬동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진승이 실패한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비록 그는 차부의 손에 죽었지만, 진승이 패배한 것은 그의 출신때문이다. 그는 관료자제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일련의 세만들기 활동을 통하여 그의 출신을 만들어 냈지만, 그를 따라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빈민들을 제외하고 일부 호걸이나 현사들이 호응했다. 생각해보라 그보다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이 기꺼이 죽어라 그를 위해서 일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유방을 가지고 비유할지 모르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방이 그래도 정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깡패에 가까운 그는 일찌감치 강호에서 구르는 법을 배웠다. 원만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사교기술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여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큰 일을 성사시키려면 성의있는 마음 이외에, 죄우봉원(左右逢源), 팔면영롱(八面玲瓏)의 재주가 있어야 한다.
확실히 진승에게는 이런 재능이 없었다. 그가 전장이 오광을 죽인 것을 추궁하지 않은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생쌀이 밥이 되었다면 더 이상 책임을 추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너무나 쉽게 믿는다. 기본적인 사고나 판단능력이 모자란다.
예를 들어 진승이 후기에 가깝게 지닌 주방(朱房)과 호무(胡武) 두 사람은 진승이 그들 둘에 대하여 너무나 마음을 놓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권력을 농단하고, 이로 인하여 다른 장수들이 진승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어떤 사라은 이 모든 것을 농민계급 자신의 한게라고 습관적으로 얘기한다. 농민계급은 선진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잘못이다. 왜 그런가? 잊지 말라 당시가 무슨 사회인지, 그 때는 노예사회에서 막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농민계급이 선진성을 갖지 않았다면 누가 가졌단 말인가?
필자는 진승오광이 실패한 원인을 이렇게 본다. 첫째, 그들은 농민반란에서 최초의 위대한 시험이었다. 패배하는 것이 피하기 어려웠다. 둘째, 그들은 출신이 비천하여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어려웠다.
다만, 진승,오광의 패배가 그들 반란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들은 농민반란의 첫번째 시도라고. 그들의 의거이후, 각지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났고, 나중에 유방, 항우들도 그들의 족적을 따른다.
비록 진승,오광은 패배하여 죽었지만, 나중의 반란이 그들의 유지를 계승한다. 그리하여 유방이 한왕조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유방이 천하를 빼앗은 후, 삼십호를 파견하여 진승의 무덤을 지키게 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 이를 통하여 선구자에게 존경의 염을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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