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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의 작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6. 5. 1.

글: 자주군(煮酒君)


홍루몽의 작가가 누구냐고 얘기하면 아마도 90%이상은 조설근이라고 말할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같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기실 중화민국시대에 이루어진 하나의 고증때문이다.


홍루몽은 처음에 <석두기(石頭記)>라고 불리웠고, 최초의 여러 판본에서 홍루몽은 완본이 아닐 뿐아니라 서명(署名)도 없었다. 청나라때도 홍루몽에 관하여 고증을 한 논술이 있다. 청나라말기 서가(徐珂)가 편찬한 <청패류초(淸稗類鈔)>에 이렇게 기록했다: "조설근이 찬(撰)한 <홍루몽>이라는 책이 유행한지 오래되었다. 사대부들 중에 이를 공부하는 자들은 '홍학'이라고 칭한다"


중화민국시대에 이르러 소설의 작자를 고증하기 위하여 2개의 파가 생긴다: 하나는 채원배 선생과 그의 명저인 <석두기색은>을 핵심으로 하는 구파로, 홍루몽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흥하는 갑신지변을 전후하여 명왕조의 유민이 남긴 은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호적의 <홍루몽고증>을 위시한 신파로, 홍루몽은 조설근이 자기 집안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는 것이다.


<홍루몽>의 보급과 더불어, 주제와 종지에 관한 해설도 각각 달랐다. 홍루몽의 작자도 수수께끼로 된다. 호적은 서방학술을 건가(건륭가경)고증법을 결합시켜, 원매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이런 문구를 찾아낸다: "조자설근(曹子雪芹)이 찬한 홍루몽 책은 풍월번화의 성함을 기록하였다. 이는 그의 선조가 강녕직부로 있었던 것이며, 소위 대관원이라는 것은 지금의 수원의 옛 터이다. 아쉽게도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적다. 나는 그 초본을 보았을 뿐이다."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전이라고 하였고, 호적은 수원이 바로 대관원이라고 널리 선전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힐강의 반박을 받았고, 그 후에 호적의 제자인 유평백, 주여창이 호적의 주장을 널리 펼쳐서 신홍학이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구홍학은 점차 희미해져서 역사에서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호적이 옳았던 것일까?


조설근이 누구인가? 역사상 정설은 없다. 호적은 조설근의 부친이 조부(曹頫)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유서(裕瑞), 영충(永忠), 명의(明義), 원매(袁枚)등의 필기이다. 다만 이들은 모두 조설근을 만난 적이 없다. 그저 당시의 소문에 근거하여, <홍루몽>을 그가 썼다고 말한 것이다. 호적도 절대적인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많은 일들은 현지의 현지(縣誌)에 근거하여 상상한 것이다. 조설근의 진실한 신분이 무엇인지, 강년직조의 조씨집안 후손인지(족보에 그의 이름은 없다. 그래서 유복자, 사생아설도 있다)도 고증할 방법이 없다.


홍루몽은 계속 수초본(手抄本)의 형태로 세상에 전해졌다. 건륭연간에는 이미 엄청나게 많았다. 호적은 <홍루몽>을 건륭초기 저작이라고 비정했다. 다만 80회를 다 쓴 때로부터 전파까지 겨우 수십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적와 주여창은 2년의 시간을 들여 16회의 구본(舊本)을 베껴썼다. 조설근은 젊은 나이로 죽었고, 글을 쓴 시간은 기껏해야 20년을 넘지 않는다. 100회의 홍루몽을 쓰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물며 16살에 집안이 몰락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지식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사람들이 의문을 품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홍학자들은 오로지 조씨집안만을 파고 있다. 족보를 보고, 묘석을 발굴하여 <홍루몽>은 조설근의 가족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신홍학이 '과학고증'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게다가 신파홍학자들이 대거 떠들어대어서 구홍학은 거의 압사당했다. 이것은 문학상의 억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홍학가들은 지연재비본에 얽매어서, 한 마음으로 후20회는 무엇인지를 알아래려고 한다. 조설근의 가족고사를 틀로 하려고 하나 기실은 블랙홀이다.


오늘 우리는 호적을 넘어서서, 채원배의 색은을 이용하여, 홍루몽의 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몇 가지 가능성을 보기로 하자. 홍루몽에는 몇 가지 단서를 남겨 놓았다.


1. 견영련(甄英蓮)은 기실 유여시(柳如是)를 암지(暗指)한다. 유여시의 처음 이름은 양영련(楊影憐)이다.

2. 유여시가 거주한 곳은 강운루(絳雲樓)이다. 홍루몽의 강운루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3. 임대옥과 동소완의 이야기는 닮았다.


채원배의 <석두기색은>은 이 책을 명나라의 멸망을 애도하고, 청나라의 잘못을 얘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청지사로서 채원배는 일찌기 청나라의 고관을 암살하려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여러 관점은 채원배와 공명을 이루었다. 그는 <홍루몽>의 최초판본은 단지 공공도인의 <풍월보감>인데, 조씨 후인이 가져간 후 <석두기>로 고쳐썼다고 본다. 조설근은 그저 필명으로 본다.


홍승설(洪昇說)


이 주장은 길림 토묵열(土默熱) 선생이 내놓은 것이다. 홍승은 강희연간의 희곡대가로, 저명한 작품 <장생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도화선>의 작가인 공상임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강희43년, 강녕직조 조인은 남경에서 완본 <장생전>을 공연한다. 홍승은 초청을 받아 가서 감상한다. 그는 감상후에 술에 취해 실족하여 죽는다.


사람들은 홍승이 작가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홍승의 <장생전>과 홍루몽의 구조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의 저작 <직금기>의 도주, 소혜, 조양태, 농금과 <홍루몽>의 가련, 왕희봉, 우이저, 추동의 이야기는 똑같다. 홍승의 고향은 화오(花塢), 홍원, 대관루, 우향교, 추설암, 천제묘, 충허관, 수선사, 태허루, 수월암, 철감사, 죽창, 취월체등은 모두 <홍루몽>에 나온다. 홍숭의 말년작품인 <사선연>에는 보옥, 채, 대, 환, 봉, 원, 영, 탐, 석, 상운, 원앙, 금훈, 채운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오매촌설(吳梅村說)


이 주장은 무순시의 부파(傅波), 종장산(鍾長山) 선생이 내놓은 것이다. 오매촌은 오위업(吳偉業)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명말 강좌3대가의 1인이며, 저명한 묵학가이다. 호는 매촌이고, 서록초생(署鹿樵生), 관은주의(灌隱主人, 대운도인(大雲道人)이라고도 불렀다. 만주족의 침략시기에, 절개를 굽히고 북상하여 청나라에서 관직을 얻었으나, 심신이 모두 피로해져서 그 후에 강남에 20년간 은거한다. 암중으로 반청결사운동을 하는데, 강희10년 오매촌은 병사한다.


오매촌설의 증거는 초기판본의 <홍루몽>에 나오는 글이다: "오옥봉(吳玉峰)은 제목을 붙여서 <홍루몽>이라 했다; 동로(東魯)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풍월보감>이라는 책은 그의 동생인 당촌(棠村)이 서문을 썼다." 위에 나오는 세 사람의 이름을 조합하면 바로 "오매촌'이 된다.


<홍루몽>에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의 원형은 오매촌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청량산찬불시>에 묘사된 순치제와 동악비의 사랑이야기는 <홍루몽>의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과 아주 유사하다. 오매촌 본인도 진회팔염의 하나인 변옥경(卞玉京)과 정을 나눈 바 있다. 명나라가 망한 후 변옥경은 산으로 올라가서 도사가 된다. 이 경력도 묘옥의 도사라는 신분과 들어맞는다. 오매촌이 "죽은 후에 승려복장으로 염했다." "묘의 앞에 둥근 돌을 세웠다."는 것도 <홍루몽>의 석두기의 뜻과 맞아 떨어진다.


모벽강설(冒辟疆說)


이 설은 모벽강의 후손인 모염천(冒廉泉)이 내놓았다. 모벽강의 이름은 모양(冒襄)이고, 자가 벽강이며, 호는 소민(巢民)이다. 또 다른 호는 박소(朴巢)이다. 강소 여고 사람이다. 명신종 만력39년에 태어났고, 강희제 32년에 사망한다. 명나라의 복사4공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처는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동소완이다. 모벽강은 생활이 호화사치스러웠고,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용모가 준수하며, 시작은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그의 <영매암억어>는 자신과 동소완의 처연하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를 묘사한다. 오늘날 읽어본 사람들이 모두 감탄해 마지 않는다.


모양은 공자로 호의호식하며 노비가 많았다. 사서에 기록된 것을 보면 모벽강은 향차, 향훈을 좋아했고, 문아하기 그지없었다. 동소완과는 마음이 잘 맞았고,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할 때, 모벽강은 암중으로 청나라에 항거하다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한다. 그리고 며칠동안 큰 병을 앓는데, 동소완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를 밤낮으로 안고 있는데, 모벽강의 병이 나은 후 동소완은 피로가 쌓여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이 경력도 가부의 상하와 똑같다.


명나라때 모양의 선조인 고증조부 모승상은 매우 부유했다. 여고의 모가항의 양측은 모조리 모씨집안의 저택이었다. 당시 모양은 서부(西府)에 살고 있었고, 모양의 조부 모몽령이 지은 것이다. 모양의 부친과 두 서출동생은 동부(東府)와 규모가 비슷했다. <홍루몽>의 영국부(榮國府), 영국부(寧國府)에 대응된다. 모부에는 "응희당(凝禧堂)"이 있는데, 가부에는 "영희당(榮禧堂)"이 있어 서로 대응된다.


채원배는 동소완이 바로 임대옥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동소완은 재주가 뛰어나고, 시와 그림이 뛰어났다. 임대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다수선감(多愁善感)했다. 신세가 처량하고 힘든 것을 비탄했고, 고방자상(孤芳自賞)하는 기여자였다. 동소완은 박명여자로 나이 겨우 27살까지 살았고, 임대옥이 죽은 것도 20여살이 넘지 않았다. 관련문헌에 따르면, 모양은 일생동안 십여명의 여성과 애정관계를 맺는데, 이름과 성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는 부인 소원방(蘇元芳) 외에, 왕절(王節), 이상정(李湘貞), 진원원(陳圓圓), 동소완, 오기(吳琪), 오구구(吳扣扣), 채여라(蔡女蘿), 김효주(金曉珠), 범각(范珏), 사구원(沙九畹), 양의소(楊漪炤)가 있다. 이들 여인들은 모두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었으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모벽강은 당시에 풍류로 유명한 미남자였고, 생활과정은 가보옥과 유사했다. 금릉십이채와 관련이 있다. 게다가 그는 전겸익, 오매촌과도 관계가 아주 좋아서, 유여시, 변옥경의 일을 적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방이지설(方以智說)


중국과학대학의 진현성(陳賢星)은 방이지설을 내놓았다. 방이지의 자는 밀지(密之)이고, 호는 만공(曼公)이며, 또 다른 호는 녹기(鹿起), 용면우자(龍眠愚者)등이 있다. 법명은 홍지(弘智)이다. 그는 명나라때의 저명한 사상가로 중서합벽, 유불도 삼교귀일을 주장했다. 문,사,철,지,의약,물리,각종 학술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방이지는 동성파(桐城派)의 개산비조이고, 가학의 연원이 깊고, 명나라때 복사4공자의 한 명이다. 풍류를 아는 대재자였따.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할 때, 방이지는 출가하여 중이 된다. 암중으로 반청복명을 꾀한다. 강츼초기 광동중부의 반청운동에 연루되어 황급히 강을 뛰어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석두기>에는 전체 글에서 "홍색"이 많고, 여러번 중복하여 "제월난봉(霽月難逢)"등을 얘기한다.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작자는 주명왕조의 유로유소(遺老遺少)라는 것을. 방이지는 조동문하(曹洞門下)에 출가한다. 설근(雪芹)은 발음이 학근(學勤)과 같다. 그러므로, '조설근'이라는 것은 '조동문의 말학'이라는 뜻이다. 방이지는 학식과 재주를 겸비하여 홍루몽을 쓸 조건이 된다. 그외에 <홍루몽>이 묘사하는 것은 '말세'의 광경이다. <홍루몽>은 반청복명의 소설이다. 작자는 가보옥의 입을 빌어 스스로를 "대순자민(大舜子民)"이라고 하는데, 이는 확실히 마음 속으로 명왕조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홍루몽>은 글 전체에서 호로지배(胡虜之輩)를 욕하는데, 이는 만청에 대한 불만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방이지가 모벽강과 힘을 합쳐서 <홍로몽>과 같은 책을 썼을 수 있다. 홍루몽의 인물과도 들어맞는다. 12, 7. 4라는 숫자는 완전히 주역의 배열을 운용한 것인데, 방이지는 불도에 정통했다. <약지포장>은 도교에 대한 높은 연구수준을 보여주는데, 방이지의 조부, 부친이 모두 <역경>을 공부했다. 방이지는 학자들에 의하여 <방식역학(方式易學)의 집대성자로 불린다. 그러므로 완전히 <역경>을 이용하여 <홍루몽>의 인물을 배치할 수 있다.


고경성설(顧景星說)


왕교림(王巧林) 선생은 고경성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설을 내놓는다. 고경성의 자는 적방(赤方)이다. 호는 황공(黃公)이다. 명나라말기의 공생(貢生)이다. 남명 홍광조때 관직을 받는다. 만주족이 중원을 침략한 후, 고경성은 전투에 나서고 관직에 나서지 않는다. 고경성은 많은 책을 외우고, 시문과 사작이 뛰어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어떤 사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여리지통(黎離之痛)을 드러냈다.


고경성은 "여섯살 때 시와 부를 지었고, 여덟아홉살 때 경사를 다 읽었는데, 한번에 몇 행씩을 읽어서 당시에 '성동(聖童)'이라고 불렀고, 그가 쓴 시문만 한 자루였다. 팔구세에 경사를 다 읽었으니 감히 천하제일기인이라 할 만하다."


고경설설은 통령옥이 황석공(黃石公)에서 왔다는 것, 신영사자와 강주초의 이야기는 그의 선조 고아영(顧阿英)에게서 왔다는 것, 소주창문밖의 견사은과 묘옥이 현묘산(玄墓山)에 살았다는 이야기는 명나라가 망하기 전후에 그의 집이 소주창문밖, 호구에 있었으며, 고경성의 여동생은 전란중에 잃어버리는데, 나중에 강녕 조가에 시집을 가서 그들과 조씨집안은 인척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홍루몽>에 나오는 작품은 하나같이 고경성의 <백모당집>에서 찾아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위대한 저작을 누가 썼든지간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해주고, 하나의 역사를 기록해주고, 하나의 꿈을 그려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 꿈이 우리는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야기의 결말이든 작자의 신분이든. 모두 추가적으로 발굴을 해야할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