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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 작가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위석아(危石兒)

 

<홍루몽>은 중국고대4대명저 중 하나이고, 중국고전소설중 성취의 최고봉이며, 현실주의창작의 가장 우뚝선 기념비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주요작가여야 한다. 그는 전체 소설의 전80회를 썼으며, 고악(高鶚)이 후40편을 썼다. 다만, 많은 홍학 전문가들이 <홍루몽>에 대한 많은 역사자료를 장기간 연구과 조사 고증한 후, <홍루몽>의 작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했다. 여러 해동안 사람들의 주장은 각자 달랐고 통일된 정설을 구축하기 어려웠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홍루몽>, 고금제일이라 칭하지만 안타깝게도 문헌에 증명이 없어, 그 사람을 평할 수가 없구나." 이렇게, 일시에 <홍루몽>의 작가에 대한 주장은 분분해졌다.

 

가장 먼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고 확인한 사람은 강희제의 14째아들인 윤진(胤禛)의 손자 영충(永忠)과 건륭5년경에 태어나고 영충의 종제(從弟)이며 도통 부걸(溥傑)의 아들인 명의(明義)이다. 영충은 그가 쓴 <연분실집(延芬室集)>에 <인묵향득관홍루몽소설조설근(因墨香得觀紅樓夢小說弔雪芹)> 절구 3수를 남긴다. 명의는 <제홍루몽(題紅樓夢)> 시 2수의 소서(小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자설근서소찬<홍루몽>일부(曹子雪芹書所撰<紅樓夢>一部)". 거의 조설근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인물 원매(袁枚)는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역시 이렇게 말한다: "강희연간(康熙年間), 조동정위강녕직조(曹棟亭爲江寧織造)....기자설근(其子雪芹), 찬<홍루몽>일부(撰<紅樓夢>一部), 비기풍월번화지성(備記風月繁華之盛)."

 

저명한 학자인 호적(胡適) 선생은 청나라때 사람들의 필기,저서, 지방지를 많이 연구하고 읽은 후,  그의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에서 이렇게 말한다: "<홍루몽>은 조설근이 썼다." 노신(魯迅) 선생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명한 홍학자 유평백(兪平伯)도 이 견해에 찬동했고, <홍루몽변(紅樓夢辨)>이라는 책을 써서 이 책은 조설근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라는 견해를 강화시켰다. 학자 주여창(周汝昌)도 엄청난 자료를 계통적으로 연구하여 추가로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고 논증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는 이미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식되어 있고, 이는 거의 다툼의 여지가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다만, 거의 정설처럼 된 이 견해에 대하여, 여전히 사람들은 계속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홍루몽>이 조설근 이전에 원작자가 있었다고 한다. <홍루몽> 자체에서도 <홍루몽> 제1회에 '작자자운(作者自雲)'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은 이런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다음, <석두기.를 다시 한번 검열했다....시세(時世)에 전혀 간섭받지 않아서 비로소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을 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때부터 공공도인은 공(空)애서 색(色)을 보고, 색(色)에서 정(情)이 생기고, 정(情)이 색(色)으로 들어가, 색(色)에서 공(空)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름을 정승(情僧)이라고 바꾸고, <석두기(石頭記)>를 <정승록(情僧錄)>으로 바꾼다." 동로(東魯)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風月寶鑒)>이라고 제목을 붙인다.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悼紅軒)에서 10년간 비열(批閱)하고 5번 덧붙이고 빼서(增刪), 목록을 만들고, 장회를 나누고나서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 한다. 그리고 절구를 지었다: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일파신산루(一把辛酸淚), 도운작자치(都云作者痴), 수해기중미(誰解其中味)'. 이렇게 보면, <홍루몽>은 "석두기"에서 왔고, 공공도인은 이를 초록한 사람이고 정승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조설근이 "비열십재(批閱十載, 증산오차(增刪五次)"를 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작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설근과 동시대의 인물인 지연재(脂硯齋)이 경신본(庚辰本) 제13회에 남긴 미비(眉批)이다: "다섯가지 사건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실성대곡했다. 30년전에 책을 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조설근은 임오년(1762년) 제석(除夕)에 세상을 떠났다. 경신본은 건륭25년(1760년) 가을에 만들었다. "삼십년전"이라면 조설근은 겨우 5살에 불과하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십여세의 소년이 이같은 거작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첫째, <홍루몽>의 원작자는 조설근보다 10살가량 많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조씨집안의 번성했던 생활을 이해하고 소설에 이를 나타낼 수 있다. 그는 분명 조설근의 윗사람일 것이다. 그래야 "자전'성격의 인물배분관계에 부합한다. 둘째, 그 평서자는 <홍루몽>의 작자를 얘기할 때 대부분 휘막여심(諱莫如深)했다. 직접 그 이름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홍루몽>의 '작자자운'에서도 그저 '공공도인'이라고만 했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홍루몽>의 원작자는 죄를 지은 관리의 신분일 수 있을 것이다. 삭탈관직된 후 민간에 은거하고 불문에 들어간 것이다.

 

또 다른 일부학자들은 작자가 "석형(石兄)"이라고 본다. 그는 바로 조인(曹寅)의 둘째아들이며, 조설근의 숙부인 조죽촌(曹竹村)이다. 가장 먼저 쓴 것은 <풍월보감>이며, 많은 남경말과 양주말이 들어 있다. 나중에 조설근은 이를 가공하여 북경말로 바꾸었다. 이렇게 보면, 제1회와 서로 부합한다. 즉, '석형' 원저, 공공도인 초록, 공매계 제명(提名), 조설근 비열증산. 단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의문을 제기한 사람중에는 채원배(蔡元培), 왕몽완(王夢阮)등도 있다. 채원배는 그가 쓴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 6판의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 소설이 조씨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왕몽완은 <홍루몽색은>의 제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책은 조설근을 거쳤지만, 처음에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홍루몽>의 작자의 진상은 무엇인가. 반세기동안 이는 계속하여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문사연구자들에게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홍루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과 홍학애호자들은 '작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연구대상을 순수히 문본(文本)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홍학독본 <풍어홍루(風語紅樓)>를 출판한 작자 "풍지자(風之子)"가 그러하다. 이것이 아마도 새로운 그리고 가능한 연구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