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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비장군 이광(李廣)이 평생 제후에 봉해지지 못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진사황(秦四晃)


한나라장수 이광은 농서 성기(成紀), 즉 지금의 감숙성 태안 사람이다. 사마천은 그의 조적은 기실 섬서 흥평이라고 했다. 이씨가족의 조상은 전투를 잘 했고, 활쏘기는 가전의 절기였다. 진나라때 유명한명장을 배출하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킬 때, 마지막에 연나라의 태자단을 생포한 사람이 바로 이광의 선조라고 한다. 이는 이광과 그의 당제(堂弟) 이채(李蔡)가 일찌감치 한문제의 무기상시를 하며 천자를 호위한 원인이다.


한경제때,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다. 이광은 효기장군의 신분으로, 태위 주아부를 따라 토벌에 나선다; 창읍지전에서 이광은 사졸들을 앞장서서 용맹하고 두려움없이 친히 반군의 전기를 빼앗는다. 이를 통해서 위명을 크게 떨친다. 그후 계속하여 상곡, 농서, 북지, 안문, 대군, 운중등지의 태수를 지낸다. 그는 공인된 맹장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제후에 봉해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명호의 유래


한무제때, 이광은 황상이 상군태수에서 조정으로 불러들여 미앙궁의 위위(衛尉)를 맡게 한다. 이광은 스스로 나서서 위위의 신분으로 장군직을 맡아, 안문관으로 출병하여 흉노를 토벌한다. 불행한 것은 그가 적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주 유명했기 때문에, 흉노선우는 부하들에게 이광을 반드시 산 채로 잡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흉노는 감히 이광을 죽이지 못하고, 두 마리의 말 사이에 그물모양의 침상을 만들어 이광을 그 위에 눕힌다. 이광은 자신의 부상이 아주 심한 것처럼 가장하며, 금방 죽을 것처럼 한다. 그물침대에 누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흉노병이 데려가는대로 십여리를 달리다가, 그는 살짝 눈을 떠보니 곁에 흉노병이 좋은 말을 타고 있었다. 흉노병이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돌연 벌떡 일어나서 이 흉노인의 말로 뛰어올라가, 활과 화살을 빼앗고 말에서 밀어낸다. 그리고는 도망친다. 단번에 수십리를 달린다. 흉노인은 그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쫓아갔으나 쫗아갈 수가 없었다. 이광은 결국 도망쳐서 자신의 남은 부하들에게로 돌아온다.


그후 흉노인들은 이광을 얘기할 때면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그가 우북평태수를 맡고 있을 때 흉노인들은 가급적 그의 방어지구를 피해서,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2. 병사지휘의 특징


이광의 병사지휘는 일반사람과 달랐다. 그의 부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군대같지가 않았다. 엄격하고 오와 열을 맞춘 대열이 아니고, 군대내에서 사람들의 언행도 아주 자유로웠다. 주둔할 때는 근처에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서 땅바닥에 누웠고, 각자 스스로 편한대로 행동했다. 밤에도 초병을 두어 순찰을 돌지 않았다. 작전전에도 무슨 작전계획같은 것을 세우지 않았고, 문서같은 것은 모두 간단하게 처리했다. 이런 산만하게 보이는 대오이지만 적의 기습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3. 사람의 품성


이광이 전투에서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인 품성이 병사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이광은 일생동안 돈을 좋아하지 않았고, 청렴하였다. 더욱 고귀한 점은 그가 매번 조정의 하사품을 받으면, 즉시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사병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잤다. 그는 40여년간 군대의 고위장수로 있었지만, 매번 물이나 양식이 부족할 때, 사병들에 마실 물이 없으면 그는 절대로 물을 마시지 않았고, 사병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그는 절대로 먹지 않았다. 부하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하여 사병들은 기꺼이 그를 위하여 목숨바쳐 싸웠다.


4. 개성의 결함


이광은 아주 집요하고, 아주 자신이 넘치고, 아주 용맹하고, 아주 진지했다. 그는 전투때 습관이 있는데, 적이 가까이 다가와서 그가 자신이 있을 때 비로소 활을 쏘고, 그는 화살 한 대로 목숨 하나를 반드시 빼앗았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자주 적군에 포위를 당한다. 흉노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그 때도 그의 이런 전투방식이 관련된다. 적과 싸울 때도 이러했고, 사냥할 때도 그러했다. 우북평태수로 있을 때, 한번은 그가 산에 맹호가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는 활을 매고 산으로 달려간다. 그가 직접 호랑이를 잡으려 한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먼저 자신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호랑이와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간다. 그 결과 호랑이가 최종적으로 그의 화살에 죽지만, 그 자신도 호랑이에게 물려서 상처를 입는다.


5. 운명의 장난


한무제 원삭6년,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정벌하러 간다. 전후에 많은 사람들은 적을 많이 죽여서 제후에 봉해지지만, 오직 그만은 제후에 봉해지지 않는다. 다시 2년이 흘렀다. 그는 사천의 기병을 이끌고 우북평에서 출발하여 흉노를 토벌하러 간다. 그와 호응하여야 하는 박망후 장건의 1만인마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광이 비록 용맹하게 싸우고 무수히 적을 죽였지만, 그 자신의 인마도 거이 전멸한다. 그 결과 경성으로 돌아와 논공행상할 때, 황상이 이렇게 말한다: "이장군, 너의 전공과 사상의 죄를 서로 퉁치자. 그래서 오늘 너를 벌하지도 않고, 상주지도 않겠다."


평생동안 전투를 했지만, 이광은 여하한 작위나 봉지도 받지 못했다. 직급이 가장 높았을 때도 구경(九卿)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와 같이 초기에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관 심지어 사병들도 나중에 제후에 봉해졌는데, 오직 그만은 제후에 봉해지지 못한다.


일찌기 한문제때, 이광은 맹수와 싸워서 아주 용감함을 드러낸다. 한문제는 이렇게 감탄한 적이 있다. 정말 안타깝다. 너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만일 네가 고황제(유방)가 천하를 얻을 때였다면, 만호후에 봉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광의 나이가 환갑이 넘어서, 한무제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치도록 명한다. 이광은 그냥 있지 못하고 참전하고자 한다. 한무제는 처음에는 그가 늙었다고 보고 응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광이 여러번 청하여 노장군의 적담충심에 감동한 한무제가 결국은 그의 출정에 동의한다. 이광은 원래 주력군을 치고 싶어 했다. 위청은 그러나 그의 대오를 책응(策應)하도록 했다.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출발할 때 한무제는 위청에게 별도로 당부를 했던 것이다. 이광은 나이가 많고, 운이 좋지 못하니, 절대로 그를 주력으로 삼지 말라고.


이광은 불쾌하지만 부대를 이끌고 후로로 간다. 재수없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오가 길을 잃은 것이다. 길을 잃게 되니, 시간을 맞추지 못했고, 그 결과 지정된 시잔에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장군 위청의 중로군이 강대한 흉노선우에게 포위되고, 할 수 없이 철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군영으로 돌아와서 위청은 노장군 이광을 책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광의 부하를 혼낸다. 이때 이광이 일어나서 위청에게 말한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흉노와 싸웠다. 크고 작은 전투를 칠십여회나 치렀다. 이번에 어렵게 대장군을 따라 함께 흉노를 치러 왔는데, 나에게 길을 우회하여 먼길을 가는 책응을 맡길 줄 몰랐고, 대오가 길을 잃을 줄 몰랐다. 나는 이미 육십여세이다. 모든 것은 다 하늘의 뜻인 것같다. 말을 마치고, 검을 뽑아 목을 그어 자결한다.


6. 항간의 이야기


비장군 이광이 평생 제후에 봉해지지 않은 이유에 관하여,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 보면 그저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루는 이광이 관상을 잘 보는 술사를 만난다. 그는 술사에게 묻는다. 한왕조가 흉노를 토벌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나의 수하에 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은 실력이 중등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현재느 이미 수십명이 제후에 봉해졌는데, 나는 그들보다 못하지 않은데, 왜 지금까지도 자그마한 공로를 세워서도 얻을 수 있는 봉읍을 받지 못했을까? 나의 골상이 제후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술사가 그에게 말한다: 너는 잘 생각해봐라. 이전에 스스로 후회할 일을 한 적이 없는지. 이광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한 가지 일을 생각해낸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면, 농서태수로 있을 때, 강족(羌族)의 반란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투항하도록 유도했고, 800여명이 고분고분하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속였다. 그 팔백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술사는 바로 결론을 내려서 말한다: 화는 이미 투항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장군이 제후가 되지 못하는 원인이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한 자들을 무고하게 죽인 것은 큰 음화(陰禍)이다. 이것이 바로 장군이 평생 제후에 봉해지지 못한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