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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혈색매괴(血色玫瑰): 민국제일여살수(民國第一女殺手)

by 중은우시 2016. 4. 23.

글: 묘불문교자(猫不聞餃子)





청말민초때 서방의 함선과 대포는 중국의 꽉 닫힌 대문을 열어제꼈다. 정치체제의 중대한 변혁과 더불어, 사회구조는 느슨해지고, 수천년간 지속되었던 전제제도도 타파된다. 먼저 눈을 떠서 세계를 보았던 여러 사상가들의 계몽하에, 사회분위기는 점차 자유의 기풍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마치 여명전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처럼. 여러 서방사회의 관념이 유입되면서, 여권주의, 남녀평등등 선진적인 사상도 중국대지에서 맹아를 틔운다. 여성들은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규방을 나온다. 전통문화의 예교의 구속을 벗어나 각종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정육수(鄭毓秀)는 바로 그중의 대표적 인물중 하나이다.


홍콩 해피밸리 (Happy Valley, 跑馬地)에 육수가(毓秀街, Yuk Sau Street)가 있는데 이는 직접 정육수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홍콩의 대다수 거리이름은 모두 식민시기 영국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음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만 보아도 이 민국여성이 분명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중국의 첫번째 여성박사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83년도판 <사조영웅전>에서 목염자(穆念慈)를 연기한 양반반(楊盼盼)의 외할머니이다. 그녀의 가장 멀리 알려진 명칭은 이런 그녀의 신분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민국제일여살수"이다.


정육수는 1891년 3월 20일에 광주부 신안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부동산업을 했고, 부친 정문치(鄭文治)는 청나라말기 호부의 관리였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천금소저라 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매우 커서 할머니가 그녀의 이름을 "육수"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서향문제(書香門第)라 할 수 있고, 모친은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글을 읽는 법을 가르치고 어떻게 대갓집 규수가 될 것인지를 가르쳤다. 그러나 정육수는 천성이 반역자였다. 그녀가 6,7세때 그녀에게 전족을 하려고 하자, 가족들이 아무리 달래고 얼르고 온갖 수단을 썼지만, 그녀는 따르지 않았다.


13살때, 정육수는 할머니가 그녀가 어릴 때 그녀를 광동순무의 아들과 혼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주의식이 강했던 정육수는 큰 불만을 품는다. 나이 겨우 13살의 그녀는 친히 남자측에 퇴혼신을 써서 보낸다. 다음 해, 정육수는 천진의 교회학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서방교육을 받는다. 1907년 정육수는 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유학기간동안 요중개를 알게 되고, 요중개의 영향을 받아 혁명사상을 갖는다. 그 후에 동맹회에 가입한다.


당시 손중산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를 내세웠고, 폭력으로 만청왕조를 전복시킨다는 혁명목표를 세우고, 국내외 각파 혁명당조직과 연합하여 동맹회를 조직한다. 1905년부터 1908년의 3년간 동맹회는 모두 6번의 무장봉기를 일으키나, 모두 실패한다. 일부 혁명의지가 견고하지 않은 동지들은 믿음이 흔들렸고, 손중산의 혁명이념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양계초(梁啓超)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황당(保皇黨)은 이 기회를 틈타 혁명당 영수를 비판한다: "헛되이 사람들을 속여서 죽게 만들고, 자신은 크고 화려한 집에서 편안히 살고 있다. 그저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 뿐이다." 이는 확실히 손중산등을 정치적 사기꾼으로 묘사한 것이다.


혁명당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혁명당내의 인심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왕정위(汪精衛)등은 친히 북경으로 가서 청나러정부의 고관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실제행동으로 돔맹회의 영수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왕정위는 천진에 도착한 후, 정육수가 그를 맞이하는 책임을 진다. 요중개는 정육수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부잣집 딸의 신분을 이용하여 폭탄을 운송하는 것을 엄호해 주고, 전력으로 왕정위등의 암살행동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한다. 당시의 폭탄은 대부분 은약법등 초보적인 제작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운송도중에 사고로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큰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다.


당시의 왕정위는 아직 "인도성이쾌(引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의 큰 뜻을 품은 청년이었다. 풍화정무시(風華正茂時)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두 사람은 밤낮으로 같이 있었고, 정육수는 왕정위에게 애정이 생긴다. 그러나, 진벽군(陳璧君)의 출현으로 금방 이 애매한 관계는 끝이 난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청나라조정의 통치는 바람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맹수처럼 여전히 싸웠고, 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여 혁명당을 진압하려 했다. 그래서 혁명당은 원세개를 암살하고자 한다. 어쨌든 암살은 원가가 가장 낮게 들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동맹회의 골간으로서 정육수는 이번 행동의 총책임자가 된다. 그녀는 즉시 12명의 암살팀을 조직한다. 원세개가 조조(早朝)로 가는 길에서 폭탄을 던지려고 한다. 각 조가 계획에 따라 준비를 마쳤을 때, 정육수는 돌연 암살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동맹회의 최신정보에 다르면, 남북의화를 막는 진정한 저항은 양필(良弼)쪽이지 원세개쪽이 아니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신이 낙후되어, 정육수가 정보를 내보내기도 전에, 다른 성원들은 계획에 따라 암살행동을 실시한다. 당시 현장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원세개의 여러 위병과 위대장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원세개 본인은 운좋게도 목숨을 건진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원세개를 암살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 심지어 오히려 반대가 되는 손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이라고할 수도 있다. 당시 '남방'은 원세개를 반혁명세력으로 보았고, 양필을 우두머리로 하는 청나라조정의 종사당(宗社黨)은 그를 암중으로 혁명당과 "미목전정(眉目傳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육수의 암살행동은 오히려 원세개를 크게 도와주는 꼴이 된다. 종사당은 더 이상 원세개의 청나라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다. 나중에 정육수는 알게 된다. 동맹회의 이 긴급정보는 기실 원세개 본인이 제공한 것이라는 것을. 사실상 원세개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부의가 하야하기를 원했고, 혁명당의 힘을 빌어 양필등 보황당의 장애를 제거하려는 것이 원세개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 수법을 보면 역시 생강은 오래될 수록 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세개암살은 실패했지만, 혁명당은 여전히 목표를 변경한 후의 암살임무를 정육수에게 맡긴다. 양필은 종사당의 핵심인물이고, 완고한 수구파이다. 그는 청황제의 퇴위를 굳건히 반대했다. 교훈을 얻은 후 정육수는 타초경사(打草驚蛇)하지 않기 위해 1명만을 보내어 양필에 대하여 자살식의 육탄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 임무를 맡을 살수는 바로 정육수의 언니인 정설안(鄭雪案)이 열렬히 사랑에 빠져 있던 애인 팽가진(彭家珍)이다. 이번 암살행동의 결과는 팽가진이 그 자리에서 폭사하고, 양필은 중상을 입었으며 며칠 후에 치료를 하지 못하여 사망하게 된다.


원세개암살이 실패한 후, 정육수의 행적도 폭로된다. 원세개는 그녀에 대하여 추살령을 내린다. 1914년 정육수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유학을 택한다. 나중에 그녀는 파리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중화민국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자가 된다. 그리고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하고 이 협회의 첫번째 중국인 회원이 된다. 그러나, 그녀를 파리에서 크게 이름나게 한 것은 전설 속의 "매괴지(玫瑰枝)사건"이다.


제1차세계대전이후의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로서 대표를 파견하여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에서 거행되는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다. 정육수는 영어, 프랑스어에 모두 능통해서, 대표단의 구성원으로 임명되어 번역업무를 맡는다. 이와 동시에 정육수는 유학생을 조직하여 청원시위를 벌인다. 대표단에게 베르사이유에서 협정에 서명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1919년 6월 27일 저녁, 300여명의 프랑스유학생과 중국인노동자들은 중국수석대표 육징상이 머무는 곳을 포위한다. 정육수는 대표로 추대되어 육징상과 담판을 벌인다. 이 때, 육징상은 이미 북경정부의 지시를 받아 평화협정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육수는 급한 와중에 기지를 발휘하여 화원에서 장미가지를 하나 꺽어서 소매 속에 숨기고들어가서 육징상의 등을 찌르며 소리친다: "네가 만일 서명한다면, 나의 이 총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당시 북경쪽은 국내의 반대압력으로 이미 베르사이유협정에 거절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정육수의 기민한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926년 귀국후의 정육수는 동료인 위도명(魏道明)과 상해 프랑스조계에 변호사사무소를 개설한다. 같은 해에 위도명과 부부가 된다. 그녀가 수임한 가장 유명한 사건은 긍극대가 매란방(梅蘭芳)과 맹소동(孟小冬)의 이혼사건이다. 최종적으로 매란방은 맹소동에게 4만원을 이혼보상금으로 지급한다.


1942년, 위도명은 호적(胡適)의 뒤를 이어 주미대사가 된다. 1947년, 위도명은 대만성주석이 되고, 정육수는 남편을 따라 타이페이로 간다. 1948년, 진성(陳誠)이 위도명의 뒤를 이어 대만성주석이 된다. 정육수 부부는 미국으로 옮겨간다. 이때의 중국대륙은 이미 풍운이 변화하여 곧 정권이 바뀔 상황이었다. 이미 정치무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던 정육수 부부는 브라질로 가서 사업을 한다. 그러나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 정육수부부는 브라질에서 몇년만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온다. 1959년 12월 16일 정육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병사하니 향년 68세이다. 일대의 여중호걸이 이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