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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민국사공자(民國四公子)중 하나인 장효약(張孝若)피살사건

by 중은우시 2018. 7. 11.

글: 채휘(蔡輝)


"우리나라 공상업계를 이끌고, 실업계의 거목으로 유명하며 고찰구미실업전사를 역임한 청나라때의 장원인 남통 장계직(張季直, 즉 張謇) 선생의 장남 장효약씨가 어제 여명 여섯시 십분, 전날 남통에서 상해로 온 옛하인이자 안휘사람인 오의고(吳義高)의 총에 저격을 당해 프랑스조계 랄비덕로(辣斐德路, 지금의 상해시 부흥중로)1228호 장효약의 자택에서 운명했다."


1935년 10월 18일, <신보(申報)>에 이런 뉴스가 실린다.


장효악은 "민국사공자"중 한 명이고, 유명한 상인이며, 시로도 이름을 떨쳤다. 서지마(徐志摩), 오치휘(吳稚暉), 호적(胡適)등과 밀접하게 왕래했다.


흉수인 오의고는 "나이가 오십에 이르렀다" 원래 장건의 시위호위병사였다. 장건이 죽은 후, 장효약은 그를 "남통의 고택을 지키도록 보냈고, 월급여가 30금에 달했다" 그리고, "오의고의 아들을 윤선회사에 취직하도록 해주었다." 오의고는 남통, 상해를 오갔고, 상해에 왔을 때는 장효약의 집에 머물렀다. 오의고가 살인에 쓴 '합자포(盒子炮)"는 장건이 그에게 준 것이다. 


오의고가 장효약을 살해한 후, 다시 총을 쏴서 장효약이 첩(妾)인 이복초(李復初, 그녀는 중상을 입고 다음해 2월 3일 남통의원에서 사망한다)를 쏜 다음 스스로 총을 쏴서 자결한다.


뉴스보도에서 한 가지는 잘못되었다. 그것은 장효약이 장건의 장남이 아니라 독자(獨子)라는 것이다.


장씨집안은 오의고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었다. 그런데 왜 오의고는 거꾸로 장효약을 죽인 것일까? 사후에 순포가 장효약의 부인 진석운(陳石雲)을 찾아갔을 때, "깊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는 순포를 돌려보낸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소문이 돌게 된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는 지금도 판단하기 어렵다.


1898년 2월, 장효약(본명은 怡祖)은 강소성 남통시에서 태어난다.


장효약의 부친 장건은 근대 민족공업의 기수였다. 모택동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공업을 얘기하려면 장지동(張之洞)을 잊어서는 안되고, 경공업을 얘기하려면 장건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건은 42살때 장원을 하고, 1처4첩을 두었다. 그러나 슬하에 자손이 없었다. 46살이 되어서야 셋째첩인 오도음(吳道愔, 나중에 정실이 됨)이 외동아들을 낳았다. 장건은 흥분해서 시를 썼다:


생평만사거인후(生平萬事居人後), 헌세초춘거일웅(獻歲初春擧一雄)

대부명명행권상(大父命名行卷上), 가인진희답가중(家人趁喜踏歌中)

역기유복신경란(亦祈有福身經亂), 불분능기사작공(不分能奇仕作公)

급녀성정아주갑(及女成丁我周甲), 마사쌍빈조청동(摩挲雙鬂照靑銅)


장건은 27살에 부친의 뜻에 따라 이력에 아들의 이름을 이조라 한 바 있는데, 20년후에 정말 아들을 갖게 된 것이다.


장효약이 6살때, 일본인 삼전정자(森田政子)가 가정교사를 한다. 8살때는 남통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명사(名士) 장경운(張景雲)에게 배운다. <소춘추(小春秋)> 잡지 1941년 제3기에 따르면, "효약은 놀기를 좋아해서 오래 앉아서 책을 보지 못했다."


1913년 장효약은 독일인이 만든 청도대학 중학부에 들어갔고, 다시 상해진단대학(上海震旦大學)에 들어간다.


부친의 곁에 거의 없다보니, 장건은 전후로 장효약에게 많은 서신을 보낸다(현재 남은 것은 138통). 서신에서 장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 네가 잘못되면 후사를 기약할 수 없다. 나는 늙었으니, 부득이 장기적으로 생각해야한다."


1917년, 장효약은 미국유학을 떠난다. 어떤 사람은 그가 컬럼비아대학에 들어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뉴욕대학이라고 한다. 단, <공업잡지> 1921년에 게재된 <중국실업명인록.장효약선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아나덕상무대학(亞拿德商務大壑)이다. 장효약은 겨우 1년여 머물고 소위 "상학격치학 학사"를 따고 귀국한다.


귀국후 장건은 장효약이 자신의 후계자로 업무를 넘겨준다


1919년 장건은 회해실업은행(淮海實業銀行)을 만들어, 장효약을 총경리에 앉힌다. 그후, 장효약은 다시 남통학원 원장, 대생사창(大生紗廠) 동사장, 대달윤선공사(大達輪船公司) 총경리, 회남의 각 염간공사(鹽墾公司)의 상무동사장의 직위를 맡는다.


장백구(張伯駒) 선생은 <속홍헌기사시보주>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사람들이 근대사공자라고 하는데, 첫째는 한운(寒雲, 원세개의 둘째아들 원극문으로 시사와 곤곡에 능했다), 둘째는 나이고, 셋째는 장학량(張學良)며, 넷째는 일설에는 노영상(盧永祥)의 아들 소가(小嘉)라고 하고, 일설에는 장건의 아들 장효약이라 한다"


장백구의 이 말은 널리 알려잔다. 그러나 학자인 장굉무(張宏武), 양전금(梁轉琴)의 연구에 따르면 신뢰도가 낮다고 한다. 장백구는 1937년에 비로소 명성을 떨쳤는데, 이때 원극문(袁克文)은 죽은지 6년이 지났고, 장효약도 죽은지 2년이 지났다. 장백구의 양부는 장진방(張鎭芳)으로 민국초기에 면직되었다. 그러므로 장백구의 출신은 다른 몇몇 "공자(公子)"들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장굉무, 양전금은 "사공자"가 민국초기의 정국과 관련있다고 한다.


1922년, 진형명(陳炯明)을 없애기 위해, 손중산(孫中山)은 장작림(張作霖), 단기서(段祺瑞)와 연락하여 "철삼각(鐵三角)"을 형성한다. 당시 사람들은 '철삼각'의 후손인 장학량, 단굉업(段宏業, 단기서의 장남), 손과(孫科, 손중산의 아들)을 '삼공자'라고 불렀다. 다만, 단굉업은 바둑을 좋아하고, 아편을 피우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철삼각'의 간장(干將)인 장건과 노영상(대군벌)의 아들인 장효약과 노소가(盧篠嘉)를 보완해서 집어넣어, 합쳐서 '민국사공자'라고 불렀다.


'사공자'라는 칭호는 상해에서 시작한다. 이는 손과, 노소가, 장효약의 활동중심지이다. 장학량도 일찌기 1925년 초여름 부대를 이끌고 상해로 와서 떠들썩한 바 있다.


장효약은 기품이 있었다. 그의 둘째딸 장유무(張柔武)에 따르면, "부친은 키가 크고, 피부가 하앴다. 평상시에 행동거지는 대범하고 소탈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시인, 화가인 서지마와 아주 닮았다고 말했다."


장효약은 원래 정치에 꿈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국의 사회에서, 일을 하려면 관청과 관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관청은 나를 도와줄 수도 있고,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만일 민간에서 일을 하려면, 관의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일은 절반만 하고 공은 배가 될 수 있다."


양계초(梁啓初)는 장효약을 본 후에 <남통자치회보고서>를 썼는데, 장거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처럼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장효약이 정계에 들어가려는 시도는 처음에 막혀버린다.


1920년초, "연성자치(聯省自治)"가 주류를 이룬다. "상인치상(湘人治湘)"후 강소성의회는 1920년 강소성출신이 아닌 성장 제요림(齊耀琳)을 쫓아내고, "소인치소(蘇人治蘇)"를 주장한다.


그러나, 성의회 내부는 금방 분열된다. 학자 장량(張亮) 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장건을 대표로 하는 "북장파(北張派)"와 장일린(張一麐)을 대표로 하는 "남장파(南張派)"가 나타난다.


"북장파"는 소북인(蘇北人)"을 위주로 하며 재력이 충분했다. "남장파"는 남경인을 위주로 하여, 성의회에서 역대이래로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1921년 10월에, "남장파가 원래 우세를 점하고 있고 2/3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십월 이일 오후에 돌연 변동이 일어난다. 북이 남을 이긴 것이다. 역시 1/3이상으로. 이일오후 회의참석자 130여명 중에서 북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80여명에 달했다."


북장파는 장효약을 의장으로 추대한다. 남장파는 금전선거를 배척한다며, 책상을 내려치고, 발을 구르며 의자를 집어던졌다. 쌍방은 격렬하게 대치하며 59일간 계속된다.


북장파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11월 21일 남장파의 의원이자 회안사람인 섭립민(葉立民)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며, "시간(屍諫)"을 한다. <신보>는 연속하여 섭립민의 유서를 실었고, 신문의 두드러진 위치에 그의 유상(遺像)을 싣는다.


이로 인하여 양장(兩張)은 모두 난감하게 된다. 원래 이미 "장일린을 의장, 장효약을 부의장"으로 하기로 합의가 되었는데, 할 수 없이 폐기되고, 두 사람은 모두 물러난다.


뇌물선거라는 소문에 대하여 장효약은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록 정권에 몇년간 가까이 있었지만, 부정당한 결탁을 하거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금전의 한계는 절대로 지켰고, 스스로 깨끗하게 인격을 지켜왔다."


그는 좌절을 맞은 후 북양정부에 의하여 '실업전찰전사(實業專察專使)"로 임명된다. 1923년 9월 17일, 그의 나이 25살때이다.


전창희(錢昌熙), 장문잠(張文潛), 주중도(朱中道)등 7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장효약은 7개월 3일간, 10개국 3만마일을 다닌다.


귀국후, 장효약은 이렇게 말한다: 각국의 공상업이 흥성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 인민에게 진취적인 정신이 있었고, 정부에서 장려조치가 있었으며, 영토내에 원료가 풍부했을 뿐이다."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인민은 진취적인 정신도 있고, 물자도 풍부하다. "오로지 정부의 조치가 완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를 제창하는 것은 정부에서 해야 한다. 인민이 단독으로 혹은 소수로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효약은 중국경제를 진흥시킬 10대요책을 제시한다. 즉, 외채정리, 노정(路政)착수, 농간(農墾)제창, 무역촉진, 노동구제, 실업통계, 실업지식보급, 화폐제도정리, 이금(厘金)감면, 도량형통일, 그리고 "중국공상업의 전도는 이 열가지를 실행할 수 있느냐에 있다."


1923년 북양정부는 장효약에게 이등문호훈장(二等文虎勳章)을 수여한다. 그리고 주칠레전권공사(부임하지는 않음)로 임명한다. 이때 장효약은 이미 정치할 뜻은 없었다. "이 똥통에 한번 발을 담그면, 온몬에 악취를 묻히지 않을 수 없다."


장씨집안의 사업은 전성기를 누렸다. 산하의 대생사창은 공장의 명의로 상해에서 공개적으로 지폐를 발행할 정도였다. 그리고 금액은 수십만위안에 달한다. 그러나 장유무의 회고에 따르면, 장효약은 검박한 생활을 했다. "집안의 좋은 요리가 바로 '청계탕(淸鷄湯)'이었다. 매월 두 번만 먹었다. 하루는 그가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벗어놓은 여름 상의셔츠를 보니 구멍을 기워입고 있었다."


1926년 8월, 장건이 사망하고, 장효약은 호적과 왕래가 잦아진다.


장효약은 구체시(舊體詩)에 능했다. 민국의 저명한 편집인 정일매(鄭逸梅)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옛날에 유럽과 미국의 각국실업을 시찰하러 갈 때, <전당시>를 끼고 있었다. 파도가 쳐서 바닷물이 배 위로 넘치는데도 그는 책을 손에 쥐고 있으며, 놀라지도 않았다. 수행원들이 모두 웃으면서 그를 시치(詩痴)라고 뒤에서 불렀다."


장효약은 서지마와도 잘 지냈다. 서지마가 죽었을 때, 장효약은 추고시를 쓴다: 


중국시인독수군(中國詩人獨數君), 

일비경보상사문(一飛竟報喪斯文)

빙상애락도성몽(氷霜哀樂都成夢)

문채풍류최불군(文采風流最不群)


1919년 장효약은 친척 심연모(沈燕謀)의 소개로 호적을 알게 된다. 장효약은 나중에 호적에게 서신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십여년전, 네가 북경에서 백화문운동의 기치를 들었을 때, 나는 깃발을 흩들고 소리치며 앞장섰다. 너의 마전소졸(馬前小卒)이 되었다."


장효약은 부친의 전기를 쓰고 싶어했다. 옛날식의 전기는 제한이 너무 많아서, 호적의 <장실재(章實齋, 즉 청나라때의 저명한 학자 章學誠)선생년보>를 모범으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호적과 여러차례 서신왕래를 한다.


1929년, 호적은 <신월(新月)>에 <지난행역불이(知難行亦不易)>등 글을 발표하고, 국민당의 포화를 맞는다. 호적의 일기에 두 명의 우인으로부터 보내온 서신이 남아 있다. 하나는 상무인서관의 원로인 장원제(張元濟)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장효약이다.


장효약은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백성을 위하여 몇 마디 하고, 잘못된 것을 불평했다....묻고 싶다 현재 나라에서 몇 명이나 인격과 명망에서 정부를 혼내는 말을 몇 마디 할 수 있단 말인가?"


1930년 <장계직선생전기>가 출판되고, 장효약은 호적의 회신을 서문으로 하며, 호적에게 3000대양을 준다.


1934년 겨울, 장효약은 딸 장유무에게 말한다: "유아, 아빠는 두 가지 큰 일을 잘 처리했다. 할아버지의 아들로서 고향의 아들로서 해야할 책임을 다 했다. 이제 아빠는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가 말한 두 가지 큰 일은 하나가 바로 장건의 유고를 출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장건이 생전에 설립한 학교와 자선기구에 많은 결손이 있었는데, 장효약의 노력으로 모조리 채운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고심하며 지탱했고,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으며 부친의 사업이 유지되도록 했다'고 했다.


장효약이 피살된 것에 대하여, 장건의 먼 친척인 오공준(吳功俊)은 학자 장연영(張連瑩)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효약은 상해에 은행을 하나 설립했다. 중요한 직위가 있는데, 그의 곁에 있는 보표(保鏢)가 장공자에게 자신의 아들이 맡게 해달라고 했고, 장효약은 응락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장효약의 첩이 베갯송사를 해서 '이런 비결(肥缺,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을 남에게 줘서는 안된다. 당연해 내 조카에게 줘야 한다. 장효약은 첩의 말을 듣고 그 자리를 첩의 조카에게 준다. 보표는 아주 화가나서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 첩을 죽이려 했다."


이 설은 두 가지 점에서 부정확하다. 하나는 자객 오의고는 장효약의 보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오의교가 장효약의 방에 들어갔을 때, 장효약과 이복초는 잠을 자고 있었다. 오의고가 잘못 죽였을 리는 없다.


이복초는 원래 상해의 명기(名妓)였다. 남통명사 진보초(陳葆初)등이 돈을 들여 그녀를 기적에서 빼낸 후, 장효약에게 보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문이 있는데, 흉수를 장효약의 부인 진석운이 고용했다는 것이다. 장효약이 계속하여 바람을 피우는 것을 징벌하기 위해서. 


장효약의 후손은 아마도 두월생(杜月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당시 장효약은 화동 최대의 여객회사인 대달윤선공사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경영부진을 최대채권자 겸 은행가인 진광보(陳光甫)는 몸을 빼고 싶어서 두월생에게 주식을 넘기려고 하나, 장효약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월생이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장효약이 죽은 후, 대달윤선공사는 두월생의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흉수 오의고의 미망인, 자녀는 모두 두월생이 보살펴 주었다.


장효약이 죽었을 때 나이는 37살이다. 2남4녀를 두었는데, 딸 1명은 자살하고, 딸 1명은 항전중에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