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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백년전의 해프닝: "의창석룡(宜昌石龍)"사건

by 중은우시 2016. 3. 30.

글: 조종국(曹宗國)


백년전에 원세개가 황제를 칭하고, 한때 전국을 들썩거리게 만든다. 그런데 궁벽진 호북성 의창에서는 우매하고 웃기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바로 의창 교변진(橋邊鎭) 평선패(平善壩)의 한 천연석동때문이다. 그 동굴에는 원래 모양이 용이나 뱀을 닮은 종유석이 있었는데, 그것때문에 사람들은 이 동굴을 석룡동(石龍洞)이라고 불렀다. 이 동굴은 비록 옛날부터 있었지만, 그다지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그런데 1915년 10월, 당시 <원동잡지>(영문판)에 유럽기자인 어윈이 부인을 데리고 영국주의창영사 쉬로드부부와 함께, 배를 타고 석룡동 탐험에 나선다. 동굴속의 석룡을 보고 이것은 진짜 용의 화석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인편(鱗片, 비늘조각)"을 채집하고, 사진을 찍어 베이징, 영국 런던과 일본 도쿄에 있는 문화박물관쪽으로 보낸다. 그래서 소식이 국내외에 널리 퍼져간다.


역사는 때로 웃기는 일을 벌인다. 마침 원세개가 황제를 칭하기 전날이 되었다. 당시에 많은 신문매체에서는 원세개가 황제제도로 되돌아가려는데 대하여 비판을 하였지만, 일부 어용신문은 황제에 오르는데 필요한 여론조성에 정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원세개를 황제로 올려다는 가짜 민의를 전달하는데 애쓰고 있었다. 1915년 12월 18일, 상하이의 <아세아일보>는 어윈의 보고서를 이용하여 놀라운 소식을 싣는다. <의창에서 석룡을 발견한 기이한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호북 의창의 산 속에 석룡이 나타났다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써놓았다. 편집자는 <기석룡(記石龍)>이라는 단평까지 실어서 석룡의 현신은 '중화제국의 대황제가 실제는 백성의 뜻에도 맞고, 사물에도 부합하며, 하늘의 뜻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역대왕조교체때마다 나타났던 미신적인 수법이 다시 현대매체에 당당하게 실려서 혹세무민했다.


소식이 퍼져나가자 호북성과 의창현지에서 황제를 숭상하던 일부 백성들은 이를 사실로 믿었고, 속속 '진명천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봉건잔재인물들은 더더구나 기뻐 날뛰고, 목에 핏줄을 세웠다. 손대포(孫大砲, 손중산, 즉 쑨원)는 안된다. 황제가 용상에 좌정할 것이다." 일부 시세의 흐름을 쫓는 지방관리들은 신황제에 충성할 시기가 왔다고 여기고, 황급히 의사표시를 한다. 호북 호군사군무방판 왕점원은 급히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내어 그에게 '의창석룡'이 현신한 것은 '칭제의 징조'라고 말한다. 형남도윤 장이춘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밤을 세워 글을 써서 원세개에게 보낸다. 의창석룡을 가지고 황제제도를 실행하는데 대한 충성심을 바친다.


일시에 여론이 들썩이고, 관리들은 아부하여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이 '의창석룡'은 마치 진짜 살아있는 것같았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는 것을 상징하는 길조로 여겨진다. 이 일은 당연히 북경정부에서도 고도로 중시한다. 즉시 판사처 장전원을 의창 현지로 보내어 현지조사를 하도록 한다. 이 전원은 동굴속에 과연 용 모양의 돌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즉시 북경정부에 전보를 보내어, "머리와 꼬리가 다 갖추어져 있어, 실로 대황제의 국서(國瑞, 국가적 경사의 징조)"이다. 그리고, 원세개에게, "석룡을 서룡대왕(瑞龍大王)으로 봉해주고, 의창현을 용서현(龍瑞縣)으로 개칭해야한다"고 주청한다. 


황제의 꿈에 취해 있던 원세개는 마음 속으로 당연히 기뻐했다. 1916년 1월 10일 특별히 <의창석룡신령>을 발표하여, '적절하게 보호하라'고 한다. 지방관리는 명을 받은 즉시 집행했다. 부하관리들을 이끌고 밤을 세워 달려가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 석룡동의 앞에는 오색의 천이 걸렸다. 모두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후에 내리는 봉상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말 무정하게 조롱한다. 원세개의 황제꿈은 생각지도 못하게 겨우 83일만에 파멸된다. "의창석룡"의 해프닝도 원세개를 성토하는 목소리 속에 조용히 끝이 난다. 이 해프닝에 참여했던 양심없는 매체와 봉건잔재들도 시대의 흐름속에 추태를 드러냈고, 정의의 역량과 혁명인사들로부터 엄중한 비난을 받는다. 상해 <동방잡지> 제13월 제3호에서는 <보호의창석룡기>라는 글을 발표하여, 과학적으로 '의창석룡'이 원래 종유석의 자연현상임을 밝힌다. '호북의 지방관리가 이를 가지고 정부에 상서라고 보고한 것'을 비난했고, 이를 가지고 태평성세로 분식한 것을 비판했다. 그후 민국정부에서 임명한 의창지사 정춘고는 <의창반결석룡경과기략>이라는 글을 써서, 형남도윤 장이춘등 봉건잔재들이 '석룡'을 빌어 원세개의 황제제도에 충성심을 표한 것을 폭로하고, "의창현을 용서현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비록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의창에 씻을 수 없는 역사스캔들을 남겼다고 기록한다. 장이춘은 민국10년(1921년) 12월 총통 서세창에 의해 직무를 면직당한다. 나중에 누군가 이 사건을 풍자하는 시를 썼는데 다음과 같다:


칙책강신어묵농(勅冊江神御墨濃)

이릉사묘유중봉(彛陵祠廟有重封)

관인선해산령의(官人善解山靈意)

인갑삼삼보석룡(鱗甲森森補石龍)


이 석동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석동은 무고하다. 그 '의창석룡'해프닝은 후세에도 웃음거리로 남았으니, 역사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