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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민국시대 도성(都城)의 변천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유진수(劉振修)


민국시대는 중국역사상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이다. 국도(國都)가 안녕하지 못했으니, 백성들의 생활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고대왕조의 흥망성쇠는 대부분 도성의 변천을 가져온다. 그래서 진,당,송,원의 도성은 서로 달랐다. 한 왕조가 건립된 후, 수도를 정하는 것은 "국지본(國之本)"이었다. 즉 흥망에 관련된 가장 큰 일이었다. 일단 확정되면 다시 변동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상,주 삼대는 빈번하게 천도했고, 그것은 농업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봉건사회에 접어들면서, 국사변란이나 특수한 정치적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예를 들어, 진, 송의 남천, 효문제의 낙양천도), 일반적으로 다시는 천도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이 근대에 접어든 후, 민국시기정부의 도성은 변천이 아주 빈번하여 정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민국시대 도성의 변천은 근대중국역사의 발전궤적과 창상거변의 목격자이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무창에서 발발한다.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왕조는 순식간에 와해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남경은 임시정부 소재지가 된다. 같은 해 2월 12일, 청황제가 퇴위하고, 청왕조는 멸망한다. 얼마후, 자산계급혁명타의 타협과 연약함으로, 원세개가 혁명의 과실을 빼앗아 간다. 같은 해 3월 6일 남경 참의원은 정식으로 결정한다. 원세개가 북경에서 중화민국임시대총통에 취임하는 것에 동의한다. 10월 임시정부가 북경으로 천도한다. 이는 북양군벌통치의 정식개시를 의미한다. 


원세개의 황제제로 복귀하려는 생각이 드러난 후, 손중산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파는 민주공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벌인다. 다만 2차혁명, 호국운동,호법운동은 모두 결국 실패한다. 중국은 공화라는 명칭은 있었지만,공화의 실질은 없었다. 1923년 3월 1일, 손중산은 광주에서 육해군대원수대본영을 성립시킨다. 이는 광주국민정부를 조직하는데 기초를 이루고, 조건을 창조한다. 국공합작이 실현되면서, 국민혁명운동의 흥기로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국민정부가 광주에 정식 성립된다. 도성 광주는 혁명의 중심이 된다. 북벌의 승리진군과 더불어 혁명세력은 주강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발전한다. 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리고 국민혁명운동을 추진하는데 편리하기 위하여, 무한으로의 천도를 결정한다. 1926년 12월 13일 무한임시중앙당정연석회의가 성립된다. 이는 국민정부가 이미 무한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7년 1월 1일 정식으로 무한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고, 무창, 한구, 한양을 경조구(京兆區)로 하고, 전체를 합친 명칭 무한을 국도로 삼는다. 대혁명의 발전은 국민정부를 광주시기에서 무한시기로 접어들게 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공산당에 칼을 들어 반혁명정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4월 18일 남경에 또 다른 중앙정부를 설립하여 남경국민정부를 건립하여 무한정부와 대치한다. 이 때, 중국에는 영한(寧漢)분열의 정치국면이 나타난다. 무한국민정부를 대표하는 왕정위는 금방 우파로 변신하여 '청공(淸共)'의 '715'반혁명정변을 일으킨다. 이는 거창했던 국민대혁명의 최종실패를 의미한다. 이때, 무한측의 반대, 계계(桂係)의 이반, 그리고 서주전투의 패배로, 장개석은 곤경에 빠진다. 그는 이퇴위진(以退爲進)하여 남경정부에 사직서를 낸다. 그리고 8월 12일 남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하야를 선포한다. 9월 16일, 중앙특별위원회가 성립되고, 국민정부 수도는 무한에서 남경으로 이전한다. 이를 통하여 '영한합류"가 실현된다. 장개석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고나서 얼마 후 복귀한다. 그리고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영한합류"는 국민당 일당전제통치의 건립을 의미한다.


1932년, "1.28"사변이 폭발한다. 일본군이 대거 상해로 진입하고, 남경의 형세가 위급해진다. 국민정부는 천도를 논의하고, 어떤 사람은 서안으로 천도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낙양으로 가자고 하며, 어떤 사람은 한구로 가자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낙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3월 6일 국민정부 주석 임삼(林森), 행정원장 왕정위등은 전용차를 타고 개봉에서 낙양으로 간다. 당시의 천도는 명목상으로는 지구항전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도를 전체적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중심은 여전히 남경에 있었다.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완화된다. 11월 국민정부는 도성을 다시 남경으로 되돌아 온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한다. 일본군은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해로 진공하고, 국민당군대는 '송호회전'을 조직하나 실패한다. 12월 국도 남경이 함락된다. 그리고 혈우성풍에 휩싸인다. 국도가 점령당한 것으로는 국민정부가 투항하지 않는다. 1938년 1월 11일, 국민정부는 기관을 남경에서 중경으로 옮긴다. 다만 실제로 군사 및 외교부문은 무한에서 업무를 본다. 무한은 사실상 중국의 임시수도가 된다. 같은 해 7월 이곳에서 사상유례없는 규모의 무한회전이 시작된다. 10월 25일 무한이 점령당하고, 중경은 정식으로 중국항전시기의 배도(陪都)가 된다. 그 후에 중경은 국민정부의 항전지휘중심이 된다. 동시에 이차대전 연합국의 중국전구 지휘중심이 된다. 중경은 항전시기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교육의 중심으로 8년간 지속한다. 중경의 이름은 중화민족의 욕혈항전의 휘황한 승리와 함께 역사책에 영원히 기재된다.


항전에서 승리했고, 국민정부는 남경으로 환도한다. "중국첩극일본(中國捷克日本), 남경중경성도(南京重慶成都)"(중국이 일본에 승리하고, 남경이 다시 수도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중국, 첩극(체코), 일본은 나라 이름, 남경, 중경, 성도는 도시이름이다). 이 대련은 중국인의 기쁜 심정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1946년 2월 5일, 장개석은 국민정부가 5월이전에 남경으로 환도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중경은 영구히 중국의 배도가 된다고 선언한다. 장개석은 '금의환도'하고자 했는데 중국의 정국을 10년전 통치시기로 되돌리려는 것이었다. 1946년 5월 3일 장개석 부부는 남경으로 돌아온다. 5일에는 남경에서 환도대전을 거행한다. 환도후에 국민당은 정치를 국민에게 되돌려 주고, "훈정을 끝내고, 헌정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다만 전면내전이 발발하면서, 민주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국민당 환도후에 가장 앞서서 해야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연이어 패배하여 남경국민정부는 다시 비바람에 흔들리는 지경에 처한다. 회해전투후, 1949년 1월 19일 남경정부 외교부는 각국 대사관에게 광주로 이전하라고 통보한다. 26일, 행정원 정무회의는 장소를 옮겨서 업무를 보기로 결정한다. 2월 1일 중앙당부는 남경에서 광주로 이전한다. 다만 안정되기도 전에 해방군의 백만군대가 장강을 건너고, 강서에서 광동으로 곧바로 진격한다. 광주가 위급해진다. 10월 14일, 국민정부는 수도를 다시 중경으로 옮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은 서남전투에서 일패도지하고, 사천동부를 모조리 잃는다. 11월 22일 다시 성도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사십일동안 국민정부는 광주에서 중경으로 중경에서 성도로 세번이나 옮긴다. 빈번한 천도도 결국 대륙의 국민정부통치를 구원하지 못한다. 1949년 12월 10일 장개석은 대륙과 고별하고, 국민정부는 타이페이로 천도한다. 이제 국민당의 22년에 걸친 통치는 철저히 무너졌다. 중국인민은 북경을 수도로 하는 신중국의 시대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