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냉병기시기에 만리장성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분계선이었다. 만일 이 장성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유목민족이 침입해올 때, 중원왕조는 더욱 거대한 댓가를 치르거나 심지어 망국의 고통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중원왕조가 생존을 의탁한 두 강의 유역은 모두 평원이어서 경작에는 적합하지만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다. 무험가수(無險可守), 즉 방어할만한 험준한 지형이 없다. 오직 북쪽의 태행산(太行山), 군도산(軍都山), 연산(燕山)같은 산맥이 있어 유목민족을 막는 장벽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만리장성은 이들 산맥을 이어서 건설된 것이다.
만리장성 바깥의 땅은 모조리 유목민족의 거주지이다. 예를 들어, 흉노, 거란, 여진, 요, 금, 원, 그리고 청이 있다. 일단 이들 새외의 유목민족인 장성을 돌파하면, 어떤 결과가 타나날 것인가?
전체 화북평야는 막을 만한 지형이 없다. 유목민족의 부대는 천하를 종횡하며 파죽지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떻게 막을 것이냐고
어떻게 막느냐고? 유목민족이 주요부대는 기병이다. 중원정통왕조의 주요 부대는 보병이다. 이렇게 가정해보자. 만일 장성의 보호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천리평원 위에서, 중원왕조는 자신의 피와 살로 된 몸으로 새로운 장성을 쌓아야 한다. 직접 보병으로 상대방 기병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무슨 노래하고 울만한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스스로 오래 살았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성 이외에, 화북평원은 막을만한 장애물이 없다. 황하는 기대할 것이 못된다. 그 강은 매년 홍수가 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겨울이 되면 얼음이 얼어버린다. 한겨울이 되면 그들 유목민족은 말을 타고 강을 건너올 수 있다.
북송은 바로 장성의 보호가 없기 때문에, 적군에게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일단 장성이 함락되면, 중국은 그저 장강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 제2차 방어선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남북의 두 개의 국가가 나타나는 국면이다. 삼국쟁패이건 남북조이건 북송남송이건 모두 그러했다.
그래서, 장성은 전체 중화민족의 생존과 관련이 있다. 그것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중원민족의 발전과 연속에 거대한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후당(後唐)을 무너뜨린 후진(後晋)의 고조인 석경당(石敬瑭)은 이런 장성을 고스란이 상대방에게 넘겨주었다.
6년후인 942년, 석경당은 죽어버리고, 그의 조카인 석중귀(石重貴)가 황위를 잇는다. 역사에서 부르는 "후진소제(後晋少帝)"이다. "후진말제(後晋末帝)"라고도 부른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고 맹국인 거란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기 위하여, 석중귀는 등극하여 황제를 칭한 후, 3개의 성지를 반포한다:
첫째, 칭호문제에서 석중귀는 "신(臣)"이라 칭하고 "손(孫)"이라 칭하지 않는다. 이 자는 석경당보다는 기개가 있었다. 거란을 '할아버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둘째, 이익문제에서 석중귀는 예전의 협의를 수정하여 다시 공정, 평등한 원칙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나중에 구동존이(求同存異)가 도저히 되지 않을 때, 석중귀는 일방적으로 거란과의 교역을 단절한다. 그리고 거란의 상인을 모조리 체포한다.
셋째, 존엄문제에서, 자신의 조상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하여, 그리고 중원왕조가 천하를 종횡하던 위풍을 되찾기 위하여, 석중귀는 결연하게 성지를 반포한다: "거란을 포벌하고, 덕광(야율덕광)을 생포하는 자는 절도사로 승진시켜 주겠다"
이렇게 되자, 이렇게 현상금이 붙은 당사자인 거란황제 야율덕광은 분노하게 된다.
947년, 3차에 걸친 남하 친정후, 거란은 개봉성을 함락시키고, 석중귀를 포로로 잡는다. 후진은 이렇게 멸망한다.
이 해에, 조광윤은 스무살이었다.
뒤의 이야기는 앞과 연결된다. 거란이 후진을 멸망시키고, 야율덕광은 중원을 통일하고자 한다. 그러나 풍토가 맞지 않는데다가, 중원인들이 강렬하게 반발하여, 결국 야율덕광은 초원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가는 도중에 죽는다.
거란이 퇴각한 후, 개운4년(947년) 육월 삼일, 유조초토사 유지원(劉知遠)이 개봉에 진주한다. 그는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고친다. 역사에서 말하는 "후한(後漢)"이다. 이 해에 조광윤은 집을 떠나 고난의 유랑을 떠나게 된다.
이 왕조교체의 과정에서, 중국은 전후로 10개의 지방에 할거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며 중앙정부의 명을 듣지 않는 국가들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역사에서 이를 "십국(十國)" 혹은 "십일국(十一國)"이라 부른다.
이들 국가는 각각: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전촉(前蜀), 후촉(後蜀), 남한(南漢, 荊南), 민(閩), 북한(北漢)이다. 이들 십국중에서 어떤 사학자들은 "북한"이 정통왕조인 '후한'을 이었으로, 북송, 남송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국(國)'으로 칭할 것이 아니라고 보아 이를 삭제하고, "오대구국(五代九國)"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북한'은 계산에 넣지 않지만, 중국북쪽의 "걸연제국(桀燕帝國)'과 중국서부의 '서기제국(西歧帝國)을 합쳐서 요즘 요란하게 떠드는 최신해석인 "오대십일국"이 된다.
당연히 이들 국가가 9개이건, 10개이건, 11개이건 필자는 여기서 하나하나 소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중의 역사에서 이들 국가는 하나하나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대십국의 역사가 끝나면, 이어서 복잡다단한 국면 속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키를 찾아 이들 난제를 해결하고 최종목표인 천하통일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이 승리의 키를 찾기 위하여, 현덕2년(955년) 사월, 주세종 시영(柴榮)은 대규모 시험을 거행하는데, 그 중의 한 제목은 바로 "평변책(平邊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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