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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의화단(義和團)사건을 되돌아본다 (1) - 서방열강

by 중은우시 2016. 2. 25.

글: 유앙(劉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 옛것은 새것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당태종은 위징이 사망하자 이렇게 탄식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사람은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되고, 백성의 행복과 불행에 관련된 것을 취하여, 좋으면 그것을 따르고, 나쁘면 그것을 경계하여, 해에 따라 책을 편찬하여...." 이탈리아사람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당대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상의 견해는 모두 과거를 대하고 역사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가 된다. 당대인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살펴보고, 다시 해석하고 역사에서 당대에 유용한 경험과 교훈을 얻어내는 것은 중국에서 풍부하고 성숙한 실천이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서방에서 상세하게 역사를 기록한 기간은 길지 않다. 어떤 서방국가는 역사 자체가 짧다.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제 막 시작한 일이다.


차고풍금(借古諷今), 이고유금(以古喩今), 영사사학(影射史學), 번안사학(飜案史學)등은 모두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의 범주에 속한다. 단지 거울의 각도가 사람들에게 한 측면만을 보게 하거나, 왜곡된 모양을 보게 만들 뿐이다. 백여년전의 화북대지에서 발발한 의화단사건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핫이슈이다. 그 배후에는 현재중국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긍정하는 자는 애국주의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양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부정하는 자들은 그것을 협소한 배타적인 극단민족주의로 보고, 의화단사건의 가소로운 에피소드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일어난 진정한 원인은 경시한다. 의화단사건의 발발은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 서방제국주의의 중국에 대한 압박은 아편전쟁이후 날로 심해졌고, 청나라정부는 일련의 패전의 결과를 모조리 백성들에게 전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하층민중의 이익은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여기에 천재인재까지 겹쳐서 중국의 민중들은 부득이 반항하게 된다. 비록 하층민중의 반항수단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때문에 반항의 정당성이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의화단운동에 대하여 관찰하고 토론해볼 수 있다.


1. 서방열강


명나라때부터, 서양인들은 중국으로 와서 선교를 했다. 그때, 중국민중은 강렬한 '배외'심리상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때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 그다지 많은 수량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교범위도 넓지 않았고, 갈등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아편전쟁후,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중국의 하층민중과의 갈등도 날로 늘어났다. 비록 선교사의 수, 선교범위가 하나의 원인이지만, 한가지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중국사회내부의 서방에 대한 인지와 반응은 서방의 중국에 대한 정책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방에서 대항해시대를 연 후, 바티칸은 스페인, 포르투갈이라는 두 개의 최초의 제국에 세력범위를 나눠주었다. 아메리카주는 스페인에 속하고, 아시아는 포르투갈에 속하는 것으로. 포르투갈이 페르시아만, 인도양, 말래카등지에서 무력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 왜 마카오에서 중국과는 규칙에 따라 장사를 했을까? 그들이 무력으로 중국을 상대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대했다. 포르투갈은 중국의 해양에서 한동안 해적질을 했고, 명나라를 이길 수 없겠다는 거을 알고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대외무역규칙을 준수했다. 네덜란드도 중국에서 이익을 많이 가져가고 싶어했다.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는 무력으로 상대했다. 네덜란드는 겨우 대만을 점령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정성공의 사적무장세력에 밀려 쫓겨나고 만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원정군을 보내어 중국을 정복할 생각도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이 계획을 포기한다.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서방열강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규칙을 따라 중국과 무역을 진행했다. 그 때 중국과 열강의 관계는 대체로 쌍방에 모두 이익이 있는 것이었고, 호혜호리(互惠互利)관계였다. 이런 상황은 영국이 나타나면서 철저히 바뀌게 된다. 영국은 일찌기 유럽에서 후기도전자로 나타난 후, 먼저 스페인을 격파하고, 나중에는 네덜란드를 상대했다. 네덜란드는 비교적 적어서,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을 한동안 골치아프게 했다. 최종적으로 모든 유럽의 보수세력을 끌어모아 나폴레옹을 물리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중국을 최대의 먹잇감으로 보기 시작한다. 아편전쟁은 중국에게는 거대한 치욕이지만, 서방열강에 있어서 실제로 모든 서방열강들이 이전에 하고 싶었으나 해내지 못했던 일을 마침내 영국이 공업혁명의 위력을 빌어 성공한 것이다. 그 후, 서방열강은 중국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바꾼다. 이전의 호혜호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서방열강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바뀐다. 중국은 시종 손해보는 입장에 처한다. 중국민중의 소위 "구외배외(仇外排外)정서가 대규모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열강의 야만적이고 무정한 착취에 대한 중국민중의 필연적인 반응이었다고. 중국말로 하자면, 네가 불인(不仁)하면 내가 불의(不義)하다고 뭐라하지 말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의화단운동은 두번의 아편전쟁, 중프전쟁, 갑오청일전쟁이후 폭발했다는 것을. 서방열강의 '불인'은 중국민중에게 분명하고 확실했다. 그들의 중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이미 모든 하층민중에게까지 미쳤다. 민중들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과정중에서 서방교회는 아주 특별한 역할을 했다. 당초 바티칸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세계세력범위를 나눠주었는데, 실제로 서방이 '정교합일'의 낙후한 방식으로 전세계에서 그들의 통치를 추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선교는 무력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공동으로 재물을 약탈했다. 다만 이런 방식을 포르투갈이 중국에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제도는 서방보다 선진적인 '정교분리'였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중국을 정복할 수 없으니, 서방은 그저 규칙대로 장사를 해야 했고, 선교도 그저 문화, 관념을 전파하는데 그쳤다. 전쟁, 약탈과 결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그리하여 같은 시기의 유럽과 같이 서로 다른 종교신앙으로 심각한 종교전쟁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만일 나폴레옹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계몽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정부가 중국으로 왔다면 정교합일의 낙후한 방식은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보수세력은 나폴레옹의 실패후에 정권을 장악했고, 그들은 몰락한 스페인, 포르투갈이 일찌기 사용했던 정교합일의 수단을 사용한다. 제2차아편전쟁후, 침략군의 통역을 맡은 프랑스 선교사는 의화(議和)본의 서로 다른 언어를 이용하여, 조항에서 비열한 수단을 쓴다. 중국어버전에 없는 조항을 몰래 프랑스버전에 집어넣었다. 이 조항은 선교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는 포르투갈이 일찌기 보유했던 중국에서의 '보교권(保敎權)' 혹은 '선교권'을 넘겨받았다. 서방의 낙후한 '정교합일' 방식은 마침내 그후 중국에서 널리 사용된다. 중국정부는 무력에서 패배했으므로 이를 막을 수가 없었따. 그저 눈을 멀거니 뜨고 서방의 낙후한 '정교합일'이 중국의 하층사회에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서방교회는 이렇게 하여, 서방열강이 중국에서 제국주의정책을 추진하는 방조범이 되고, 서방인들의 신앙자유는 그후 중국에서는 침략과 동일어가 되어 버린다.


당연히, 각각의 서방열강은 이 문제에서 동일하지는 않았다. 영국, 미국등은 바티칸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정교합일의 경향이 비교적 약했다. 특히 미국은 건국방침의 하나가 선진적인 중국문화와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신교선교사들은 중국에서 대부분 학교 ,병원을 열어 중국인들을 끌어모았다. 기본적으로 선교를 문화관념분야에 유지했다. 선교를 제국주의정책과 결합시키지는 않았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 장기적인 문화침략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독일, 이탈리아등 후기에 굴기한 서방열강과 비교하면 미국선교사의 '정교합일'의 색채는 확실히 약했다. 영국교회는 일찌감치 바티칸에서 독립하였고, 이는 중국이 후발주자로 따라잡을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영국은 비록 정교분리를 실행하는 나폴레옹을 격패시켰지만, 영국은 이 문제에서는 나폴레옹과 같이 중국이 장기간 시행해온 '정교분리'의 선진제도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영국의 중국에 주재하던 외교관도 자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등의 중국주재 외교관 및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정교합일'의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제국주의는 중국에서 공동의 이익이 있어, 영국도 그들과 완전히 관계를 결렬시키지 않았다. '정교합일'과 '정교분리'의 구분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종교와 군사, 경제등을 포함한 정치과 긴밀하게 렬합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종교와 세속정치간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교합일'하의 종교는 거의 정부와 같고, '정교분리'하의 종교는 학교나 교육시스템과 같은 것이다.


의화단운동은 왜 하북, 산동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폭발하였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기는 주로 천주교선교지역이었다. 명나라시기 천주교는 바로 이곳에 많은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교인이 있었다. 강희, 옹정제의 선교를 금지하는 정책은 아편전쟁후에 바뀌었고, 천주교선교사들은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금교시기에도 신앙을 유지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청나라말기의 각종 교안(敎案)의 발생지를 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모두 천주교선교지역이다. 신교선교지역에서 교안이 발생하는 비율은 비교적 낮다. 청말에, 미국의 신교도 산동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산동에서 발생한 교안은 여전히 주로 천주교에 대한 것이다. 신교교구에서 발생한 교안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바교적 흉악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현상만 본 것이고 본질은 보지 못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더욱 '흉악'한 원인은 바로 천주교와 그에게 선교권을 부여한 서방열강의 세속정부가 함께 정교합일의 방식을 추진했기 때문에, 천주교의 선교행위는 중국민중의 이익과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자신의 등급제도가 있다. 중국교구에서 그들은 이 등급제도와 중국의 지방관리의 품계를 완전히 대응시키고, 선교사들이 중국교인들에게 받은 예의규범도 예를 들면 고두하궤(叩頭下跪)를 받았다. 중국민중의 지방관리에 대한 예의규범과 거의 같았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현지의 사법에도 간여했고, 교민과 평민의 재산분쟁, 문화충돌에도 깊이 개입했다. 심지어 무력으로 성당과 교민을 보호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지방정부 외의 또 하나의 정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중국교민의 고두하궤를 받는 동시에, 청나라황제에게 고두하궤는 하지 않으려 했다. 이 두 개의 '정권'이 철저하게 대립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주교의 이처럼 강렬한 '정교합일'의 경향은 아메리카에서는 강력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나, 선진적인 정교분리원칙을 유지해온 중국에서는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유럽종교개혁과 르네상스운동이후, 서방에서 가장 발달한 국가는 대부분 신교국가이다. 유럽 천주교국가는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고, 일찌기 발달한 천주교국가인 스페인, 포르쿠갈은 이때 이미 쇠락했다. 영국이 앞장서서 무력으로 중국의 대문을 연 후에, 비교적 실력이 낙후된 천주교국가들은 중국이라는 좋은 먹잇감을 앞에 놓고 조급한 탐욕을 보였다. 독일, 이탈리아는 그중에 전형적이다. 아편전쟁이전에 독일은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비스마르크 수상이 독일을 통일한 후, 독일은 서둘러 중국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한다. 산동은 독ㅇㄹ이 오랫동안 노리던 곳이다. 독일은 유럽 종교개혁의 발상지이고, 기독교 신교의 탄생지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온 독일 선교사들은 신교의 곽사립(郭士立, Karl Friedrich Gutzlaff)도 있고, 천주교의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도 있다. 청나라말기 산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독일선교사인 안치태(安治泰, John Baptist Anzer)는 천주교가 새로 창립한 교파인 '성언회(聖言會, Societas Verbi Divini,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이다. 이 교파는 '정교합일'의 경향이 아주 강렬했다. 독일선교사는 당시에 심지어 곡부(曲阜)에 성당을 건립하여, 문화적으로 철저히 중국을 정복하려고까지 생각한다. 비록 이 계획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이 청도를 점령한 것 자체가 아주 무리했다. 그후 자주 군대를 보내어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민중을 진압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굴기한 유럽 천주교국가는 중국에서 조급하게 탐욕을 드러냈고, 정교합일의 방식으로 그들의 제국주의 전략과 정책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반항, 교안빈발의 중요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일단 지방에서 중국하층문중과 갈등이나 충돌이 발생하면, 지방관리들이 선교사들에게 철저히 말을 듣고 시키는대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교사들이 약간만 불만을 갖게 되거나 기타 목적을 지니면 고의로 사건을 일으켜서 사태를 확산시켰다. 그들은 항상 즉시 대사관에 보고하고, 서방세속정부의 외교관이 즉시 청나라의 총리아문에 외교조회를 보낸다. 자주 만일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했는가? 천주교의 소위 '보교권'때문이다. 청나라말기의 보교권은 프랑스정부에 속했다. 중국에서 이 '보교권'은 프랑스외교관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신교는 '보교권'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교선교사들은 중국민중과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걸핏하면 대사관에 보고하지 않았다.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보불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으므로 프랑스가 '보교권'을 행사하는데 독일의 중국에서의 이익을 해칠까봐 우려했고, 이로 인하여 독링은 교안이 발생하면, 자주 프랑스를 제치고 단독으로 일처리를 했다. 그들의 흉악한 이미지는 영국조차도 자주 불쾌하게 여길 정도였다. 청나라정부는 당시에 서양인들간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지 못했고, 일단 서양인의 외교조회를 받으면, 일반적으로 즉시 지방관리에게 선교사의 뜻에 따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지방관리들은 지방분쟁을 처리할 때, 공평하고 공정할 수 없었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협할 뿐아니라, 선교사들은 대사관, 총리아문을 통하여 강력하게 지방관리의 교체를 요구했다. 심지어 선교사들이 마음에 둔 사람을 관리로 삼도록 추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간 것은 바로 서방열강이 추천한 결과이다. 그래서 원세개는 부임하자마자 의화단을 대거 진압한다. 중국하층민중은 서방열강, 선교사, 교인과 청나라관청의 여러 겹에 걸친 압박하에, 공평한 대우는 받을 수도 없었고 ,처지는 어려워지고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