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나라정부
의화단운동 후기는 청나라정부의 지지와 일정한 관계가 있으므로, 당시의 관청도 '구외배외'로 지목받았다. 아래에는 "협애구외(狹隘仇外)'하는 백성이 있고, 위에는 '맹목배외(盲目排外)'하는 고관이 있었으니, 한바탕의 재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의화단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질책하는 것은 사실상 강대한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당금 중국에서 계속 나타나는 서방사회에 대한 비판과 질의의 목소리에 대한 것이다. 다만 오늘의 중국이 서방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구외배외'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확실히 정확하지 않다. 의화단운동시기의 청라나정부를 간단하게 '구외배외'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정부는 한편으로 의화단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의화단에 반대했다. 육현(毓賢)은 관리로서 청렴했는데,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배외적인 청나라고관중 하나로 여겨졌다. 의화단운동이 산서에서 활발했던 것은 육현이 산서순무로 재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의화단이 실패한 후, 육현은 조정에 의하여 처형당하는데, 민중은 그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여겼다. 육현은 형을 받기 전에 특별히 유언을 쓰는데, 민중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고, 조정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현이 산동에서 재직할 때는 의화단의 전신인 "대도회(大刀會)"등 민중을 극력 진압한 바 있다.
청나라는 11개국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한 후, 각지의 관리들에게 북경으로 와서 근왕(勤王)하도록 호소한다. 이홍장, 장지동, 성선회, 유곤일등 지방관들은 아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을 '교조(矯詔)'로 취급했다. 그리고 서양인들과 함께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만들어, 북경의 '소란'을 구경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청나라의 통치상층부는 의화단에 대한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 구외배외는 청나라상층부의 유일한 입장이 아니었다. 당시 순열장강수사대신인 이병형(李秉衡)은 '근왕'령을 받은 후, 수백명을 데리고 강남에서 북경으로 출발한다. 이병형은일찌기 광서에서 재직한 바 있고, 중프전쟁때, 풍자재(馮子材)에 협력하여 '양산대첩'을 거둔다. 갑오청일전쟁때 이병형은 산동순무로 있었는데,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협형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처벌을 청한다. 그러나 조정은 여전히 그를 유임시킨다. 다만 그는 시종 패전에 대하여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반대하여 산동을 떠나 사천총독으로 간다. 그러나 부임하기도 전에 서양인들의 반대로 다시 파면된다. 순열장강수사대진을 맡았지만 실권을 별로 없었고, 자신의 손안에 병사들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병형은 북경에 도착하자 서태후에게 병력을 요구한다. 서태후는 그에게 영록을 찾아가라고 하는데, 영록은 군대를 내주지 않는다. 이병형이 말한다. 그러면 문서를 내려달라. 그러면 내가 1만명을 모을 수 있다. 영록이 말한다. 사람을 모으는 것은 시간이 부족하다. 이명형이 다시 말한다. 그러면 나에게 총포와 탄약을 달라. 영록이 말한다. 산동에 가서 가져가라. 이병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자신이 일찌기 산동에서 재직할 때의 명망을 이용하여 500명의 산동에서 온 의화단을 뽑는다. 그리고 다시 서태후를 통하여 외지에서 북경으로 근왕하러 온 4개의 부대의 지휘권을 갖는다. 그는 천진을 수복하고자 했으나, 총리아문은 천진, 대고의 지도를 그에게 주지 않았다. 사실상 이병형이 이끄는 1만여명은 천진에 가기도 전에, 사기가 심각하게 하락하여, 통주 동쪽이 양촌 부근에서 서양군에 궤멸당하고 만다. 청나라병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70세의 이병형은 비분강개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죽기 전에 그를 떠나지 않으려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한다.
이병형의 순국은 대세의 흐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객관적인 원인도 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서양인과 의화단을 대하면서, 한마음이 되어 대응하지 않고, 서로간에 싸웠다. 이것이 아마도 최종적으로 실패한 주요원인일 것이다. 이병형 이전에, 천진전투에서 이런 상황은 이미 나타났다. 송경(宋慶)은 청나라말기 저명한 장수중 한 명이다. 염군(捻軍)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승진했다. 민국시기의 군벌인 조곤, 장작림은 모두 한때 송경의 부하였고, 장작림은 송경의 위병(衛兵)을 지낸 적도 있었다. 의화단운동때, 송경은 북양군부방판이었다. 천진전투때, 송경은 고의로 의화단은 인체방패로 삼았고, 의화단은 용감하게 앞에서 돌진했다. 이는 서양인의 총포 앞에 의화단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송경의 군대는 멀리 뒤에 있으면서 서양인의 총포에 맞아죽지 않고 물러나게 되면 청나라병사들이 그들을 죽였다. 송경의 군대에 맞아죽은 의화단인들이 서양인에 죽은 의화단인들보다 많았다. 송경은 이에 대하여 의화단이 전투에 겁을 먹고 도망쳐서 그가 총을 쏘아 사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도 송경은 의화단을 대거 죽였다. 즉, 양군이 대치할 때, 청나라정규군은 자기측의 동맹자들을 도살한 것이다. 만일 의화단이 구외배외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청나라군대가 전쟁터에서 의화단을 팔아먹고 도살한 행위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단왕 재의의 아들은 서태후에 의하여, '대아가'로 세워져, 친서방의 광서제를 폐출시킬 계획이었다. 그의 북경에 있는 주택은 심지어의화단의 '총본산'이 되었다. 다만 바로 그도 경성에서 의화단을 대거 죽인다. 그의 명령과 지휘를 듣지 않는 의화단인들은 전선으로 보내고, 송경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는 청군이 후방에 위치하고, 앞으로 돌진하는 의화단을 기회만 잡으면 죽여버렸다.
동교민항의 대사관지역을 공격할 때, 서태후는 공격의 총포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영록의 수하의 한 '천진무비학당'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위력이 큰 독일의 신식대포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학생은 포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전하여 포탄을 정확하게 대사관구역 곁의 아무도 없는공지에 맞춘다. 서태후는 포성을 듣고는 자연히 기뻐했다. 서양인을 다치지 않게 했다고, 영록은 그를 크게 치하한다. 그는 경자사변후 계속 승진하게 된다. 이때도 서태후는 여전히 서양인들과 담판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대사관구역을 오랫동안 포위하면서, 총리아문은 사람을 보내어 부족한 물건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서양인들은 놀라서 시험삼아 말한다. 채소, 과일이 부족하다고. 그런데 청나라정부는 정말 전쟁상태의 서양인들에게 과일과 야채를 보내준다. 서태후는 확실히 "민심가용(民心可用)'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와 다른 청나라의 고관들의 행위는 민심을 심각하게 타격했고, 민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들이 타격하고 상해를 가한 것은 바로 소위 '구외배외'하는 민심이었따. 서태후는 민심이 그저 '부청(扶淸)'이라는 것만 보고, 청나라조정이 이익을 위하여 단지 의화단을 대표로 하는 민심을 이용했을 뿐이다. 서태후등은 의화단의 '부청'의 뒤에는 민중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강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으려 했다. 청나라정부는 이런 요구를 심각하게 무시했다. 의화단은 확실히 '맹목배외'의 경향이 있었다. 다만, 청나라정부는 서양인들과 암중으로 통하며 몰래 결탁했다. 이것도 의화단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아닐까? 당시 청나라조정은 북경부근에 있던 병력과 장비가 모두 팔국연합군보다 못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실패했을까? 다시한번 큰 치욕을 당해야 했고, 민심을 모조리 잃게 되었을까? 서태후의 선전포고는 칭송할 가치가 없다. 서태후의 의화도 마찬가지로 찬미할 가치가 없다.
당시의 청나라관리들은 대체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눌 수 있다. 주전파의 내부에도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물며 주화파는 말할 것이 없다. 의화단운동이 폭발하기 전에, 1897년, 산동에서 거야교안(巨野敎案)이 발생하여, 2명의 선교사가 피살된다. 거야현령 이연서(許延瑞)는 오랫동안 현지에서 서양인의 편을 들어왔다. 그래서 현지민중들은 "서양인의 개같은 관리"라고 불리웠다. 독일의 산동에서의 침략의도가 명백하였으므로, 산동은 교안이 가장 빈발하는 지구중 하나였다. 다만, '거야교안'이전에 청나라의 공식자료에서 서양인과의 기록중에 거야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거야가 태평무사해서가 아니라, 허연서가 서양인과의 분쟁을 처리할 때, 항상 서양인의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아주 만족했고, 북경의 총리아문에까지 보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조정도 만족했고, 허연서는 안심하고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야교안'이 발발한 후, 허연서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성당을 보호하고, 성당에 총포를 내준다. 그리고 친히 성당의 보초를 선다. 반달안에 40여명의 혐의자를 체포하고, 일부 혐의자들은 고문으로 죽는다. 최종적으로 9명의 죄인을 확정하여 2명은 신속히 처결하고 나머지 7명은 감금한다. 여기서 얘기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건의 처리에 참여한 관리중 하나는 당시 산동고사(山東皐司)를 지내고 나중에 산서순무로 옮겨가는 육현이다. 당시의 산동순무는 바로 앞에 언급한 이병형이다.
이병형, 육현, 허연서등은 서양인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신속히 사건을 마무리짓어 끝내려고 한다. 그 결과 아직 다 처리를 끝내기도 전에 서양인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동의 지방관청에서는 이미 범인을 모두 처결하였는데, 서양인들은 잘못 처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몇 명은 억울한 사람이고 진정한 흉수는 법의 처벌을 피했다고 말한다. 서양선교사들은 따로 14명의 혐의자의 명단을 제시한다. 선교사들이 중국경찰의 업무를 담당했으니 그것고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 선교사들이 제공한 이 혐의자 명단은 진짜 혐의자들이 아니었다. 그저 현지에서 선교사에 반대하고 선교사들과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거야현령 허연서는 이번에는 서양인들의 진실한 요구사항이 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서양인에게 잘 보이려고 엉뚱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거야교안'의 진정한 흉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누가 신경쓸 것인가? 관청은 서양인에게 잘 보이려고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서양인들은 산동을 침략하기 위하여 사태를 확대시킨다. 그 결과, "서양인의 개같은 관리"인 허연서는 양쪽에 모두 밉보여서 결국은 관직을 잃는다.
관청과 서양인의 이러한 일처리방식은 민중의 분노를 샀다. 민중의 '구외배외'정서는 확실히 진짜이다. 다만 만일 의화단운동의 원인이 바로 관청과 민중의 '구외배외'가 결합된 것때문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청나라관청의 '구외미외(懼外媚外)의 심리상태와 표현도 마찬가지로 분명했고, 심지어 더욱 강했다. 의화단운동이전의 수십년간, 청나라관부는 대도회, 매화권, 신권등 의화단의 전신에 오랫동안 소탕정책을 썼다. 설사 의화단이 이미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이후에도, 청나라조정은 의화단에 대한 '소탕과 위무'정책은 계속하여 분명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의화단을 소탕"한다는 것이 '의화단을 초무'하는 것보다 우세했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관청은 최종적으로 의화단과 함께 했는데, 관건적인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전의 '구외미외'가 서양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약간을 얻어내면 더 많이 얻어내려 했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중국에서 이익을 획득하려는 요구가 청나라조정의 '구외미외'로 충분히 만족될 수 없었다. 서양인들의 무리하고 무례한 행동은 일관되게 '구외미외'를 유지하던 청나라관리마저도 더 참을 수 없게 만든다.그러나 관청내부에서 서양인에게 항거하는 역량은 통일되지도 않았고, 충분하지도 않았다. 부득이 민간의 역량을 빌려와야 했다. 다만, 민중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전에 장기간 의화단을 소탕하는 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의화단과 한편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서로 생각은 달랐다. 단지 이용해보자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관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민중의 이익을 생각해준 것은 아니다. 민중은 이로써 청나라관청의 서양인에게 아양떠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단지 이번에는 '애교'를 심하게 떨었고, '이혼'까지 하는 모양을 갖춘다. 서양인들이 서태후를 처벌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자, 이 할망구는 즉시 '양중화지물력(量中華之物力), 결여국지환심(結與國之歡心)"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고, 그리고 '자책지조(自責之詔)"까지 내려보낸다. 그러므로, 의화단운동의 거대한 비극을 조성한 원인을 만일 단순히 '구외배외'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화 한 것이다. 관청의 '구외미외'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만일 '구외배외'가 정확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결여국지환심'의 '구외미외'도 마찬가지로 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온고지신,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이 결론은 청나라에 대하여도 그러하지만,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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