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풍홍(馮弘): 중국고대 최고의 냉혈군주(冷血君主)

중은우시 2016. 4. 6. 00:18

글: 양민복(楊民僕)


1. 가장 특이한 군주


연(燕)나라는 생명력이 완강했다. "오호십육국"중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남연(南燕), 북연(北燕)이 있다. 봄바람이 한번 불면 죽었던 풀이 다시 되살아나듯이....그래서 <천룡팔부>의 모용복은 매일 나라를 되찾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다만, 나머지 4개의 연나라는 모두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것이지만, 현재의 동북일대에 세워진 북연의 군주는 아주 특이하다. 바로 한인(漢人)이다.


그의 이름은 풍발(馮跋)이다. 어려서부터 말이 없었고, 오랫동안 모용씨의 뒤에서 남으로 북으로 정벌을 다녔다. 그러면서 이미 선비족에 동화되고, 행동거지나 말이 선비족과 똑같았다.


"후연"의 마지막 황제는 모용희(慕容熙)이다. 총애하던 황후 부훈영(苻訓英)이 죽은 후, 그는 죽고자 했고, 모든 대신들의 머리를 잘라서 이 여자를 제사지내는데 썼다. 풍발은 이미 권력핵심층에 들어가 있었고, 중위장군(금군을 장악함)을 맡고 있었다. 매일 가슴을 졸이며 살았고, 이 '치정황제'가 자신의 머리를 노린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깊은 산 속으로 도망친다.


그와 또 다른 대신 모용운(慕容雲)은 모용희가 곡을 하며 천지분간을 못할 때, 같이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모용희를 죽여버린다. 나중에 모용운은 다시 곁에 있던 두 명의 호위병(아마도 풍발이 심어놓은 자들)에게 암살당한다. 풍발은 자연스럽게 최고지도자에 오른다. 409년 그는 스스로 천왕에 오르니 역사에서는 이 왕조를 '북연'이라고 부른다.


풍발은 한인이다. 왜 선비족들의 가운데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명성에 의지해서이다. 그는 정권을 잡자 바로 각종 가혹한 잡세를 폐지한다. 백성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기뻐서 눈물을 흘린다; 각종 엄중한 혹형도 없애서, 대신들은 백색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 배한 박수소리가 가득했다.


선비족의 눈에 풍발은 친척이 아니지만 친척보다 나았다. 북연은 태평스럽게 20여년간 지속한다.


유연(柔然)의 칸은 북연에 가혹한 조건을 요구한다: 풍발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취하겠다.


북연의 대신들은 속속 반대한다: 전대의 사례에 따르면, 그들은 비빈의 딸을 취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낙랑공주를 이민족에게 시집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발은 구혼에 동의한다. 이때부터 위(魏)나라는 북연에 대하여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공격할 담량은 없어진다. 왜냐하면 풍발은 유연과 손을 잡아서 함께 위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2. 가장 특이한 죽음


군주가 병사하거나 피살당하는 경우는 모두 적지 않다. 그러나 놀라서 죽은 경우는 많지 않다. 430년, 풍발은 중병에 걸리고, 태자 풍익(馮翼)이 '대리군주'가 된다. 원래 국가의 권력은 안정적으로 이전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풍발이 총애하는 후비 송씨였다.


송씨는 풍수거(馮受居)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현재 궁안이 혼란스러운데, 부귀는 리스크를 안아야 얻을 수 있다. 풍수거를 황제에 올리는게 낫겠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태자에게 말한다: 부왕의 병이 곧 좋아질텐데, 너는 어찌 아직도 조정을 관리하느냐. 권력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것이냐.


풍익은 글만 읽은 서생이었다. 그는 서모가 자기에게 호의로 얘기해줬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대리군주직을 내놓고 태자궁으로 되돌아간다. 송씨는 즉시 황궁내외의 연락을 차단하고, 거짓 성지를 내린다: 왕자, 대신은 모두 입궁할 수 없다. 태감 호복(胡福)은 음식물을 들고 드나들 수 있다.


진정으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태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호복은 암중으로 풍발의 막내동생인 녹상서사 풍홍에게 연락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풍홍은 수십명이 사사(死士)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간다. 송병씨는 대문을 닫으라고 명을 내린다. 풍홍의 가노인 고두두(庫頭斗)는 무림고수로 가볍게 몸을 날려 높은 담장을 넘어 풍발의 침궁으로 쳐들어간다. 많은 궁녀들은 돌연 남자가 나타나자 놀라서 소리지른다. 고두두는 화살을 쏘았고, 궁녀 한 명이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죽는다.


병석의 풍발은 놀라서 온 몸의 근육이 마비되면서 고개를 꼬고 죽는다.


3. 가장 잔인한 도살


풍홍은 즉위를 선포한다. 그러자 태자인 풍익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궁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왕위를 쟁탈하려 한다. 시신이 곳곳에 널리고 난 후에 풍익을 패배당하고 곧이어 사사된다.


풍발은 생육능력이 아주 강해서, 10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는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였다. 더욱 보기 드문 일은 풍홍이 참초제근하여, 이들 친조카를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막 태어난 영아마저도 그냥두지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으로 이와 같은 냉혈군주는 역사에서도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4. 가장 장관인 도망


풍홍과 송씨는 자연히 원수지간이 된다. 그래서 그녀를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풍홍은 그녀의 미색을 탐하여 그녀를 풀어주고 공공연히 이 과부가 된 형수를 비로 맞아들인다.


탁발도는 연나라에 혼란이 발생한 것을 보고, 그 틈을 노린다. 풍홍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새로 세운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한다. 풍왕인의 모친 모용씨는 가장 총애받는 여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에는 곡을 하며 눈물을 비오듯 흘린다. 풍홍은 졸지에 마음이 약해졌다. 대신들은 극력 권한다: 아이 하나때문에 나라를 잃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풍홍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가장 어린 딸을 북위로 보내어 탁발도의 비가 되도록 한다.


436년, 탁발도는 안면을 바꾸어 대거 북연을 공격한다. 풍홍은 비밀리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한다. 이 해 사월, 북위의 군대가 도성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에 도착한다. 고구려의 원군도 도착한다. 풍홍은 기뻐하며 이들 고구려군대를 성안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고구려 군대는 성을 모조리 약탈한다.


풍홍은 무너졌고,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쳐야 했다. 그는 용성의 궁전을 모조리 불태우도록 명령하는데, 큰 불은 10일이 지나서야 꺼졌다고 한다.


북연의 무수한 백성들도 이 도망대군에 가담한다. 남녀노소가 대열의 중간에 끼어 있었고, 양쪽은 북연의 정예병이 있었다. 고구려의 군대는 후방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들 행렬은 80여리나 늘어졌는데, 역시 역사상 보기 드문 광경이다. 이 대오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안전하게 고구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북위에서 추격을 책임진 장군은 고필(古弼)이었는데, 술에 취해서 뻗어 있었다. 탁발도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고필을 성문을 지키는 일반사병으로 강등시킨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북연은 멸망하고, 전후로 28년간 존속했다.


5. 스스로 죽을 길을 찾은 황제


풍홍은 고구려에 도착한 후, 탁발도는 사람을 보내어 고구려에 풍홍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의리가 있었다.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북위의 요청을 무시한다.


고구려는 또한 사신을 보내어 풍홍을 위로했다: "이렇게 멀리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풍홍의 자존심을 극도로 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구려가 자신이 도망친 것을 조롱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풍홍은 얼굴색을 굳히고 태도도 지극히 오만했다.


고구려는 지방 하나를 그에게 주고 풍홍의 '망명정부'가 지내도록 해준다. 풍홍은 이곳을 자신의 영지로 삼아서 새로 각종 법률을 제정하고, 자신을 황제라 칭한다. 그리고 고구려에 서신을 보낼 때도 조서를 내려보낸다.


고구려의 군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풍홍은 이제 남조 송(宋)에 구원을 요청한다. 천리나 떨어진 곳에 구원을 요청하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고구려는 결국 그를 죽여버린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북연이 멸망할 때, 풍홍에게는 풍랑(馮朗)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북위에 투항하여 관직을 받는다. 풍랑은 딸을 하나 낳는데, 그녀가 바로 수퍼여강자 풍태후(馮太后)이다. 그녀의 일생은 무측천과 비슷하고 북위에 수십년간 영향을 미친다.


풍홍이 피살될 때 그의 넷째아들은 남조로 도망친다. 그는 광주에서 관리를 지낸다. 그의 후손 풍보(馮寶)는 영남의 여두령 선부인(冼夫人)과 결혼한다. 풍보의 제6대손자중에는 풍원일(馮元一)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중에 궁에 들어가서 태감이 된다. 그가 바로 당나라때 유명한 환관 고역사(高力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