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무측천이 황제로 가는 길의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중은우시 2015. 2. 10. 20:11

글: 복녕객(福寧客)

 

무측천은 어려서부터 미인이었다. 부친 무사확은 목재상인으로 반수(反隋)에 공이 있고 정치적업적이 있는 고위관리이다. 그러나 그런 출신이라 하더라도, 무측천이 황실국친의 울타리안으로 끼어들어가서, 황비, 황후가 되고 황제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완성하기 불가능한 임무이다. 한걸음만 잘못 떼면 가벼울 때 축출되어 냉궁에 들어가고, 무거우면 목이 날아나고 친척들까지 연좌될 것이다. 무측천은 이를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완성해 냈는가?

 

입궁

 

주요곤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정관11년(637년), 14살의 무측천은 당태종에 의하여 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12년간 꼬박 총애를 받지 못한다. 당태종이 붕어한 후, 그녀는 장안 감업사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이제 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기회는 거의 없어 보였다. 다만, 당태종의 병이 위중할 때, 그는 태자 이치와 애정을 쌓았다.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 후에도 이치와는 여전히 우단사련(藕斷絲連)되어 있었다.

 

영휘2년(651년),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정적인 소숙비와 총애를 다투기 위하여, 당고종 이치에게 무측천을 궁중으로 불러들이라고 청한다. 이치가 허락하여, 무측천은 비로소 다시 입궁하게 되고 곧이어 아들 이홍(李弘)을 낳는다.

 

궁중투쟁

 

주요적수: 왕황후, 소숙비, 원로대신

 

자리를 확실히 잡기 위하여 무측천은 먼저 고육계를 쓴다.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영휘5년(654년), 무측천은 장녀 안정사공주를 낳는다. 왕황후가 보러 왔다. 그녀가 돌아간 후, 무측천은 공주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왕황후에게 떠넘긴다.

 

황후에 오르기 위하여 친딸을 목졸라 죽인다. 이 장면은 역사상 논쟁이 아주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 오대에 책으로 만들어진 <구당서>에는 단지 소공주가 급사했다고만 적혀 있다.

 

당시, 왕황후를 지지하던 사람으로는 주로 장손무기, 저수량을 위시한 원로대신들이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강대했다. 황제 이치도 어느 정도 양보하는 상황이었다. 무측천은 이치의 마음을 읽었고, "폐왕입무"를 이치가 황권을 다시 떨치는 표지라고 해석한다. 그녀는 한편으로 황제의 편에 서면서 다른 한편으로 폐후를 지지해준 대신들에게 큰 상을 내린다.

 

얼마 후, 이치가 조서를 내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한다. 그리고 무측천을 황후로 삼는다. 장손무기, 우지녕, 한원, 내제등은 삭탈관직되어 경사에서 쫓겨난다.

 

칭제

 

주요적수: 이씨황족 및 그들을 지지하는 대신

 

이치가 즉위한 후에 병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무측천은 그를 도와서 정무를 처리할 기회를 얻는다. 천천히 그녀는 정치적 위망을 쌓아간다.

 

인덕원년(664년), 이치는 무측천에게 그와 함께 조회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여, 임조청정한다. 그녀의 정치경험과 영향력은 또 한 단계 성장한다.

 

이와 비교하면, 그와 이치의 사이에 낳은 아들의 운명은 모두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태자 이홍은 요절하고, 둘째아들 이현은 역모로 폐위되고, 이치가 붕어한 후, 셋째아들 이현이 즉위한다. 그러나 몇달 황제로 있어보지도 못하고, 무측천에게 쫓겨나고, 넷째아들 이단이 황제에 오른다.

 

이당의 정통을 잇기 위하여, 서경업 형제, 박주자사 낭야왕 이충, 예주자사 월왕 이정이 전후로 거병한다. 그러나 모두 진압된다.

 

그 이후, 무측천은 고밀(告密)제도를 건립하고, 주흥, 내준신등 혹리를 기용하여 형옥을 관장하고 이당종실을 대거 살륙한다.

 

재초2년(691년), 무측천은 민의에 순응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당을 주로 바꾼다. 연호를 천수로 한다. 그 외에, 그녀는 이름을 "조(曌)"로 바꾼다. 이는 자신이 해, 달처럼 숭고하며, 하늘의 위에 높이 걸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제의 길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무측천 일생에서 최대의 역경은 바로 개조환대(改朝換代)이다. 기실 당을 주로 바꿀 때 그녀는 아주 강경한 반대에 부닥친다. 가장 심하게 반대한 서경업은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30만대군으로 중앙에 도전한다. 서경업이 반란을 일으키는 동시에 조정의 배엄은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려면 아주 간단하다. 태후가 퇴위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바깥에서는 누가 싸움을 걸어오고, 안에서는 누가 물러나라고 말하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여기에는 3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 처와 모친이라는 신분을 충분히 이용한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이씨를 무씨로 고치는 문제에서, 어떻게 충분히 처와 모친이라는 신분을 이용했는가. 무측천은 당고종의 중요한 보좌자였다. 당고종에게는 풍질이 있었는데, 이는 고혈압에 유사하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으로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무측천은 그의 합리적인 파트너이다. 그는 무측천을 많이 신뢰한다. 어느 정도나 신뢰했을까? 그가 죽을 때 남긴 유조를 보면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다. "무측천이 정무를 처리한 사항은 정치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 내용을 계속 존중하여 쓰도록 하라." 이는 무측천이 계속하여 집정하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유조를 가지고 일처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고종은 모든 신하들에게 무측천이 한 말은 계속 쓰고, 그녀를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조그만치도 태만히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정치적유언은 아주 쓸모가 있었다. 집권사회에서 정치적 유언은 아주 유용하다. 무측천은 당고종의 이 유조를 잘 활용했다.

 

둘째, 모친의 신분. 당고종 이후에 황제에 오른 사람은 당중종 이현이고, 이현을 끌어내린 후에는 이단이다. 무측천은 어떻게 그들에게 중국전통이 효도를 이용하여 제압한다. 중국고전문화에서 남존여비도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덕목은 아니었다. 다시 또 다른 교조의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모존자비(母尊子卑)이다. 모친은 여자이고, 아들은 남자이다. 다만 모친아들관계에서는 모친이 아들보다 존귀하다. 그래서 무측천은 당중종시대에 그를 끌어내리고, 그를 끌어내린 이유는 바로 당중종이 한 말실수이다. 천하를 장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화가 나서 한 말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관직을 주면 관직을 주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천하를 그에게 넘겨서 황제가 되라고 할 것이다. 무측천은 이 말을 꼬투리삼아서 언젠가 나의 아들이 천하를 그의 장인에게 넘겨준다면 이는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 이런 아들은 필요없다. 그래서 그는 끌어내려야 한다. 그리고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에 올린다. 이단은 말을 잘 들었다. 무측천은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내 아들은 아주 효성이 지극하다. 부친이 죽으면 아들은 비통해한다. 이 비통은 얼마나 오래 가야 하는가. 중국고대에는 삼년상을 중시한다. 아이가 막 태어나서 세 살이 될때까지 부모가 안아서 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감사의 정은 3년을 지속해야 한다. 그래서 내 아들은 아주 효성스러우므로, (부친 당고종이 죽은 후) 3년내에는 정무를 처리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잠시 대신 정무를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처권과 모권을 활용한 것이다. 중국고대는 부부일체로 보았다. 남편과 부인은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남편은 처에 대하여,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나는 안심하겠다'라는 정치적 유언을 남겨서, 처가 이를 이용할 수 있게 했고, 또 다르게 이용한 자원은 효도이다. 모친은 아들보다 존귀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가 전통에 반하는 행동을 했지만, 기실 그녀는 전통을 이용하여 반전통을 완성한 것이다. 최소한 명분은 아주 멋있게 내걸었다. 처권과 모권을 가지고 당고종이 사망한 후 계속 집권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녀가 이후 이당을 무주로 바꾸는 기초를 닦은 것이다. 그녀는 당고종이후에 계속 집권했고, 아들을 억눌렀다. 이는 아주 중요한 황제의 위에서 황제를 누르는 조치였다.

 

셋째, 황제는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는 마음대로 모권을 내세워 아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이는 황제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다만 국가에는 황제 이외에 대신도 있다. 대신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신들이 모두 그녀의 이당을 무주로 개조환대하는 것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적인 해결방법은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는 것이다. 대신들 중 많은 사람이 반대하면, 하나하나씩 잡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살계경후(殺鷄儆猴)했고, 시간문제를 해결했다. 이자성은 북경에서 1달을 머물렀는데 모두 '적(賊)'이라 한다. 청조황제는 북경에서 2백여년간 있었는데 모두 '황제'라고 불렀다. 황제와 '적'간의 차이는 바로 시간이다. 혹리정치는 왜 시간을 해결했는가? 무측천은 아래의 대신들이 자신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혹리를 통하여 붙잡아들여서 죄명을 덧씌워 죽여버린다. 이때 전체적인 공포분위기가 형성된다. 원래 그녀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이때는 조금 움츠려 들게 된다. 왜냐하면 황제가 엄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괜히 먼저 나서서 칼을 맞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행되니 어떻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 1년이 지나면 원래 90%가 반대했는데, 70%로 줄어든다. 이제 이렇게 1년간 평안무사하게 지내는데 익숙해 지면서 다시 30%의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고 반대하지 않게 된다. 이때 다시 사람을 잡아들여서 죽인다. 그리고 다시 엄하게 단속하고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이렇게 하면 다음 해가 끝나면 그녀에 반대하는 사람의 비율은 다시 70%에서 50%로 줄어든다. 그후에 다시 한번 똑같이 한다. 세 해가 지나고 나면, 50%에서 30%로 다시 줄어든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해나가서, 5년이상 통치하게 되면, 반대역량은 아주 적어진다. 아마도 5%. 10%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을 겁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겁을 주는 것도 한 면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관리들이 정말 자신의 통치하에서 좋은 점이 있다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득을 볼 수 있고, 여지가 있다면 사람은 자유를 원한다. 사람은 공간을 원한다. 이 점을 무측천은 어떻게 하였을까? 과거제를 채택한다. 무측천은 과거제를 대거 시행한다. 과거제의 정수는 바로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 대학입시는 바로 과거제가 변화한 것이다. 시험답안지에 집안이 어디인지는 쓰지 못하게 하고, 그저 답안지 하나만을 가지고 합격여부를 결정한다.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게 되면서, 배경이 없는 관리들이 승진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은 바로 집안배경을 너무 따지는 것이었다. 당왕조는 위진남북조를 이어받았는데, 위진남북조는 집안을 따지기로 유명했다.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이 있는 사람, 좋은 부친을 둔 사람은 공경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귀족자제는 산꼭대기에 자라는 풀과 같고, 평민의 자제는 산자락에 자라는 소나무와 같다. 소나무가 아무리 영양을 섭취해보아야 자신의 높이는 끌어올릴 수 있어도, 해발로 따져서 산꼭대기의 작은 풀에는 절대 미치지 못하게 된다. 전사회는 이런 현상에 불만이 있었다. 이때 무측천이 나서서 말한다. 과거제를 대거 실시하겠다고. 과거제를 가장 중요한 관리선발원칙으로 하겠다고. 사회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민자제도 자신이 두뇌에 의존하고, 조상의 패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승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관리들에게 큰 자극이다. 하나의 긍정적인 자극이다. 이런 자극이 있어서 그녀는 관리들의 옹호를 받게 된다. 두려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서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는 것으로 그녀는 관료들의 마음을 얻는다. 황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가? 황제는 사대부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 관료계층이 안정되면, 황권이 안정된다. 모권으로 자신의 아들을 억누르고, 관리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겁을 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 이렇게 하여 이당을 무주로 바꾸는 기초를 닦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