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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만청삼대군정집단(晩淸三大軍政集團)의 상호관계

by 중은우시 2015. 3. 1.

글: 일명(佚名)

 

소위 "만청삼대군정집단"은 증국번(曾國藩)이 연 상계(湘係) 집단, 이홍장(李鴻章)을 우두머리로 하는 회계(淮係) 집단 및 후기지수인 원세개(袁世凱)의 북양집단(北洋集團).삼자는 당시 조정, 사회및 역시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세력이었고, 그들간에는 상효 교차하고 연결되어 있으며 발전변화하고, 승계교체하였다.

 

삼자의 형성을 보면, "상계", "회계"의 시간은 비교적  가깝다. 원류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밀접하다. 당시 일찌기, "상계", "회계" 고위직(예를 들어, 호림익과 이홍장)의 막료를 지낸 안휘 동성 사람 서종량(徐宗亮)은 그의 <귀려담왕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상, 회는 원래 일가(一家_)였다. 회는 상에서 나온 것이고, 특히 수원목본(水源木本)의 우의가 있다."(나중에 절강 자계사람 시악의 <범천려총록>에서도 이 필기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그들간의 연대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형성시간의 선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보면, 증국번은 함풍3년말부터 단련의 연병을 시작하고, 함풍4년(1854년) 봄에 상군이 정식으로 출전한다. 이는 상계집단의 원형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완비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홍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회계집단은 특정한 상황하에서 비교적 빨리 형성된다. "동원(東援)"의 필요에따라, 원래 증국번의 막료였던 이홍장은 막주의 명을 받아 회군을 결성한다. 동치원년(1862년) 상해로 가고, 그는 금방 봉강대리(강소순무가 됨)가 되어 권한을 쥐게 된다. 이처럼 "군정결합"의 회계집단은 비교적 완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회유상출(淮由湘出, 회군이 상군에서 나오다)"의 파생분화를 완성한다. 상계 회계집단 각자의 초기형성시간으로 보면, 전후로 개략 7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자가 형성된 후 교차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원세개의 북양집단은 탄생이 비교적 늦다. 청일전쟁후 "소참연병"때 처음 맹아를 싹틔후고, 그후에 점차 형태를 완성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개괄적으로 상계,회계의 뒤를 이었다고 하기 보다는, 회계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직접적이다. 원세개의 숙부, 조부 대는 이홍장과 관계가 많다. 원세개 본인이 관직에 나간 초창기는 회계의 요원인 오장경(吳長慶)의 문하에서였다. 그 후에 이홍장의 지지를 받고 추천을 받는다. 북양집단세력의 기반은 회계 인력에 대한 직접적인 초빙,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북양집단세력이 처음 형성될 때, 상계집단은 형태상으로 이미 퇴색되어 있었고, 회계는 '개원'영수인 이홍장이 살아있으므로 실체가 남아 있었다. 원세개집단과는 교차 공존하는 기간이 있었다. 광서27년(1901년) 이홍장이 사망하면서, 직에총독 겸 북양대신의 요칙은 원세계가 이어받는다. 이는 집단적 교체를 완성한 표지라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연원으로 볼 때, 원세개집단은 "상", "회"와 상대적으로 원근, 소친(疎親)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대군정집단은 이렇게 차례로 형성되었고, 교차연결되어 있고, 서로 승계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관계'의 한 측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더욱 내재적으로는 동일한 부분과 상이한 부분이 있고, 형태가 변화발전하는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공통된 기초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보면, 첫째, 형성의 배경적 계기에 있어서 모두 특정한 조건하에서 청왕조의 군사적 필요에 의하여 탄생하고, 발전했다. "상계" "회계"의 형성은 비록 일정한 시간차이가 있지만, 확실히 청나라조정이 태평천국을 진압할 필요에서 나타났다. 원세개의 "소참연병"은 청일전쟁의 배경하에서, 청왕조가 "변통군제(變通軍制)"를 통하여 "강구자강(講求自强)"하려는 필요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각자 당시의 특정한 배경조건이 없었더라면, 군정집단형성의 객관적인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더욱 중요한 원인을 보면, 바로 그들은 "사유성"이 강한 군대를 지주로 하여, 나아가 밀접한 '군정결합'('사유성'이 있는 군대도 보유하고, 총독,순무등 권력도 쥐고 있다. 이런 인물은 실력에서 다른 일반적인 총독 순무와는 비교할 수 없다)을 실현하고, 마침내 완비한 형태의 집단적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소위 그 군대의 '사유성'은 당연히 특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주로 그 군대내부에 상당한 정도의 사적예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명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듣고,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상군, 회군의 "용영(勇營)"은 국가의 통제를 받는 정규군에 속하지 않는다. 원세개의 북양신군은 형식적으로 보면 '국가규범'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사적통제가 더욱 강화되어 있어싿. 이것이 바로 원세개가 파직되어 고향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도 암중으로 그 군대를 통제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군대의 '사유성'의 요소는 '상군''회군''북양' 3대집단에 있어서 공통적인 기본이라 할 수 있고, 집단세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것이다.

 

삼대군정집단의 상대적인 특이성은 주로 3가지이다:

 

첫째, 군대의 신구차이. 비교하자면 상군은 가장 전통적인 구식이고, 회군은 약간 진보했다. 주로 무기장비에서 '서양화'된다. 그리고 원세개의 북양신군에 이르면, '군제'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서양식'을 본받고 따른다(이는 원세개의 소위 <신건육군병략녹존>의 관련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기술측면에서 '현대화'색체가 비교적 선명하여 회군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이고, 상군과는 차이가 더욱 크다.

 

둘째, 집단구조상황. 상군은 "선사인영산농(選士人領山農)(왕정안 <상군기>에 나오는 말)"를 조직핵심으로 했다. 회군장수는 '사인'출신이 훨씬 적다. 병력의 성분이 확실히 복잡해진다. '전투력'을 기준으로 하여 공리성이 강했다. 원세개의 북양신군의 구성원은 명백히 '서양의 법'을 본받았다. 관병의 소질과 조건에서 갈수록 '새로운' 기상이 드러난다. 다시 핵심인원방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상계는 "다두병립(多頭幷立)"이다. 군대의 갈래가 많을 뿐아니라, 핵심인원중에서 총독,순무를 맡아 한 지방을 다스리는 자가 많았다. '분수'식의 단계이다. 그러나, 회계는 군대를 이홍장이 통솔하는 상황이 비교적 명백하고, 또한 핵심인원들중 총독,순무를 맡는 사람이 훨씬 적었다.(이 점은 그들이 선기를 잡지 못했다는 점과 출신성분에서의 문제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력과 지위에서 이홍장과 비견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집단의 관계는 "중성공월(衆星拱月)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원세개에 이르러서는 집단내부의 통제가 갈수록 엄밀해진다. 그는 '병위장유(兵爲將有)"를 실행하고, 스스로를 '본군지군(本軍之君)'으로 자리매김했다. (선배학자 이신의 말). '과두'색체가 더욱 짙어졌다.

 

셋째, 우두머리의 풍모특징. 삼대집단 각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증국번, 이홍장, 원세개를 예로 들어 보면, 증국번은 가장 전통적이고, 유가의 풍모를 지니고, 성도(聖道)를 추구했다. 군대를 이끌고 정무를 볼 때도 학문을 버리지 않았다. 이홍장은 비록 진사이고, 한림출신이기는 하지만, 병력을 지휘하고 정무를 보는데 전념을 기울였다. 도학적인 속박은 거의 받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은 '깡패'기질도 꺼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깡패같은 행동" "깡패같은 수단"으로 서양인들을 대했다. (이 점에서 증국번은 '착실하고 성의있게 대한다' '말에 충신(忠信)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과 차이가 있다) 설사 일상적인 행태나 방식에서도 증국번과 이홍장은 크게 달랐다. 원세개에 이르러서는 더욱 달라졌다. 그는 과거출신이 아니다. 증국번, 이홍장과 비교하여서도 더욱 '거친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군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는 뛰어난 심계, 권모술수,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술한 동일성과 상이성은 객관적인 시세조건에서 나왔고, 또한 주관적인 인적요소도 있다. 그러나 동일성과 상이성은 절대적이고, 칼로 자르듯이 나눌 수있는 것이 아니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면, 전체적으로 역사적인 효과를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먼저 만청군제개혁의 전환점과 궤적을 보면, 상군, 회군(소위 '용영')이 굴기하게 된 것은 청왕조의 정규군인 팔기군, 녹영의 부패와 분리하여 살펴볼 수가 없다. 그후 '연군(練軍)'의 출현(상계의 요원인 유장우가 직예에서 창시함)가 보급은 '용영'으로 녹영을 개조하면서부터 상군, 회군의 '용영'은 '방군(防軍)'의 존속이다. 나아가 실제적으로 '정규군'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은 아직도 '구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원세개의 '신군'은 일종의 '전환'의 발인이다. 이는 자연히 완전히 맨땅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군, 회군(특히 회군)의 유형무형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일맥상승의 의미가 있다.

 

다시 근대군벌의 잉태과정을 보자. 근대군벌의 획정 및 그들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하여 학게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민국이 들어서고 청왕조가 망한 이후의 춴세개집단에서 정식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세개는 청왕조말기에 신군을 훈련시키고 발전시킨다. 이것은 '북양군벌의 잉태단계'이다라고 보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전후연결로 보면, 전체 '잉태'과정에서 상군이 초기기반을 닦고, 회군은 한단계 더 나아가고, 원세개에 이르러 완성된다. 이는 '서방화'의 추세와 들어맞는다.

 

당연히 조정권력국면의 변화방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상군의 굴기로 형성된 '독무전정(督撫專政)', "내경외중(內輕外重)"의 국면이라고 보는 것이 선배학자들의 유래깊은 견해이다. 비록 최근 들어서 혹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다른 의견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절대화를 시키지 않고 상대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제도적인 표면적인 것으로 가 아니라 실질을 보아야 하고, 개별적인 '반탄'현상으로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추세를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경외중'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가면갈수록 강해진다. 원세개가 최종적으로 청나라조정을 좌우할 수 있고, 청왕조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내놓게 하는 것을 보면 투기적으로 혁명형세를 이용한 것이다. 다만 동시에 '내경외중'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이 발전과정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계', '회계'의 기반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단서를 보면, 모두 삼대군정집단이 계속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연관효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