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마오쩌둥은 왜 장손자 마오신위(毛新宇)를 6년간 만나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16. 2. 6. 23:25

글: 주해빈(周海濱)





1970년 1월 17일, 77세의 마오쩌둥은 말년에 손자를 얻는다. 마오쩌둥은 기쁜 나머지 이름을 "신위(新宇)"라고 짓는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6년간 이 조손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사진 하나 같이 찍지 못한다.


이치대로라면, 할아버지가 된 마오쩌둥은 당연히 손자와 천륜의 즐거움을 누려야 했고, 식사후에는 조손간에 웃는 소리가 나고, 하루에 세끼를 같이 하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어야 한다. 왜 마오쩌둥 조손은 서로 만나지도 못했을까?


"그(할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국가와 인민에게 바쳤습니다. 시간을 낼 수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주 기뻐하면서 저에게 "신위"라는 이 시의(詩意)와 기대를 가진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마오신위의 설명이다.


마오신위의 모친인 샤오화(邵華)는 감히 아들을 중남해로 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강청(江靑)은 샤오화에 대하여 이전에 인정머리없게 공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트리어는 <강청전전>에서 이렇게 공개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진정한 며느리가 아니다!" 주위의 나무도 모두 놀라서 흔들렸다. 그녀가 이 대학교에 온것은 바로 마오쩌둥의 둘째며느리,  마오안칭(毛岸靑)의 처인 샤오화와 변론하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계속 강청이 집안내에서 가장 미워한 인물이다. "그년은 정치사기꾼이다." 강청은 가장 냉혹한 말로 샤오화를 얘기했다. 그녀는 샤오화와 자본주의의 문예흑선과 세계의 반중국세력을 연계시켰다. 그녀는 다시한번 소리친다: "나는 한번도 그녀가 마오쩌둥의 며느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마오주석본인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서 샤오화를 공격한 것은 샤오화가 일찌기 베이징대학 중문과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강청은 마치 아직 얘기를 다 끝내지 않은 것같았다.......진백달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고, 강청은 그녀의 저주의 말을 잠시 멈추었다. 앞의 사람들은 진소성(陳小聲)이 낮은 목소리로 강청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제 생각에는 끝내야 합니다." 강청은 흉악한 눈으로 진백달을 노려보았다. 1만여명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바늘이 딸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베이징시제1서기를 맡고 있던 리쉐펑(李雪峰)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1966년 6월 25일, 강청은 베이징대학에서 샤오화를 욕했고, 샤오화는 바로 그 대의 아래에 있었다. 샤오화와 마오안칭은 1960년 이미 결혼했다. 강청은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청의 말은 바로 '중앙수장의 말씀"으로 전단에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샤오화와 장원츄(張文秋)는 밤을 새워 거처를 옮겨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강청일파의 추격을 피했다.


이를 보면,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정치적 원인으로 손자 마오신위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린뱌오의 비행기추락사건이후 마오쩌둥은 강청을 만나는 것도 거부한다. 하루는 마오쩌둥이 왕동흥에게 묻는다. 누가 강청을 막을 수 있는가? 그녀를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왕동흥이 대답한다: "당신이 명령만 내리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강청의 운전기사 리쯔위안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강청이 마오쩌둥의 거처인 중남해의 수영장으로 갔는데, 경위가 막아섰다. 강청이 말한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네가 어찌 막는 거냐?" 경위를 계속 막았고, 강청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귀가'길을 취소해야 했다.


류쓰치(劉思齊)는 마오안잉(毛岸英)의 처이다. 마오쩌둥의 큰며느리이이다. 그녀는 중남해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아니라, 1971년 10월에는 두 눈을 가리고, 상해에서 감옥에 갇힌다. 이를 보면 상상할 수 있다. 마오안칭 부부는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사는 것을 선택했다. 중남해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오쩌둥과 마오신위가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이유는 사진찍을 생각을 못해서가 아니다. 이런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샤오화는 사진찍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일찌기 중국여촬영가협회 주석을 맡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