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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헤어스타일은 누가 만들었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22.

글: 집야(集也)

 

모주석의 표준상은 아마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독특한 "대배두(大背頭)" 헤어스타일은 전수도(錢水桃)가 설계한 것이다. 전수도는 항주호텔의 유명한 이발사였다. 1958년 10월, 간부가 그를 찾아와서 말한다: "너는 성의 간부와 함께 출장을 가야 겠다. 짐을 싸라." 다음 날 기차를 탄다. 그제서야 전수도는 무한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무한에 도착하여, 그는 홍산호텔 이발실로 안내된다. 그리고 그에게 단독의 작은 이발방을 준다. 전수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작은 이발방에는 이런 횡폭이 걸려 있었다: 절강에서 온 이발사.

 

모주석의 이발을 하게 되자 전수도는 마음이 긴장되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가위와 칼의 힘을 잘 알았다. 모주석은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같았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는 긴장된 마음이 누그러지게 된다. 전수도는 모주석의 헤어스타일을 자세히 연구한다. 모주석의 당시 두발은 비교적 길었고, 양쪽 귓쪽의 머리카락은 두 귀를 덮고 있었다. 사람들이 영화, 드라마에서 보는 초기 모택동의 그 헤어스타일이다. 그는 주석의 이미지, 지위와 명망을 생각하여, 장중하며, 독특하고, 위인의 정신기질을 나타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을 창조해낸다.

 

1959년 9월 30일 저녁, 전수조는 다시 모주석의 이발을 한다. 당시 그는 생각했다. 내일이 10월 1일이고, 국경10주년기념일이다. 모주석, 유소기 주석의 대형사진이 <인민일보>에 발표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담하게 모주석에게 건의한다: "주석, 내 생각에 당신의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모주석에게는 습관이 있는데, 이발때 책이나 신문을 보는 것이었다. 모주석은 전수도의 말을 듣고는 책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편하게 말한다: "좋다. 알아서 해봐라." 말을 마치고 다시 책을 든다. 전수도는 자신의 머리 속으로 미리 생삭한 방안대로, 자신의 재주를 살려서 모주석의 이발을 한다. 모주석의 귀밑머리를 짧게 잘라버린 것이다.

 

얼마후 전수도는 주석에게 말한다: "주석, 다 되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모주석은 손에 든 책을 놓고, 머리를 들어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한다: "아, 최소 10년은 젊어보인다. 아주 좋다. 아주 좋아." 이어서 모주석은 기쁘게 사진을 찍는다. 그 때이후, 모주석은 이 헤어스타일을 유지한다. 이 헤어스타일은 금방 전국인민, 전세계인민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익숙해지게 된다. 이는 천안문 성루에 걸린 모주석의 대형화상의 헤어스타일이기도 하다.

 

전수도는 나중에 말한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기쁘고, 가장 의미있고, 가장 성취감이 있는 일이었다고.

 

모주석의 기요비서 섭자룡(葉子龍)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중남해의 전용이발사중에 왕씨성의 노인이 있었다. 그는 북경성의 유명 이발사였고, 자주 모주석의 이발을 했다. 하루는, 그가 평소하던대로 모주석의 이발을 했다. 왕사부는 나이가 많아서, 눈이 좋지 않았고, 동작도 느렸다. 깍기 시작하면 2미터 바깥에서 자세히 이리저리 살펴보고나서, 그후에 천천히 한번 자른다. 그리고 중간에 모주석과 한담을 나눈다. 이날, 모주석은 출석해야할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재촉했다: "왕사부, 시간을 좀 줄여서 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왕사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원래하던대로 이발을 하면서 중얼중얼거렸다. 모주석은 참지를 못하고 다시 왕사부를 재촉한다: "도대체 좀 더 빨리 할 수 없는가? 나는 회의에 출석해야 한다고." 왕사부는 주석이든 아니든 신경쓰지 않고, 한 손으로 모주석의 머리를 누르면서, 한 손으로 가볍게 때리면서 어린아이를 얼르듯이 말한다: "주석, 말을 들으세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당신의 헤어스타일은 전국 전세계의 인민이 보지 않습니까. 잘못 자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 않겠습니까." 모주석은 그를 한번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주석의 전용이발사중에 주복명(周福明)이 있다. 강소사람이고 1935년생이다. 1953년에서 1959년까지 항주 시미이발실(時美理髮室)에서 일한다. 1959년 12월, 모주석이 항주에서 생일을 보낼 때, 그는 모주석의 이발을 하러 가게 된다. 그후에는 모주석의 곁에서 계속 일을 했다. 모주석이 죽을 때까지. 주복명은 모주석의 곁에서 17년간 일을 한다. 그의 일생에서 잊지 못할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모주석에게 처음으로 이발을 해준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모주석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이발을 해준 일이다.

 

사실상 모주석의 이발은 하기 쉬운 점도 있고, 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모주석의 이미지는 이미 사람들에게 깊이 박혀 있었다. 주복명이 모주석의 이발업무를 넘겨받았을 때, 기본적인 헤어스타일은 이미 바꿀 수가 없었다. 모주석의 두발에는 특징이 있다. 오른쪽이 많고 왼쪽이 적다. 이발을 할 때는 좌우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뜨거운 수건으로 누른다. 이발때 주석에게 머리를 돌리거나 머리를 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주석의 이발을 할 때는 모주석은 움직이지 않고, 이발사가 움직여야 한다. 모주석은 수염이 많았다. 특히 점 위의 수염은 깍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수염을 깍을 때는 팔을 들고 깍아야 했다. 모주석에게 누우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

 

1976년 9월 9일, 모주석이 사망한다. 마지막으로 주석의 이발을 하는 업무도 주복명에게 아주 어렵고, 가슴아픈 일이었다. 주석의 병이 위중할 때, 이미 3개월여간 이발을 하지 않았다. 귀 주위의 머리카락은 간호사들이 가위로 잘라주었다. 주복명은 재삼 간청한다. 자신이 주석의 마지막 이발을 하게 해달라고.  새벽3시경, 즉 주석이 사망한 후 3시간만에 주복명의 간청은 받아들여진다.

 

이발도구상자를 들고 모주석의 침대곁으로 간다. 주복명은 허리를 숙이고, 손에 든 바리깡을 주석의 머리에서 가볍고 천천히 이동했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이발이다. 이때의 주석의 신체는 이미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귀밑머리와 두 귀의 뒤에 있는 머리카락은 허리를 숙여도 깍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귀밑머리를 자를 때 그는 아예 땅 위에 앞드려서 주석의 머리를 깍는다. 두 귀의 뒷족과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깍을 때는 아예 주석이 누워 있는 침대의 양쪽에 올라가서, 주석이 누워있는 자세를 따라 이쪽에 엎드리고, 저쪽에 누워서 약간씩 주석의 머리를 움직이며 깍았다.

 

이번에 모주석의 이발을 한 것은 난이도가 컸지만, 그는 아주 진지하게 하였다. 이는 마지막이므로 주석이 만족하게 해야 했다. 주복명의 귀에는 마치 주석이 평소에 이발할 때 자주 하던 말이 들리는 것같았다. "너는 네 할 일을 해라,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책이나 문서를 보겠다는 뜻임)"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을 가져와서 뜨거운 수건을 주석의 머리 위에 붙였다. 하얀 머리카락에 물이 스며들자 마치 검게 변하는 것같았다. 다시 빗으로 계속 빗겼다. 그러자 즉시 머리카락에 검게 빛났다. 그는 주석을 위하여 정성껏 수염을 깍고, 얼굴을 닦았다. 이때, 주석의 얼굴은 마치 다시 생생해지는 것같았다.

 

모주석이 서거한 후, 주복명은 중앙판공청 경위국으로 배치되고, 이후 모주석고거의 관리업무를 맡는다. 그는 계속 자신에게 말했다. 모주석을 위한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은퇴할 때까지, 그는 모주석이 생활한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성껏 모주석의 고거를 보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