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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왕양명: 용장오도(龍場悟道)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두문자(杜文子)

 

 

 

 

왕양명은 명나라의 저명한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그는 심학(心學)의 집대성자이다. 그의 위대한 학설로 그는 공자, 맹자, 주희와 나란히 '공맹주왕(孔孟朱王)'이라 불린다. 왕양명 학설의 핵심은 3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심즉리(心卽理)". 그 뜻은 천하만물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한때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제자가 천하에 가득했다(弟子盈天下)". 그의 사후에는 더더욱 "군민이 모두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 왕양명이 일대성현이 된 핵심적인 사건은 "용장오도"이다.

 

주후조(朱厚照)가 등극하여 정덕제(正德帝)가 된 후, 환관 유근(劉瑾)의 권력은 조야를 뒤흔든다. 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이러저리 생각을 해본 후 왕양명은 주후조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상소문에서 왕양명은 유근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으면서 완곡하게 '군인즉신직(君仁則臣直)'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하여 언관들이 유근에게 보복당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육부,구경이 모두 속속 유근의 죄상을 탄핵할 때 이 상소문은 가장 격렬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왕양명이 이 글은 너무나 잘 썼고, 금방 유근의 관심을 끈다. 왕양명은 유근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다.

 

감옥이라는 협소하고 조용한 공간은 왕양명에게 조용히 생각할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매일 철창으로 비쳐드는 약간의 햇볕을 보면서 주희(朱熹)가 했던 말의 한마디 한마디를 반복해서 생각해보았다.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慾)"은 주희이론의 핵심이다. 개괄해서 말하자면, 자연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사람이 가진 욕망을 제거하여 초범탈속(超凡脫俗)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욕망이 정말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까? 왕양명은 한 가지 지난 일을 떠올린다: 한 작은 냇가에서 그는 이미 정좌수행한지 여러 해가 된 고승을 만난다. 집안의 노모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왕양명과 몇 마디를 나눈 후 상심해서 그날 밤에 바로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만난다.

 

부모자녀간의 친정을 어찌 끊는다고 바로 끊어질 것인가. 득도한 고승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람의 천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왕양명은 섬광처럼 생각이 떠오른다: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은 절대로 나뉘어질 수가 없다. 사람의 욕망은 없앨 수 없다. 만일 일부러 업애려고 하면 반드시 물극필반(物極必反)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론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 때의 왕양명은 아마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의 이렇게 떠올린 생각이, 이미 부지불식간에 수백년동안 깨트리지 못한 전통적인 사고를 돌파하여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접어들였다는 것을. 그러나, 파(破)가 있으면 입(立)이 있다. 세계의 본질이 천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감스러운 일은 유근은 왕양명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왕양명은 금방 귀주(貴州) 용장역(龍場驛)에 역승(驛丞)으로 귀양가야 했다. 그곳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불모지이다.

 

왕양명은 경항대운하를 따라 용장역으로 취임하러 떠난다. 경성의 대문을 떠나자마자, 유근의 수하들이 그를 쫓는다. 그들은 기회를 잡아 왕양명을 죽일 생각이었다. 항주까지 따라갔지만, 두 명이 수하는 죽일 기회를 잡지 못한다. 왕양명은 생각한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길을 황량하고, 자신이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그는 결정한다. 만천과해(瞞天過海)의 수법으로 이 두명의 특무의 눈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루는 깊은 밤에, 왕양명이 장탄식을 하고, 거주하던 방의 벽에 시를 하나 쓴다. 제목은 <절명시(絶命詩)>이다. 그 후에, 몸을 돌려 전당강으로 가서 모자와 신발을 벗고 강으로 뛰어든다.

 

날이 밝은 후, 뒤를 쫓던 특무들은 왕양명의 시와 강가에 놓여진 모자와 신발을 본다. 그리고 더 많이 생각지 않고, 왕양명이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고 여기고, 급히 돌아가 보고한다.

 

왕양명은 일찌감치 강 건너편으로 가서 계속 달려 복건으로 도망친다. 귀주로 가서 부임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다시 고향인 남경으로 돌아온다. 대명왕조에 충성스러웠던 부친 왕화(王華)는 극력 왕양명에게 왕명에 따라 귀주로 부임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여 왕양명은 마침내 용장으로 가게 된다.

 

형극밀포(荊棘密布), 잡초인생(雜草人生). 역참 안에 있는 20여마리의 말과 몇몇의 늙은 일꾼들을 보면서 왕양명은 할 수 없이 자신이 몸을 움직여 간단한 초가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거주하기 시작한다.

 

왕양명이 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현지인들과 잘 어울렸고, 그가 가르쳐 주는데 따라서 이 오랑캐의 땅에는 문명이 기운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점점, 왕양명은 '용강서원'을 세워서 강의를 시작한다.

 

기적이 마침내 일어난다. 넓다란 산골짜기에서 왕양명의 흥분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즉리". 이 목소리는 왕양명이 진정 성현이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거 여러해동안 힘들게 생각했던 문제에 드디어 답을 찾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용장오도'라는 유명한 고사의 출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