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문자(杜文子)
'탈문지변(奪門之變)'을 일으켜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은 '태상황'에서 다시 '황상'이 되었다. 여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석형이다.
석형은 무장으로 전공이 혁혁했다. 명영종을 옹립하여 복위히킨 후, 자신의 권력과 부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내심의 욕망은 팽창한다. 마치 졸부처럼 마음이 허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황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석형은 황제에게 자신의 조상묘 앞에 비석을 세워달라고 요청한다. 이 비석은 공부에서 제작하고, 한림원에서 비문을 써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기관을 그 개인의 용도로 쓰는 것이다. 황제가 어찌 이런 황당한 일에 동의해 주겠는가.
비석을 세우는 일이 거절되어도, 석형은 전혀 얌전해지지않았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경시하기 시작한다. 조정에 나가는 것도 기분이 좋으면 가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빼먹었다. 어떤 때는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고, 며칠씩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먼 친척을 데리고 황궁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황제가 와도 회피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그만이라고 쳐도 가장 심한 것은 황제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황제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는 조정 안에서의 일이고, 조정 밖에서는 더욱 심했다. 그는 대신을 쫓아내고, 매관매직했으며 자주 양경(남경북경)의 대신을 쫓아내고 빈 자리를 자신의 심복에게 주거나, 혹은 돈을 받고 팔았다. 가격까지 붙여서 팔았는데, 당시 관료사회의 가격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주삼천(朱三千), 용팔백(龍八百)" 주는 바로 주전(朱銓)이고 용은 용문(龍文)을 가리킨다. 삼천과 팔백은 바로 그들 두 사람이 석형에게 관직을 살 때 낸 가격이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석형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
천순2년, 번왕 주첨선(朱瞻墡)이 등장하자 석형은 황제의 신임을 잃는다. 옛날에 석형등이 우겸(于謙)에게 모반의 죄명을 씌울 때 그는 주첨선을 황제로 세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주첨선은 자신의 청백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직접 경성으로 가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사실이 증명했다. 주기진은 마음이 약하다. 그는 바로 자신의 숙부인 주첨선이 한 말을 믿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석형등이 가지고 놀았다고 여긴다. 주기진은 대노하여 석형에게 추궁한다. 석형은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그저 모든 책임을 수보(首輔) 서유정(徐有貞)에게 떠넘긴다. 황제는 그의 말을 듣고, 석형을 한바탕 질책한다.
원래, 황제는 석형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대태감 조길상과 일당이 되고, 조카는 주요병력을 장악하고 변방을 지키는 대장이며, 조정신하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은 황제가 그를 미워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한번은 황제가 이현(李賢)에게 묻는다: "국가의 정무를 보는 대신들이 황제인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고, 모조리 석형에게 가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총명한 이현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체 천하가 모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께서 하시고 싶은대로 하시면 됩니다."
주기진은 즉시 이해했다. 맞다. 전체 천하가 내 것인데, 석형 하나가 뭐가 문제인가. 다만, 자신이 황제위에 다시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공신이므로 아직까지는 죽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봉상루사건(鳳翔樓事件)'이후 명영종은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해 겨울 명영종은 몇몇 문무대신들과 봉상루에 올라가서 놀았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황제는 돌연 호화로운 저택을 하나 발견한다. 그래서 그 쪽을 가리키며 공온후(恭溫侯) 오근(吳瑾)에게 묻는다. 저 곳은 무엇인가? 오근은 당연히 석형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우겸을 동정하고 존경하던 사람으로서, 오근은 석형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자주 정명한 대답을 한다: "저건 분명히 왕부일 것입니다." 황제는 조금 생각하더니 "아니다. 왕부도 저렇게 크게믄 못만든다." 일찌감치 어떻게 대답할지를 준비해두었던 오근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왕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저렇게 법도를 어긴단 말입니다." 이 말을 듣자 주기진의 눈썹에 차가운 기운이 나타난다. 기실 그도 일찌감찌 그곳이 석형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형이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황제가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약간 알아차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권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석형은 자신의 조카 석표(石彪)로 하여금 외지에서 병력을 지휘하게 할 뿐아니라, 자신은 경성의 주둔군을 통솔했다. 그리고 황제의 곁에도 적지 않은 자기 사람을 배치해 두었다. 그외에 그는 금의위 지휘사를 매수하여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해놓았다. 천진한 석형은 자신의 이런 조치만으로 성실한 황제를 상대하는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형세가 바뀌면 자신과 조카가 내외에서 호응하면 유약한 명영종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8년간 연금된 바 있는 황제는 이미 태감 왕진의 말이라면 모두 듣던 그 젊은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진정한 군주로 성장했다. 이들 오합지졸을 제거하는 것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순3년, 석형의 조카는 사사로이 용포를 감춘 것이 발각된다. 이는 구족을 멸할 대죄이다. 황제는 또한 몽골에게 황제에게 보낸 여자를 석표가 차지한 것도 알게 된다. 주기진의 분노는 순식간에 한계점에 이른다. 두 말도 하지 않고 직접 석표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석표가 감옥에 갇히자, 석형의 외부지원세력은 사라진다. 이때 석형은 비로소 발견한다. 무슨 대권장악이고 무슨 내외호응이고 모조리 헛소리라는 것을. 자신의 진실한 지위는 그저 높은 급여를 받는 고용인에 불과하다. 이제 석표가 없으니 경성안의 자기사람만으로는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번 생각을 해보고 석형은 진지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조카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며 울며불며 황제에게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기진은 이렇게 쉽게 그를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석형을 다독인다. 그에게 조카의 일은 너와 관계없다. 너는 계속 대명에 공헌을 하라.
석형은 그 말을 듣자 정말 황제가 그를 내치려 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사직을 여러번 청하는 통상적인 쇼도 하지 않고 여전히 예전과 같이 행동한다. 이때 주기진은 이미 암중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신속히 석형과 관계가 밀접한 자들을 처리하여, 석형을 혈혈단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석형을 제거하려면 단지 눈한번 찡긋하는 정도의 힘이면 된다. 다만 석형의 이전 공로를 생각하고는 그는 다시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이현은 석형을 그렇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우겸이 억울하다고 여기는 여러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날, 주기진은 다시 이현에게 '탈문'의 일을 언급한다. 이현은 알았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탈문'이라는 두 글자는 쓰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하는 원래 황제의 것입니다. '영가(迎駕)'라고 하는 것이 비교적 적합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제서야 크게 깨달았다. 석형과 같은 자들이 '탈문'이라는 용어를 써서 공로를 자랑하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황제위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를 생각하자 주기진은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주기진은 즉시 조서를 내린다. 이후 '탈문'이라는 두 글자는 쓰지 말라. 이 조치로 석형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카드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얼마후 석형은 모반죄로 하옥된다. 천순4년 석형은 옥중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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