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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담국경(覃國卿): 중국대룍 최후의 토비(土匪)

by 중은우시 2013. 12. 28.

작자: 일명(佚名)

 

1965년 3월 24일, 중앙군사위는 선포한다: 중국대륙 최후의 토비 담국경이 섬멸되었다고. 담국경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일개 토비를 토벌한 것이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 일이 되었을까? 그는 어떻게 여러번에 걸친 군사포위작전에도 15년간이나 생존할 수 있었을까?

 

"한비(悍匪)"낙초(落草)

 

1919년, 담국경은 상서(湘西. 호남서부) 장가계(張家界)의 서북부에 있는 청안평(靑安坪)이라는 작은 산촌에서 태어난다. 이곳은 사방이 모두 고산준령이고, 민풍이 표한(彪悍)하다. 원, 명, 청의 몇 왕조이래, 조정은 계속 통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서지방은 일찌기 '중국의 맹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역대이래로 토비의 천국이었다.

 

담국경의 집안은 잘 살았다. 그의 부친인 담신재(覃新齋)는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하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담국경은 담신재의 여섯째 자식이다. 이전의 두 아들은 모두 장애인이었고, 그 뒤로는 딸 셋이다. 그러므로, 담국경의 출생은 담씨잡안에서 대를 이을 희망이 된다. 담국경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총애를 받아왔다. 부친이 연관(煙館, 아편피우는 곳)에 들어갈 때나, 도박장에 들어갈 때 모두 그를 데리고 갔다. 보고 듣다보니 담국경도 어려서부터 못하는 것이 없었다.

 

1934년 11월, 하룡(賀龍)은 홍군을 이끌고 대용(大庸, 지금의 장가계)를 점령한다. 그리고 상악천검(湘鄂川黔, 호남, 호북, 사천, 귀주)혁명근거지를 건립한다. 담신재는 평소에 온갖 나쁜 짓을 다해서, 홍군에 즉결처형을 당한다. 가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고, 담국경의 모친은 이후 개가한다. 담국경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로 전락한다.

 

1935년 가을, 홍군은 이곳에서 철수한다. 각지에서는 속속 민단(民團)을 만든다. 담국경은 부근의 의안향(義安鄕)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민단 소병이 된다. 이곳에서 담국경은 일신에 좋은 기술을 익힌다. 민단에서는 그를 신창수(神槍手), 비모퇴(飛毛腿)로 공인된다.

 

담국경은 이로 인하여 상사의 인정을 받고, 민단의 반장(班長)이 된다.나중에 민단은 해산되고, 담국경은 총을 들고 청안평으로 돌아온다. 당시, 담국경의 당숙(堂叔)은 청안평의 연보주임(聯保主任)이었가. 그는 당숙에게 의탁한다.

 

담국경의 당숙은 첫번째 희생자가 된다. 담국경은 자신의 당숙모와 간통을 저지르고, 당숙에게 들킨다. 담국경은 총으로 당숙,당숙모를 쏘아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부근의 산으로 도망친다. 비적두목 담천보(覃天寶)에게 의탁하여, 산적이 된다.

 

이 해는 1937년이고, 담국경의 나이 19살 때였다.

 

비적이 된 담국경은 물만난 고기와 같았다. 그는 이틀동안 3무리의 객상을 털기도 했다. 그리하여 금방 중대장으로 승진한다.

 

한번은 담천보는 담국경에게 농담을 하였는데, 그는 감히 사람의 심장으로 술은 마시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당국경은 그 자리에서 한 청년농민을 나무에 묶고는 가슴을 갈라서 심장을 끄집어내고 부하에게 익혀서 올리라고 하고는 담천보와 같이 마주앉아서 먹는다; 한번은 강도행각때, 한 산채에서 총을 쏘며 저항했고, 비적 1명을 부상입힌다. 담국경은 산채를 피로 씻고,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담국경의 잔혹함은 담천보까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중에 '꼬리가 길어지면 자르기 힘들 것"리가고 생각하여, 그에게 10개의 총을 주고, 독립하여 별도의 산채를 차리도록 해준다. 담국경은 청안평으로 되돌아와서, 스스로 대장이 된다.

 

10년동안 담국경은 토비 무리를 하나 길러낸다. 인원수는 백명이 넘었고, 살인방화 안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1948년 3월, 담국경은 상식현(桑植縣)에서 길가다가 한 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신부와 가마를 빼앗아 온다. 청안평에 돌아온 그날 밤, 담국경은 그녀와 혼인식을 거행하고 부부가 된다. 그녀의 이름은 전옥련(田玉蓮)이고 당시 나이가 막 18살이었다.

 

현지인들이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전옥련이 선량한 농가출신의 여자에서 호가호위하는 토비파(土匪婆)로 변신한 것이고, 그녀는 죽어라 담국경을 따라다녔다.

 

1949년 10월, 국민당의 패잔병이 청안평을 지나게 된다. 담국경은 여러 비적을 이끌고 무기와 탄약을 배앗는다. 한 청년장교가 총을 내놓지 않으려 하자, 전옥련은 손을 들어 바로 그에게 총을 쏘아 죽여버린다. 이것은 전옥련의 첫번째 살인이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녀는 총을 쏜 후, 노련한 고수의 솜씨를 배웠는지, 총구의 푸른 연기를 입으로 불었다.

 

담국경은 빼앗아온 총과 탄약을 가지고 대거 부하를 모집한다. 그리하여 신속히 300여명으로 늘어난다. 활동범위도 영순(永順), 상식, 자리(慈利) 및 학봉(鶴峰)등의 현에 이른다.

 

당시 국민당정권은 대륙에서 이미 붕괴되었고, 상서의 토비에 대하여도 마구잡이로 직위를 내려,그들이 인민해방군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담국경은 국민당 제5사단으로 잠정 편제되어 제6단이 된다. 담국경은 단장으로 임명되고, 담국경은 스스로 사령관이라 칭하고, 전옥련은 부사령관이 된다.

 

부친이 홍군의 손에 죽었으므로, 담국경은 해방군을 '부친을 죽인 원수'로 본다. 그리고 신생정권에 죽기로 완강하게 저항한다.

 

1949년 9월하순, 해방군 제13병단 47군이 상서로 진군한다. 적지 않은 토비들은 소문을 듣고 총을 내놓고 투항한다. 상서의 토비상황은 약간 개선된다. 얼마후 47군은 명을 받아 사천으로 들어간다. 전체 상서에는 겨우 141사단만 남겨놓았다. 대용지구에는 하나의 배(排, 소대, 중국의 군대는 반 - 배 - 연 - 영 - 단/여 - 사의 등급이다)의 병력만을 남겨놓았다.

 

산 속에 숨어잇던 담국경은 해방군의 병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는 슬슬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1950년 3월, 해방군의 한개 반(분대)의 전사와 몇몇 업무인원이 산으로 들어와서 주둔한다. 담국경은 300여명을 모아서, 전사 12명을 죽이고, 민방 40여칸을 불태운다; 같은 달, 담국경은 해방군전사 12명을 죽이고, 3명을 부상입힌다. 5월 4일, 인민정부는 현지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배 5척에 쌀을 싣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담국경은 200여명의 토비를 매복시켜, 전투하는 와중에 해방군전사 6명이 사망한다; 5월, 담국경은 비적을 이끌고 다시 해방군의 양식운송선을 공격하여, 배를 호위하던 전사 13명, 공작인원 1명, 선원 8명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물자는 모조리 약탈해간다.

 

1951년 2월, 141사단이 조선으로 들어가서, 한국전쟁에 참가한다. 담국경은 더더욱 거리낄 바가 없었다; 2월초, 지방무장전사 1명을 죽이고, 얼마후 다시 농회주석의 처를 죽여버린다.

 

이들 비적의 우환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하여, 현지의 군분구는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이게 된다. 비적소탕부대는 무력소탕과 정치와해를 결합한 방법을 쓴다. 전답을 나누어받고 정권을 건립한 농민은 지방주둔군과 함께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비적을 찾아서 소탕하는데 도와준다. 현에서 향까지, 향에서 촌까지, 도망가있는 비적의 명단이 분명하게 작성된다. 하나하나 조사하고 하나하나 찾아낸다.

 

주위의 토비들은 붙잡힐 사람은 붙잡히고, 자수할 사람은 자수한다. 담국경은 그리하여 전략을 바꾸게 된다. 전옥련을 데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린다.

 

1953년, 담국경, 전옥련 2명의 토비는 다시 그들을 고발한 농민을 보복살해한다. 이어서 멀리 산 속에 숨어버리고, 행방이 묘연해진다.

 

1958년말, 전체 상서에서 명부에 이름이 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는 토비는 오로지 담국경과 그의 부인 전옥련 뿐이었다.

 

담국경, 전옥련 두 명을 붙잡기 위하여, 1958년 12월, 길수군분구와 상서자치주공안국은 청안평에 초비총지휘부(剿匪總指揮部)를 설치하고, 전체 주 10개현의 공안부대를 모으고, 대용, 영순, 상식 3개현변방의 군중을 동원하여, 빗질하듯이 산을 수색 포위했다. 현지에는 민병기동반 22개를 조직하여 합계 237명에 이르렀고, 군중정보소조 159개를 건립한다.

 

다만, 여전히 담국경, 전옥련 2명을 찾아내지 못한다. 현지의 소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미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갔다는 것이다.

 

청안평 초비총지휘부의 분석에 따르면, 담국경, 전옥련 두 명은 아마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느 동굴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아마도 일찌감치 멀리 타향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다. 게다가 3년간의 자연재해로 현지군중은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깊은 산에 숨어 있는 담국경, 전옥련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1961년, 초비인원이 철수하고, 현지의 군중도 점점 담국경이라는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1963년 3월의 어느 하루, 상식현의 한 영업원은 한 고객이 건전지를 사고는 잔돈도 필요없다고 하고는 몸을 돌려 가버린다. 옆모습을 분명하게 보고는 그는 깜짝 놀라서 소리친다: "담국경이다!"

 

담국경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바로 번져간다. 그러나 어떻게 수색해도 이 토비부부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다시 1년여 흐른다.

 

1964년 8월 26일 새벽, 영순현의 두 소년이 족제비를 쫒아서 수립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묶여버린다. 두 소년은 상대방인 일남일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여비적은 반복하여 그들에게 어디 사람인지를 물었고, 부대가 있는지 없는지, 민병이 있는지 없는지, 총은 몇 자루나 있는지등을 물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두 토비는 등에 짐과 총을 지고 떠났다. 굽는 곳까지 걸어갔을 때 마침 내리막길이었다. 두 소년은 내리막길을 굴러서 밭으로 숨어들어간다. 이렇게 기지있게 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소년의 회고에 따르면, 남자는 사십여세이고, 마르고 키가 작았으며, 푸른베로 만든 간편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청색의 바지는 곳곳이 기워져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키가 컸고, 머리에 비녀를 꽂았고, 꽃그림이 있는 상의에 파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남녀모두 짚신을 신고 있었으며, 땅에는 총 두 자루와 총알을 놓아 두었고, 여자의 몸에는 권총 2자루도 있었다고 한다.

 

현공안국의 책임자는 사정의 경과를 듣고는 즉시, 단정한다: 이 두 명이 바로 담국경, 전옥련의 두 토비이다!

 

현지에서는 즉시 민병을 조직하여 산을 수색한다. 한 암조(巖槽)에서 사람들은 담국경,전옥련 두 토비가 만든 붕자(棚子)를 발견한다. 붕안에는 자기항아리, 과일칼, 세숫대야등 용구와 고추, 곡식, 오이등 음식물 및 일부 의복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서 알아보니, 지난해 12월부터 마을 사람들이 쌀, 기름, 소금, 말린고기, 과일야채등을 자주 도둑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담국경, 전옥련 두 사람은 이렇게 촌민들과 근 반년간 이웃으로 살아온 것이다.

 

일시에, 공포의 그림자가 영순, 대용, 상식의 3개현의 백성들에게 드러웠다. 담국경, 전옥련 두 토비는 행동이 빨라서, 사람들이 방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활귀(活鬼)", "활마(活魔)"라고 불렀다.

 

1965년 1월 1일, 호남성군구사령원 유자운(劉子雲)은 담국경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부대, 공안, 민병이 함께 출동하고, 동시에 상서초비지휘부도 회복시켜서 영순, 대용, 상식의 3개현에 분지휘부도 둔다. 상서에는 신중국성립이래 제2차 토비토벌이 클라미막스에 이른다.

 

3월 23일, 몇 번의 가벼운 총소리가 상식현의 이복탑공사(利福塔公社)에서 울린다.

 

이복탑공사는 상식현 서남부에 위치해 있고, 이곳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동굴지형이다. 산마다 동굴이 있고, 동굴 속에 또 동굴이 있다. 구천동, 관음동, 대풍동, 강발동, 하나같이 깊이를 모를 동굴이다.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지하용동이다. 이 날, 3명의 농민이 산골짜기로 가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 구천동 일대의 동굴 앞까지 접근 했을 때, 몇 번의 총성이 들이고, 3명의 농민은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입는다. 부상입은 농민은 즉시 촌으로 도망쳐 왔고, 현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수십리 산길을 달려 초비소분대에 보고한다.

 

그날 저녁, 상식현 당전군부서에서는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토비소탕전투를 배치한다. 심야2시 40분, 명령이 떨어지자, 3개현의 부대, 민병, 군중 7천여명이 겹겹이 포위망을 만들어, 구천동일대의 크고 작은 산을 포위한다.

 

담국경, 전옥련은 깊은 밤을 틈타 3번이나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할 수 없이 동굴 속으로 숨어든다.

 

3월 24일 새벽, 소탕작전이 개시된다. 산을 수색하는 대군은 2미터에 1명씩의 거리를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수색한다. 풀하나 나무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점차 포위망이 좁혀졌다. 결국, 담국경이 숨어있는 곳으로 점점 조여든다. 9시경, 총소리가 울리고, 한 민병배장이 총에 맞아 땅에 쓰러진다. 곁에 있던 공안간부가 급히 다가가서 응급조치를 했지만, 가슴에 연속 2발을 맞아 장열하게 희생한다.

 

지휘부는 명령을 내린다. 모든 민병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공안부대와 기동부대가 앞으로 나선다. 마지막 초비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8번에 걸쳐 투항하라고 권유했지만 말을 듣지 않자, 포위대군은 강공을 결정한다. 먼저 기관총으로 맹렬히 사격하여, 담국경, 전옥련 두 토비를 바위틈 속에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 후, 무수한 포탄과 수류탄을 동굴 속으로 던져 넣는다. 큰 소리가 난 후,전사들이 동굴 속으로 돌진한다. 담국경, 전옥련은 모두 총을 맞고 죽어 있었다. 담국경은 배가 터져서 창자가 나와 있었다.

 

담국경이 죽으면서, 중국상서의 수백년에 걸친 토비는 철저히 끝이 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