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순(拓跋恂, 元恂)은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元宏)의 장남으로 태화17년(493년) 황태자에 오르나 나중에 폐위되고 그의 동생 탁발각(拓跋恪, 元恪)이 황태자에 올라 선무제(宣武帝)가 된다. 둘은 모두 태화7년(483년) 윤사월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북위는 장남을 태자로 세우는 관례가 있다. 장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중시되나, 차남이하는 황위를 승계하지 못하게 되므로 중시되지 않아서, 생년월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탁발각이 태자에 오르기 전까지의 기간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탁발순은 태화7년(483년) 윤사월 계축(癸丑)일에 태어났고,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생모는 황후 임씨(林氏)이다. 483년의 윤사월 계축일은 윤사월 이십구일이다. 탁발각에 대하여는 생모가 고부인(高夫人)이고, 483년의 윤사월에 태어났다고만 기록되어있고, 어느 날 태어났는지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남인 탁발순이 윤사월 이십구일생이면, 차남인 탁발각은 그저 윤사월 이십구일생이거나 윤사월 삼십일생일 수 밖없다. 탁발각은 탁발순과 같은 날 태어나거나, 하루 늦게 태어난 것이다.
북위의 초기 수도는 평성(平城, 현재의 산서성 대동)인데, 평성은 탁발부족의 초원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과도기를 상징한다. 이 도성은 중원문화의 특질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초원문화의 색채를 많이 담고 있다. 그러므로, 효문제가 처음부터 천도를 고집한 것은 아니고, 평성을 개조하여, 중원문화분위기를 지닌 도성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태화12년(488년)부터 낙양천도하기 1년전까지, 효문제는 평성에서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예의, 제사와 관련된 일련의 토론과 결정을 내린다. 마치 그는 유형적인 건축공사를 통하여 무형적인 사고의 변화를 끌어내려 한 것같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평성을 중원문화를 지닌 도성으로 변신시키는데 주력했지, 남쪽으로 천도할 생각까지 가지지는 않았다. 나중에 낙양으로 천도하려 하게 된데는, 북방보수세력이 그의 개혁에 대하여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압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탁발굉은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의 장남으로 북위의 제6대황제이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나이 겨우 3살인 황흥3년(467년) 유월에 황태자에 오른다. 북위의 관례에 따라 그의 생모인 이부인(李夫人)은 사사되고,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손에 자란다. 그의 부친인 탁발홍은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르는데, 처음에는 권신 을혼(乙渾)이 실질적인 조정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그 후에는 을혼을 제거한 풍태후가 조정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다. 풍태후는 18개월간 임조칭제한 후에 법도에 따라 탁발홍이 친정을 하도록 권력을 내놓는다. 탁발홍은 친정을 시작한 후 풍태후의 남총등을 제거하다가 결국 풍태후에 강압에 밀려 황위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탁발홍은 황흥5년(471년) 팔월 숙부인 탁발자추(拓跋子推)에게 황위를 양도하고자 하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닥치자, 5살된 아들 탁발굉에게 황위를 선양하고 태상황이 된다. 탁발굉의 나이가 아직 어려 조모인 풍태후가 수렴청정한다. 태상황(太上皇)으로 있던 부친은 조모인 풍태후에게 독살당해 죽는다(일설에는 자살이라고 함). 그 후인 태화14년(490년) 풍태후가 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한다. 그는 조모 풍태후가 추진한 한화개혁(漢化改革) 영향으로 친정후에 한화개혁을 계속 추진한다. 풍태후와 효문제는 태화10년(486년) 낙후적인 “종주독호(宗主督護)”를 “삼장법(三長法)”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녹봉제, 균전제등 한족정권에서 실행하던 각종 제도를 채택한다.
그리고 태화17년(493년) 그는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대신들이 천도에 반대할 것을 우려하여 먼저 병력을 대규모로 준비하여 남제(南齊)를 공격하겠다는 의견을 조회때 피력한다. 그러자, 대신들이 속속 반대하고, 그중 가장 격렬한 사람이 바로 효문제의 당숙으로 한화개혁에 찬동하는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이었다. 효문제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짐의 국가인데, 그대가 어찌 내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막는 것인가.” 그러자 척발징은 이렇게 반박한다: “국가는 폐하의 것이지만, 저는 국가의 대신이니다. 병력을 동원하는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효문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퇴조를 선언하고, 궁을 돌아온 다음 다시 단독으로 척발징을 불러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하겠다. 금방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낸 것은 대신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다. 나의 진정한 뜻은 평성이 개혁정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어서, 나는 풍속을 바꾸려고 하고 그러려면 천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에 남제를 치겠다고 한 것은 실제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문무관리를 이끌고 중원으로 천도하기 위함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자 척발징도 즉시 그의 본뜻을 깨닫고 바로 효문제의 주장에 동의한다.
효문제는 친히 보병,기병 30여만을 이끌고 남하한다. 평성에서 출발하여 낙양에 도착했는데, 가을비가 1달이나 계속 내려서 길이 진흙탕이 되어 행군하는데 곤란했다. 그래도 효문제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앞장서서 말을 타고 낙양성을 나서며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한다. 대신들은 원래 남제를 치는데 반대하는 입장이고, 장마까지 계쏙되자 다시 나서서 출정을 말린다. 그러자 효문제는 엄숙하게 말한다: “이번에 우리가 대거 병력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중도에 그만두게 되면, 그것은 후세에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남진할 수 없다면, 도성을 이곳으로 옮기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냐?”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효문제가 다시 말한다: “망설일 것없다. 천도에 동의하면 왼쪽에 서고, 동의하지 않으면 오른쪽에 서라.” 그러자, 귀족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폐하께서 남제를 토벌하는 것을 그만두신다면 낙양천도에 우리는 동의하겠습니다.” 많은 문무관리들은 천도에 찬성하지 않지만, 남제를 토벌하는 것을 멈추겠다고 하니 할 수 없이 천도에 동의하게 된다. 효문제는 낙양에 자리를 잡은 후, 임성왕 척발징을 평성에 보내어, 평성에 남아있는 귀족들에게 천도의 당위성과 장점을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효문제가 직접 평성으로 가서 귀족을 설득한다. 귀족들이 내놓은 천도반대이유를 하나하나 반박한다. 마지막에 평성의 귀족은 이렇게 말한다: “천도는 큰 일이니, 길할지 흉할지를 점을 쳐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효문제는 이렇게 반박한다: “점은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 보는 것이다. 천도는 이미 의문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점친단 말인가. 천하를 다스리려면 당연히 사해를 집으로 여겨야 한다. 오늘은 남으로 가고, 내일을 북으로 달려가야 한다. 고정불변의 이치라는 건 없다. 우리의 윗대에서도 여러 번 도성을 옮기지 않았느냐. 나는 왜 도성을 옮길 수 없단 말인가?” 귀족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고, 천도는 이렇게 확정된다.
이처럼 선비족 각부족의 우두머리들이나 구신(舊臣)들의 불만과 반대를 무릅쓰고 효문제는 태화19년(495년) 낙양으로 정식 천도한다. 그리고 낙양으로 옮겨온 귀족들이 사망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묻지 말고 낙양의 북망산(北邙山)에 묻도록 조령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점차 낙양토착민으로 바뀌어 간다.
여기에 그는 자유통혼을 장려하고, 한족사대부를 가까이 하고 중용한다. 그리고 선비족 탁발(拓跋), 발발(拔拔), 을전(乙旃), 구목릉(丘穆陵), 보육고(步六孤), 하뢰(賀賴), 하루(賀樓), 독고(獨孤), 물뉴우(勿忸于), 달해(達奚), 위지(尉遲)등을 한족성으로 바꾸게 한다. 척발씨는 원(元)씨가 된다. 이는 낙양천도에 반대했던 공신, 귀족들의 불만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황태자 탁발순은 원래 부친인 효문제가 크게 기대를 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탁발순은 몸이 뚱뚱하여 낙양의 더운 날씨를 싫어했고, 매번 북방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한어로 말하거나 한복(漢服)을 입는 것도 싫어하여 황제가 내린 한복도 모조리 찢어버렸고 머리카락이나 의복을 여전히 선비족의 옛풍습대로 했다. 중서자(中庶子) 고도열(高道悅)이 여러 번 그를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원한을 품는다. 그는 사람들의 천도에 대한 불만에 편승하여 귀족, 공신들 중에서 북방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깊이 교류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태화20년(496년) 팔월, 효문제가 숭산(嵩山)으로 순행하면서 그에게 금용성(金墉城)을 유수하도록 한 틈을 타서, 그는 심복들과 공모하여 궁중의 어마 3천필을 이끌고 평성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직접 고도열을 죽여버린다. 사건발생후, 원엄(元儼, 탁발씨가 원씨로 성을 바꾸었음)이 병력을 보내 궁문을 엄격히 통제하여, 사건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다음 날 새벽 상서 육수는 말을 타고 달려가 효문제에게 보고한다. 효문제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중도에 급히 낙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태자 탁발순을 보자 화를 누르지 못하고, 그의 죄를 나열하며, 직접 곤장을 들고 때린다. 다시 함양왕 원희(元禧)등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탁발순의 곤장을 100여대 때리게 한다. 살이 찢어지고 피부가 터질때까지 때리고 나서야 궁문밖으로 끌어내어 성의 서쪽 별관에 구금한다. 1개월이 지난 후 탁발순의 상세가 호전되어 침대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다. 십월, 효문제는 청휘당에서 신하들을 만나 탁발순을 태자에서 폐위시키는 건을 논의한다. 태자의 두 스승인 태부 목량, 소부 이충이 나서서 관모를 벗고 사죄하나, 효문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죄를 청하는 것은 사적인 정이고,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일이다.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의멸친(大義滅親)하라고 했다. 이 아이를 오늘 없애지 않으면, 곧 국가의 큰 화가 될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진나라말기에 일어났던 영가의 난(永嘉之亂)같은 일이 일어날까 우려된다”라고 한다. 십이월 그는 척발순을 태자에서 폐위시키고, 하양 무비성(無鼻城)에 감금하고 병력을 보내어 감시한다. 옷과 음식은 겨우 추위와 허기를 면할 정도만 공급했다. 다음 해 사월, 효문제가 장안으로 갔을 때, 어사중위 이표(李彪)가 밀서를 올려 탁발순이 다시 심복들과 모반을 꾀한다고 고한다. 그러자, 효문제는 급히 함양왕 원희와 중서시랑 형만(邢巒)등에게 보내어 척발순으로 하여금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게 한다. 척발순은 이렇게 짧은 15년의 인생을 마치게 된다.
탁발순이 폐위되는 그 달에 항주자사 목태, 정주자사 육예가 공모하여 진북대장군 원사예, 안락후 원륭, 무명진장 노군후 원업, 효기장군 원초 및 양평후 하두, 사성교위 원낙평, 전팽성진장군 원발, 대군태수 원진등과 함께 삭주자사 양평왕 원이를 우두머리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천도와 선비족의 언어와 풍속을 바꾸는데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원래 태자를 낙양에서 빼내어 평성으로 모셔가려고 계획을 세웠던 자들이다. 탁발순은 부친의 정책(천도, 한화)에 불만을 품은 귀족, 대신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부친에 대항하려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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