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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양차동풍술(亮借東風術) 태제입승패(太弟入承牌) 야율중원

by 중은우시 2015. 10. 11.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차남인 야율중원(耶律重元)은 특이하게도 황태제(皇太弟), 황태숙(皇太叔)의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황제의 아들이 아닌 동생, 숙부의 자격으로 황제의 자리에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갔지만, 결국 황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요흥종(遼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의 동모(同母) 동생이다. 1031년 유월 초삼일 부친인 요성종이 죽은 후, 태자였던 야율종진은 황제로 등극하여 요흥종이 되고, 그의 생모인 원비(元妃) 소누근(蕭耨芹)은 스스로 황태후에 올라 섭정을 한다(즉위시에 요흥종의 나이는 만16살이고 요성종의 정실황후가 있음에도). 원래 야율종진은 태어나면서 아들이 없는 요성종의 제천황후(齊天皇后) 소보살가(蕭菩薩哥)에게 보내어져, 제천황후가 자기 자식처럼 그를 길러주었다. 호위인 풍가노, 희손등은 황태후 소누근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북부재상 소착복(蕭浞卜), 장인 소필적(蕭匹敵)이 모반했다고 고변하고,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제천황후 소보살가까지 연루시킨다. 요흥종이 이 사실을 알고, “황후는 선제를 사십년간 모셨고, 나를 어른으로 길러주셨다. 원래 태후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태후가 되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그를 처벌하겠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소누근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있으면 후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요흥종은 반대한다: “황후는 자식도 없고 나이도 많다. 여기에 계시더라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소누근은 아들 요흥종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보살가를 상경(上京)으로 쫓아보낸다. 그 후 요흥종이 봄사냥에 상경으로 가려 하자, 소누근은 그가 소보살가가 길러준 은혜를 그리워할까 우려하여, 사람을 보내 소보살가를 죽여버린다. 이렇게 황태후와 요흥종 모자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소누군의 권력욕을 계속 팽창한다. 그녀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증조부를 난릉군왕에 추증하고, 부친을 제국왕으로 하고, 동생들도 모두 왕에 봉한다.” 이러한 조치로 요흥종의 불만은 더욱 커진다. 그녀는 심지어 요흥종의 일거일동을 모두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그리하여 모자간의 관계는 더욱 긴장된다. 그러자, 황태후는 요흥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 권력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소효선등 형제를 불러모아 요흥종을 폐위시키고 차남 야율중원을 황제에 앉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야율중원은 모친의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을 형인 야율종진에게 고한다. 이제 요흥종도 더 이상 모자간의 정울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1034년 오월, 소누근과 요흥종은 행궁으로 피서를 간다. 소누근의 심복들은 모두 중경에 남아 있었다. 요흥종은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먼저 구실을 잡아 소효선을 체포한다. 그리고, 그를 심문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야율중원을 세우려 한 음모에 관한 진술을 받아낸다. 이어 500명의 친병을 동원하여 행궁을 포위하고, 야율희손은 소누근의 침상으로 밀고 들어가 그녀의 곁에 있던 수십명의 내시를 죽여버리고, 죄수를 태우는 수레에 소누근을 태워 경주(慶州)로압송하여 경릉(요성종의능)에 연금시킨다. 다음 날 조서를 내려 황태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든다. 소누근집단은 모조리 제거된다.

 

세월이 흐른 후 요흥종은 칠순이 된 모친 소누근을 황궁으로 다시 모셔와서 봉양한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 모자간의 원한은 더욱 쌓여가고 미움은 더욱 깊어지며, 서로를 경계했다. 우연히 함께 길을 가더라도 수십리 떨어져 갔다. 1055년, 요흥종이 사망한다. 그러나 소누근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며느리인 숭성황후 소달리(소누근의 남동생인 소효목의 장녀)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자, 소누근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넌 아직 젊은데, 뭐 그리 애통해 하느냐.”

 

요흥종은 권력을 찾은 후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대거 봉상을 내린다. 그중에서도 동생 야율중원은 황태후의 음모를 자신에게 알려주어 황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고마웠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황위와 목숨은 모두 동생 야율중원 때문에 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대의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제도를 떠올려서 야율중원을 ‘황태제’로 앉히고,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야율중원을 북원추밀사, 남경유수, 지원수부사에 임명하여 권력을 강화시켜줌으로써 그에게 황위를 전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다. 심지어 야율중원이 아들을 낳자, 장춘, 진북 두 개의 주에서 유기징역이하의 형을 범한 죄인들을 모두 사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야율종진은 황위를 야율중원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던 것같다. 장남인 야율홍기(耶律洪基)가 6살이 되자, 그를 후계자로 교육시키며, 먼저 양왕(梁王)에 봉하고, 11살때는 총령중승사사에 임명하고, 연왕(燕王)에 봉한다. 그리고, 12살이 되자, 총지북남추밀원사, 상서령에 임명하고, 연조국왕(燕趙國王)에 봉한다. 19살때는 영북남추밀원사가 되고, 21세때는 천하병마대원수가 되어 조정에 참여한다. 그리고, 자신의 병세가 위독할 때, 황태제 야율중원을 부르지 않고, 자신의 장남인 야율홍기를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요결을 전수하고, 유조(遺詔)로 황태제 야율중원이 아닌 연조국왕 야율홍기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게 한다. 그가 요도종(遼道宗)이다.

 

야율중원의 권력욕은 상당히 커져 있었고, 게다가 야율중원의 아들 야율열로고(耶律涅魯古)도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그의 권력욕은 부친 야율중원보다 크면 컸지, 적지는 않았다. 요도종은 즉위시부터 야율중원 부자의 도전에 직면한다. 그러자, 그는 야율중원 부자를 다독이는 정책을 취한다. 그리하여, 요도종은 야율중원을 황태숙에 앉힌다.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천하병마대원수의 자리도 준다. 금권(金券)을 내리고, 사정모(四頂帽), 이색포(二色袍)를 입게 하여 더 이상 존귀할 수 없을 정도로 대우해준다. 야율중원의 아들인 야율열로고는 요흥종때 안정군왕, 초왕에 봉해졌는데, 요도종이 즉위한 후에는 오왕, 초국왕으로 옮겨가고, 청녕3년에는 무정군절도사가 되며, 7년에는 지남원추밀사사가 된다. 이렇게 하여 야율중원부자의 기세는 더욱 올라간다. 청년7년 야율열로고는 부친이 병이 든 것처럼 위장하여, 요도종이 문안을 오면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야율중원은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북으로 도망쳐 대막에서 자결하고 만다.

 

공로 때문에 임명되었건, 각까운 혈연관계로 인하여 임명되었건 황태숙, 황태제, 황태자는 황위계승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이다. 그러나, 황태숙, 황태제, 황태자에 올랐던 인물들 중에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가장 중요한 징검다리로 황태숙, 황태제, 황태자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는데, 어떤 경우는 황제가 이를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즉, 황제는 누군가를 황태숙, 황태제, 황태자로 세울 때, 그에게 황위를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방패막이로 이용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또 다른 강대한 세력이 황위를 찬탈하려는 것을 막는데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