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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양차동풍술(亮借東風術) 태제입승패(太弟入承牌) 이염편

by 중은우시 2015. 10. 11.

 

당목종(唐穆宗) 이항(李恒)의 아들중에서 3명이나 황제에 오른다. 그가 820년에 즉위한 후 5년간 재위하다가 824년 죽은 후, 먼저 장남 당경종(唐敬宗) 이담(李湛)이 황제에 오르나, 2년만인 826년 십이월 초팔일 환관 유극명(劉克明)등에 의해 살해당한다. 유극명등은 유지를 위조하여, 당헌종의 아들 강왕(絳王) 이오(李悟)을 입궁시켜 황제에 올린다. 그러나 이틀 후, 환관 왕수징(王守澄), 양수겸(梁守謙)등이 신책군을 지휘하여 유극명과 강왕 이오를 죽이고, 당목종의 차남 당문종(唐文宗) 이앙(李昻)을 황제에 올린다. 당문종은 826년부터 840년까지 14년간 재위하나, 그 기간동안 우리당쟁(牛李黨爭)이 있었고, 조정의 권력과 황제의 생사는 모두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문종은 대신의 힘을 빌어 환관을 치려다 감로지변으로 실패한 후, 거의 허수아비로 지내며 우울증이 악화되어 향년32세로 죽는다. 그가 죽은 후, 당목종의 다섯째 아들인 당무종(唐武宗) 이염(李炎)이 황제에 오른다. 그는, 당나라말기에 보기 드물게 업적을 세운 황제로, 그 시기를 “회창중흥(會昌中興)”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의 즉위는 우여곡절을 거쳐 이루어졌다.

 

당문종이 즉위한 후, 처음에 황태자로 삼으려한 인물은 형인 당경종의 장남 진왕(晋王) 이보(李普)였다. 그러나, 이보는 828년 유월 겨우 5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당문종은 이보를 황태자로 추사(追賜)한다. 832년 십월에 이르러, 당문종은 자신의 아들 노왕(魯王) 이영(李永)을 태자로 삼고, 다음 해 팔월 책봉의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당문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양비(楊妃)는 태자 이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폐위시키려 여러가지 수완을 쓴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로 그녀의 폐위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838년 십월 태자 이영은 명이 박했던지 급사하고 만다. 그러자, 양비는 당목종의 여덟째아들이자 당문종의 동생인 안왕(安王) 이용(李溶)을 황태제로 적극 추천한다. 당문종이 망설일 때 재상 이각은 당경종의 여섯째 아들인 진왕(陳王) 이성미(李成美)를 태자로 삼을 것을 청한다. 결국 당문종은 이각의 의견에 따라 양비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성미를 황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미처 책봉의식을 거행하기도 전에 당문종은 병석에 눕게 된다. 당문종은 유홍일, 이각을 불러 태자를 받들어 ‘태자감국(太子監國)’을 하도록 밀지를 내린다. 당시 조정은 후계구도를 놓고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유홍일, 이각, 설계릉등의 대신들은 황태자 이성미를 지지하나, 환관 구사량, 어홍지는 황태자인 이성미가 황제에 오르면 유홍일, 이각등의 공로가 될 것이고, 자신들의 공로는 없게 되므로, ‘태자가 나이도 어리고 병약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이성미를 폐위시키고 새로 황태자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각이 “태자의 자리는 이미 정해졌다. 어찌 함부로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반나절동안 결사반대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자, 구사량, 어홍지로서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만일 이성미가 황제에 오르면, 자신들은 그의 폐위를 주장한 바 있으므로 호된 보복을 당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병귀신속(兵貴神速), 즉 행동은 재빠를수록 좋다. 더욱 불안해진 구사량, 어홍지는 아예 성지를 위조하여 당목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당문종의 동생인 영왕(潁王) 이염을 황태제(皇太弟)로 삼는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십육택(十六宅, 황족들의 거주지)으로 가서 이염을 황궁으로 모셔온다. 태자 이성미는 다시 진왕이 되어 진왕부로 돌아간다. 며칠 후 당문종이 죽고, 이염이 즉위하여 당무종이 된다. 그는 곧이어 이성미를 죽여 후환을 없앤다.

 

이염의 즉위와 관련하여 <당궐사(唐闕史)>에는 기녀출신의 왕재인(王才人)이 그의 즉위를 도운 미담이 전해진다. 역시 성공한 남자의 배후에는 반드시 비범한 여인이 있는 법이다:

 

당무종 이염(황제에 오르기 전의 이름은 이전(李瀍))이 살았던 시기는 환관이 득세하던 시기이고, 당목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그는 원래 황제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황위는 부친 당목종, 큰형인 당경종, 둘째형인 당문종으로 넘어갔고, 그는 그저 말을 타고 유람이나 다니고, 신선을 꿈꾸며 연단이나 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바깥나들이를 나갔다가 왕(王)씨성의 기녀를 만나는데, 그녀는 좌중을 압도할 미모를 지녔을 뿐아니라, 노래와 춤이 모두 뛰어났다. 그리하여 이염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속신(贖身)시키고 자신의 왕부로 데려온다.

 

구사량과 어홍지가 성지를 위조하여 이염을 황태제로 앉혔다는 것이 정사의 기록이나, <당궐사>에서는 다른 형태의 해프닝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즉, 구사량과 어홍지는 성지를 위조하여 원래 안왕(安王) 이용(李溶)을 황태제로 책봉한다고 하고, 신책군을 십육택으로 보내어 안왕을 맞이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 구사량의 말을 전하는 심복이 신책군에게 “큰 사람을 영접하라(迎接大的)”고만 말했다고 한다. 그 뜻은 안왕의 나이가 영왕보다 많으므로, 안왕 이용을 모셔오라는 것이었다(이 부분은 의문이 있다. 정사에 따르면 안왕은 여덟째 아들이고 영왕이 다섯째 아들이어서 오히려 영왕의 나이가 많다).

 

당시, 안왕 이용과 영왕 이염은 모두 형인 당문종의 총애를 받았고, 모두 왕야들이 사는 십육택에 살고 있었다. 구사량이 파견한 신책군은 구사량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십육택까지 갔는데, 도대체 안왕 이용을 데려가야할지, 영왕 이염을 데려가야할지를 몰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왕부안에 있던 안왕과 영왕은 모두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들었다. 그러나, 누구를 데려갈지 확정되기 전에는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 기녀출신의 왕재인이 나선다. 그녀는 대담하게 신책군의 앞으로 걸어나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말하는 ‘큰 사람’은 바로 영왕 전하이시다. 영왕은 몸이 커서 당금황제도 그를 ‘대왕’이라 칭할 정도이다. 그리고 영왕은 너희 구사량 중위와 생사지교를 맺고 있다. 이런 대사는 너희가 신중해야 한다. 잘못했다가는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

 

신책군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그 때 왕재인은 다시 몸을 돌려 왕부로 들어가 병풍뒤에 숨어서 보고 있던 이염의 등을 떠밀어 집밖으로 나온다. 과연 그는 몸집이 컸다. 신책군은 군말없이 즉시 영왕을 모시고 황궁으로 간다. 나중에 구사량, 어홍지등은 사람을 잘못 데려온 것을 알았지만, 이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장계취계(將計就計), 장착취착(將錯就錯)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영왕 이염이 황태제에 오른다. 며칠 후 당문종이 서거하고, 이염이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당무종이다. 당무종의 즉위를 도운 왕재인은 당무종이 사망하자 목을 매어 자결해 그를 따라간다. 후임황제 당선종은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 현비(賢妃)로 추증(追贈)한다.

 

왕재인이 당무종의 즉위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다는 “영왕은 구사량과 생사지교이다”라는 말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신당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당무종의 현비는…영왕이 황제에 오르는데 음으로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재인이 된다.” 이를 보면 당무종, 왕재인은 구사량과 이전부터 친했고, 사전에 결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문종과 당무종의 사례에서는 반드시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가 되더라도 황제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황제의 아들들 뿐아니라, 황제의 동생들도 황태제에 오르기만 하면 황위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황태자이건 황태제이건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이미 용상의 팔걸이는 만진 격이다. 용상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