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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천사재화패(天賜才華牌) 혁흔편

by 중은우시 2015. 10. 11.

 

청나라 도광제 민녕(旻寧)이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고민할 때, 그의 9명 아들중에서 3명은 이미 요절했고, 3명은 나이가 너무 어리며, 1명은 후사가 없는 다른 형제에게 양자로 보내어, 후보로 남은 아들은 황사자 혁저(弈詝)와 황육자 혁흔(弈訢)의 두 명이었다. 혁저는 위의 세 명의 형이 모두 요절하여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 그리고, 모친인 뉴후루씨는 황제를 잘 받들고, 후궁들을 존중하며, 태후를 잘 모셔서 도광3년에 전비(全妃)가 되고, 도광5년에는 귀비(貴妃)에 오르며, 도광13년 사월 황후 퉁쟈씨가 죽자 그녀는 후궁을 총괄하는 황귀비(皇貴妃)에 오른다. 다음 해 10월에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된다. 만주족은 원래 모친의 지위를 중요시 여겼는데, 도광제는 뉴후루씨를 아주 총애했다. 이런 점들은 혁저에게 유리했다.

 

혁흔은 나이나 모친의 존귀함에서는 혁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혁저가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첫째는 혁저의 생모인 황후 뉴후루씨가 죽은 후, 도광제는 혁저를 혁흔의 생모인 보얼지지터씨에게 맡겨 기르게 한다. 이를 보면, 도광제가 혁흔의 생모인 보얼지지터씨를 매우 총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혁흔은 총명하고 기민했다. 이 점에서 혁저는 도저히 혁흔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청사고>를 보면, 혁흔은 혁저와 함께 창법(槍法) 이십팔세와 도법(刀法) 십팔식을 만들었다. 도광제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데, 창법에는 “체화협력(棣華協力)”이라는 이름을, 도법에는 “보악선위(寶鍔宣威)”라는 이름을 각각 붙여준다. 그리고, 도광제가 이와 동시에 혁흔에게 보검 “백홍도(白虹刀)”를 내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창법과 도법은 주로 혁흔이 만들고, 혁저는 기껏해야 보조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사서에서 이를 혁저와 혁흔의 ‘공동제작’이라고 쓴 것은 후세 사가들이 함풍제 혁저를 치켜세우거나 아첨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광제 말년의 어느 봄날, 그는 친히 황자들을 데리고 남원(南苑)으로 사냥에 나선다. 이 같은 교외사냥은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한 이후까지 보존하고 있던 유목민족의 습성중 하나로, 이를 통해 말타기와 총쏘기등의 무예를 익혔다. 교외사냥을 하던 곳으로는 남원외에 열하행궁(熱河行宮), 목란위장(木蘭圍場)등이 있다. 혁저와 혁흔은 모두 이번 사냥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를 숭상하는 부친 도광제가 자신들의 말타기와 총쏘기, 즉 무예를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을. 혁흔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주를 드러낸다. 그의 총성이 울리는 곳에는 사냥감이 한마리씩 쓰러지는 탄무허발(彈無虛發)의 묘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잡은 사냥물은 형제들중 가장 많아서, 마치 선조인 강희, 건륭의 어린시절을 다시 보는 것같았다. 이를 보는 도광제는 계속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도광제의 병세가 위독할 때, 혁저와 혁흔은 둘 다 병상의 옆을 지키며 한걸음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도광제가 회광반조로 맑은 정신이 돌아왔을 때, 두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국사는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너희 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내게 얘기해 보아라.” 혁흔은 청산유수로 대신을 어떻게 고르고, 적절한 자리에 어떻게 배분할지에서부터 군사문제는 어떻게 처리하고, 외교는 어떻게 할지를 조리있게 얘기한다. 실로 “지무불언(知無不言), 언무부진(言無不盡)”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병석에 누워있는 도광제의 신체에 대한 걱정이나 우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또한 효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3년은 아버지가 해오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三年不改父之道)”의 도리도 잊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혁저는 한편으로 혁흔이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며, 말이 많은 약점을 꼬집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항상 효성과 인의를 앞세워 결국 도광제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한다.

 

결국 도광30년(1850년) 정월 십삼일, 도광제는 원명원 신덕당에서 일부 대학사와 군기대신을 불러 후계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황사자 혁저를 황태자로 세우니, 그대들 왕공대신들은 짐의 말을 기다릴 것없이, 한 마음으로 보좌하며, 항상 국계민생을 중시하여 힘든 사람을 구휼하는데 힘쓰라”, “황사자 혁저를 황태자로 세우고, 황육자 혁흔을 공친왕에 봉한다”라는 두 개의 유조를 작성하여 휼갑(鐍匣,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담는 목갑)에 넣어 ‘정대광명’ 편액 뒤에 놓아둔다. 그리고 다음 날인 십사일에는 종인부 종령인 정군왕 대전, 어전대신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커얼친부군왕 승거린친(僧格林沁), 군기대신 목창아, 새충아, 하여림, 진부은, 계지창 및 총관내무대신, 보군통령 문경등 10명을 어탑(御榻) 앞으로 불러 휼갑안에 든 유지의 내용을 공개한다. 이렇게 하여 혁흔은 철모자왕인 공친왕의 지위를 차지했을 뿐, 황위와는 인연이 없게 된다. 그가 십수년간의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재주를 기반으로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어떤 때는 재고팔두(才高八斗)하여 다른 형제들을 압도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지만, 또 어떤 때는 재주를 너무 드러내다가 황제의 눈밖에 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사례로는 수양제의 아들 양간(楊暕)이 있다. 황태자 양소(楊昭)가 죽은 후 수양제의 유일한 아들인 그는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아들이어서 경쟁할 상대가 없다고 보고 마음놓고 부친처럼 여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 가끔 수양제나 신하들이 탄복할 일을 벌이곤 했다. 하루는 수양제가 양간을 데리고 사냥을 나선다. 양간은 짐승과 새를 가득 잡았는데, 수양제는 반나절동안 참새 한 마리,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사냥이 끝난 후 수양제는 스스로의 사냥기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양간이 자식으로서 효심이 없어, 여러 신하들 앞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황제인 자신을 망신주었다고 여기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을 시켜 양간의 잘못을 수집하게 한 후, 태자지위를 박탈해 버린다.

 

이를 보면,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어 황제의 총애를 받고자 하는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조조, 송태조, 당태종같이 재주만 있으면 기용하고 재주있는 사람을 목숨처럼 아끼는 황제라면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드러내도 좋다. 그러나, 수양제, 옹정제와 같이 지모는 있지만, 시기심이 많은 경우에는 재주를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일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화가 되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